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한 일
내가 기억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기억은 세 살 때 일이다.
찬 바람이 불던 무렵의 저녁, 혼자서 그네를 타고 있었다.
손발 모두 꽁꽁 얼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면 엄마가 혼낼 게 뻔했다.
할머니가 데리러 오셨으면 좋겠다.
여긴 내가 항상 오는 공원이니까 바로 아실 수 있을 거다.
바람에 흔들리는 건지, 그네가 흔들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엄마의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
물을 흘리거나, 발소리를 약간 내며 걷거나, 소리를 내며 웃는 그런 이유로 혼나곤 했다.
분이 풀릴 때까지 때리거나, 안전핀으로 엉덩이를 찌르거나, 겨울에 차가운 물에 들어가게 했다.
담배를 피우고 등에 비벼 끄거나, 식사 굶기기, 집에 못 들어오게 하기.
나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엄마 표정은 즐거운 것 같았다.
아빠는 보고도 못 본 척을 했다.
혼나며 걷어차이는 내 옆에서 TV를 보며 식사하셨다.
끝나면 "엄마 말 잘 들어야지"라고 하셨다.
할머니만이 날 도와주셨다.
혼나고 남은 상처도 치료해주고, 같이 자주셨다.
날 감싸다가 대신 차이시기도 했다.
그 장면을 봤을 땐 무서워서 울고 말았다.
너 때문에 내가 아팠잖아라며 혼내시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제 날 미워하시진 않을까 하고 무서워서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둘이 방에 돌아가서 울면서 할머니 발에 파스를 붙여드리며
나는 맞아도 괜찮으니까 그러지 말라고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에게 미움받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다.
할머니는 날 안으시며 우셨다. 그리고 그대로 같이 잤다.
아마 5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밤에 눈을 떠보니 옆에서 주무시던 할머니가 안 보였다.
화장실 가셨나보다 싶어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한참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셨다.
행여나 엄마한테 엄한 꼴을 당하신 게 아닌가 싶어 살짝 일어나 문 밖 소리를 들어봤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 내지 않게 조심하며 문을 열고, 할머니를 찾아다녔다.
어두운 집 안에서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했다. 들키면 또 맞을 게 뻔하니까
화장실, 부엌, 거실 어디에도 안 계셨다.
어쩌면 날 버리고 나가신 게 아닌가 싶어,
거실을 지나 현관에 구두가 있나 없나 보러 가려고 했다.
정원 쪽 창문 커튼이 조금 열려 있었다.
밖에 누가 서 있는 것 같아서 틈새로 엿봤다.
할머니셨다. 내 쪽을 보며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다행이다. 날 버리고 가지 않았어.
가슴 가득 안심하며 커튼을 열려고 했다.
그러다 멈췄다. 어딘가 이상했다. 할머니가 평소와 달랐다.
저렇게 이상한 할머니는 본 적 없었다.
어디가 이상한 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개 목을 들고 있었다.
어기서 잡아왔는지 옅은 갈색의 개에, 혀를 길게 빼고 있었다.
아마 중형견 정도 되는 크기였는데, 목을 자르긴 힘들었을 거다.
개 머리, 발치에 굴러다니는 몸통, 할머니 모두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한참 서계시던 할머니가 피곤한 듯 개 몸과 머리를 들고 어디론가 가버리셨다.
봐선 안 되는 걸 본 것 같아, 떨면서 이불 안에 들어가
할머니를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신이란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눈을 떠보니 할머니는 내 곁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으셨으면 어쩌지 싶어서 안 깨우고 계속 바라봤더니 눈을 뜨셨다.
"잘 잤니? 배 안 고프니?"라며 웃으시는 할머니는 평소 그대로였다.
아, 다행이다. "응, 배고파"라고 답했다.
할머니 곁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집 안에 여우, 너구리, 개 같은 게 어슬렁거리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빠와 엄마 둘 다 신경 안 쓰는 것 같아서 나한테만 보이는구나 했다.
어느 날 할머니에게 그 말을 했더니, 매우 기뻐하시는 것 같았다.
그것이 무얼 하든? 하고 물으시기에 그대로 대답했다.
아빠와 엄마 곁에서 붙어 있으니, 둘 다 표정이 안 좋았다고.
밤중에 엄마가 소리치는 일이 잦아졌다.
낮에도 서슬이 퍼랬다. 수면 부족이라고 하는 듯 했다.
엄마 몸 상태가 안 좋아진 후, 체벌은 많이 줄었지만 신경이 날카로웠던 것 같다.
온 몸을 라이터 불로 지지거나, 손바닥에 뾰족한 연필을 몇 자루나 찔러대곤 했다.
그때부터 할머니가 현관으로 드나들지 말라고 하셨다.
왜 그런지는 여쭤보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할머니가 시키신 일이니까.
할머니와 나는 뒷문에 신발을 두고, 거기서 집으로 드나들었다.
집안에 비린내가 났다. 특히 엄마 아빠에게서 심하게 났다.
둘 다 깔끔떠는 사람들인데, 점점 차림새가 흐트러졌다.
손톱을 기르고, 그 안에 검은 때가 끼었다.
옷도 지저분하고 젓가락질도 안 했다.
아빠는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인지 들어보려고 뒤에 다가가봤지만 알아듣지 못 했다.
냄새가 심했다. 짐승 냄새인지 아빠 속옷에 묻은 배설물 냄새인지 모르겠다.
엄마는 새된 소리를 질렀다. 허공에 대고 칼을 휘둘렀다.
그러고보니 요즘 안 맞았다.
엄마에게 내가 안 보이는 것 같다.
7살 무렵, 시청 사람, 병원 사람들이 와서 아빠와 엄마를 데려갔다.
할머니는 잘 부탁 드린다며 고개를 조아리셨는데
사람들이 가자, 날 돌아보며 웃으셨다.
나도 웃었다. 사랑하는 할머니와 둘이서 산다. 이제 무서울 게 없었다.
열세 살 무렵에 할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셔서 몸이 꼼짝도 않으셨다.
집에 있던 짐승들은 다들 할머니에게 붙어 있었다.
그렇게 말했더니,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돌아왔나보구나'라고 하셨다.
그리고 2년, 치매로 천천히 아이로 돌아가더니 타계하셨다.
온 몸에 원인 불명의 습진과 두드러기가 퍼져서 마구 긁으시다가 돌아가셨다.
시체를 해부해보니, 사인은 두드러기로 목이 부어서 질식사하셨다고 했다.
원인불명의 습진과 두드러기는 동물 알러지 때문이라고 했다.
동물을 키운 적은 없었지만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아직도 그 집에서 살고 있다.
여전히 쪽문으로 드나들고 있다.
짐승들 모습과 함께, 짐승처럼 변한 할머니도 보인다.
할머니가 뭘 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날 위해 하신 것일 거다.
어떤 모습이건 할머니가 곁에 계신다. 그것만으로도 기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