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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lovestory_93425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4
    조회수 : 630
    IP : 14.58.***.139
    댓글 : 0개
    등록시간 : 2022/07/18 12:58:19
    http://todayhumor.com/?lovestory_93425 모바일
    [BGM] 나는 하얗고 너는 희다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이승희, 안녕




    스페인에서 온 엽서에는 흰 벽에 햇살이 가득했고

    맨 마지막 안녕이란 말은

    등짐을 지고 경사가 가파른 골목을 오르는 당나귀처럼 낯설었다

    내 안녕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가만히 몸을 만져본다

    두꺼운 책처럼 아무도 오지 않는 저녁

    그 어떤 열렬함도 없이 구석에서 조용조용 살았다

    오늘 내게 안녕을 묻는 이의 이름을 떠올린다

    그에게 수몰된 내 마음 보였던가

    구석에서 토마토 잎의 귀가 오래도록 자란다고 말했던가

    내 안녕은 골목 끝에서 맨드라미를 만나

    헛꿈들을 귓밥처럼 파내던 날 죽어버렸다고

    물은 결국 말라서 죽는다고 말했던가

    나는 누군가에게 안녕이란 말을 했던가

    더는 물어뜯고 싶지 않다고 조용히 말했던가

    안녕을 묻는 일은 물속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 같다고

    물속에 대고 이름을 불러주는 일

    그리하여 물속에 혼자 집 짓는 일이라고 말했던가

    안녕, 그 말은 맨발을 만지는 것처럼 간지러워 킥킥대다가도

    그 말에 목을 매고 싶을만큼 외로웠다고 비명처럼 말했던가

    말을 했던가

     

     

     

     

     

     

    2.jpg

     

    이응준, 안부




    잠들기 전에

    나는

    어서 너를 떠올려야지


    새벽이 목마르고 영원이 썩었는데

    다시 눈 뜰 수 있을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의심하고 있는

    인간의 가장 비천한 순간에

    나는

    너를 한 번 더 그리워해야지


    예수는 아무것도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사랑은 씻을 수 없는 죄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


    왕도 왕국도 사라진 유적의 돌계단 위에

    금방 처형당할 것처럼 목을

    숙이고 앉아


    죽이고 싶은 이름들을

    수첩 귀퉁이에 적어 내려가던

    그 어느 날의 사악함으로

    이를 악물어야지


    잊지 않겠다고, 내가 너를 참 좋아했다는 것

     

     

     

     

     

     

    3.jpg

     

    황경신, 천천히 어둠이 걷히고




    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캄캄한 어둠 때문이었나

    길이 끝났다고 생각한 것은

    희미한 새벽안개 때문이었나


    내 절망의 이유는 언제나 너였고

    절망에서 나를 구한 것은

    너의 단단하고 따뜻한 손이었다


    천천히 어둠이 걷히고 모퉁이

    저편에 서서 손을 흔드는 네가 보인다


    어서 가라는 뜻인가, 어서 오라는 뜻인가

     

     

     

     

     

     

    4.jpg

     

    진은영, 인공호수




    죽은 식물과 동물의 냄새가

    내 얼굴에 배어 있다

    조금만 햇빛을 쬐어도

    슬픔이 녹색 플랑크톤처럼

    나를 덮는다

     

     

     

     

     

     

    5.jpg

     

    이혜미, 개인적인 비




    각자의 지붕 아래에서 맞닿았지

    품속의 작은 단도들이 차르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세계의 그림자를 짚어내며 빛을 빚는 비

    묽은 촛불들을 곳곳에 사르며 사라지는 비


    비는 옮아가는 질병인가

    휘몰아치는 눈썹들인가

    갈피를 놓친 낱장들인가

    검은 반지를 깨뜨리고 빠져나오는 반투명의 손가락들

    오늘은 약속을 팽개친 손들이 아주 많아


    겁쳐지며 각자를 밀어내는 지붕 밑에서

    우산마다 소분(小分)하여 보관하던 하루치의 강수량을 꺼내 펼치면


    그곳은 나의 영토이지 너의 시간이 아니야

    너의 다정, 너의 귀가, 너의 얼룩진 셔츠 소매 사이로

    흘러나오는 희고 무른 손가락들


    우리는 아름답게 걷는다

    근사하지만 하나는 아니야

    우산이 언제나 비보다 느리듯

    생각은 늘 피보다 느리고


    근사하다는 건 가깝다는 것

    나는 하얗고 너는 희다

    나는 혼자이고 너는 하나뿐이다

    비슷하지만 같은 건 아니야

    우리는 서로의 지붕에 지붕을 보태며

    지속되는 빗속을 조금쯤 가깝게 걸어간다

     

     

     

     

     

     

    통통볼의 꼬릿말입니다
    kYOH2dJ.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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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7/18 17:44:33  1.227.***.251  볼빵빵고양이  58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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