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의 쿠미
마스다는 어릴 때 일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나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마스다는 어릴 때 나가노현에 있는 시골에 살았는데 친구가 별로 없어서 수업이 끝나면 항상 혼자 놀곤 했다.
집 주변에 다른 집도 드문드문하고 산과 강이 인접해 있어서 혼자 노는 것도 나름 질리지 않고 재밌었다고 한다.
길만 잃지 않을 정도로 근방을 탐험하고 다녔다.
여름 방학이 시작된 날 마스다는 눈에 익은 강둑을 걸으며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나하고 도전해보았다.
점차 낯선 풍경이 펼쳐졌고, 집도 거의 없어서 조금 불안했지만 아직 훤한 낮이었고 담력 시험도 겸해서 계속 나아갔다.
한참 가보니 강 옆에 작은 오두막 같은 게 보였다.
마스다의 어린 눈에도 그 조립식 오두막이 지어진 지 오래되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낡았다.
무엇보다 눈에 띈 것은 불투명 유리가 거의 다 깨져 있어서 안이 들여다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관으로 여겨지는 가벼운 플라스틱 문도 반 쯤 열려 있었고, 벽은 먼지와 진흙으로 더러웠다.
그야말로 폐허란 느낌이었다.
마스다의 탐험은 원래 담력 시험이 그 목적이기도 했기 때문에 폐허가 있으니 안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오후 3시라 날도 밝았다.
꽤 주저했지만 결국 용기를 내어 폐허로 들어가기로 했다.
문에 달린 스텐레스 손잡이를 돌려보니 예상대로 가벼운 재질의 문이라 거의 아무 힘 들이지 않고 손쉽게 열렸다.
안에 들어가자 바로 왼쪽에 간이 세면대가 있었고 맞은 편에는 5m 정도 되는 좁은 통로가 있었다.
통로 양쪽에 문이 여러 개 있었고, 아마도 방이 있었을 것이다.
마스다는 신발을 벗을까 했지만 여기 저기 진흙이 묻은 바닥을 보며 생각을 고쳐먹고 신발을 신고 통로에 들어 갔다.
문 하나를 열어보니 화장실이었다. 둘러봐도 딱히 별 다른 점은 없었고, 그냥 지저분한 게 다였다.
화장실 문을 닫고 안쪽 문을 열려고 했는데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 순간 갑자기 한기가 서렸다.
"아까 화장실 문 열 땐 안 이랬는데"
하고 생각했다.
천천히 문을 열고 안을 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여자애가 앉아있었다.
전신 거울이 하나 있었고 그 거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마스다 눈에는 거울을 바라보는 여자 아이의 뒷모습과 허리까지 오는 긴 흑발이 보였다.
"이, 이런 데서 뭐하는 거야?"
마스다도 혼자 폐허에 들어온 셈이라 남에게 뭐라할 처지는 못 되지만 이런 곳에 여자애가 혼자 올 일이 있을까 싶었다.
왜 이런 곳에서 혼자 거울 보고 있는 거지?
여자애는 뒤돌아서 마스다를 봤다. 세상에, 그 아이는 마스다와 같은 학교의 같은 반에 다니는 쿠미였다.
쿠미는 좀 어두운 아이였는데 쉬는 시간에도 거의 혼자 앉아 있었는데 아마 마스다처럼 별로 친구가 없었을 것이다.
"쿠미? 여기서 뭐해?"
마스다가 묻자 쿠미는 생긋 웃었다.
"어머, 마스다 아냐? 마스다야말로 이런 덴 왠일이야?"
"탐험. 사내아이라면 장래를 위해 탐험은 기본이지."
"어머, 그러니?"
쿠미는 또 생긋 웃었다.
"난 있지, 사실은 이 거울 너머에 있는 사람과 대화 중이야."
거울 너머 사람?
마스다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거울 너머에 사람이 있다고? 귀신이야?"
"아냐. 거울 너머에 사람이 있어. 말로 설명하긴 어려우니까 너도 와서 한 번 봐"
마스다는 쿠미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전신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한참동안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봤는데 거울 안엔 마스다와 쿠미 모습만이 비칠 뿐 딱히 '거울 너머 사람'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어디 틈새에서 몰래 들여다보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쿠미야, 있잖아"
"뭐?"
"그냥 평범한 거울 같은데. 정말 누가 있어?"
"응~"
쿠미가 잠시 침묵한 후 말했다.
"오늘 처음 본 거라 모르는 걸 지도 모르겠다. 나도 수 차례 보다가 보니 보인 거니까"
"그래? 그럼 너 언제부터 여기 온 거야?"
"일주일 정도 되었나? 그후론 매일 오고 있어. 그리고 이야기 나누지"
"그렇구나"
마스다는 쿠미 얼굴을 곁눈으로 봤다. 좀 이상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너 내일 한가해?"
쿠미가 물었다.
"응. 딱히 놀 친구도 없으니까 한가한 셈이지"
"그럼 내일도 여기 와봐. 나도 올 거니까"
"그래, 알았어. 그럼 내일 올게"
시계를 보니 벌써 4였다.
"쿠미 넌 집에 안 가?"
"너 먼저 가. 늦었지? 난 좀 더 있다 갈게"
"그래. 너무 늦게 가면 위험하니 조심해서 가"
그리고 마스다는 일어나서 쿠미를 둔 채 나왔다. 날이 약간 어둑해졌다.
집에 돌아가며 쿠미에 대해 생각해봤지만 학교에서는 거의 기억에 안 남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어서 원래 어떤 애였는지 알 수 없았다.
원래부터 저런 애였나.
이튿 날, 마스다는 아침부터 강을 따라 가서 정오 전에는 폐허에 도착했다.
거울 방에 가보니 쿠미는 이미 어제처럼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마스다가 쿠미 옆에 앉아서 거울을 들여다봤다.
"안녕"
쿠미가 말헸다.
"안녕"
마스다는 문득 쿠미는 어제 집에 안 간 게 아닌가 생각이 들았다.
이 어두컴컴한 폐허에 남아, 어둠 속에서 계속 거울을 들여다보는 쿠미 모습이 떠올라서 등줄기에 한기가 서렸다.
"쿠미 너 어제 집에 갔어?"
"당연하지"
"그치? 미안, 괜한 질문해서"
쿠미를 흘끔 봤더니 다리에 파란 멍이 몇 개 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팔에도 있었다.
"쿠미야, 너 다쳤어?"
쿠미는 잠시 침묵하더니 답했다.
"응, 어쩌다보니 좀"
그 후로는 왠지 말 걸기 껄끄러운 분위기여서 마스다는 가만히 거울을 빤히 보기로 했다.
그러자 어제는 몰랐지만 거울 속 어딘가가 좀 이상했다. 뭐지? 뭔가 이상한데? 어제랑 어딘가 다른데?
거울 속에 쿠미가 보이고, 내가 보이고.. 응? 나?
마스다는 거울 속에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비친다는 걸 깨달았다.
생김새는 자신과 똑닮았고 내가 오른손을 들면 저쪽은 왼손을 들었다.
분명 내가 틀림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기가 아닌 것 같았다. 전혀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
"쿠미야, 이상해. 거울 속에 누가 있어!"
"눈치 챘어? 맞아, 그게 바로 내가 어제 말한 거울 너머 사람이야"
쿠미는 마스다를 보며 생긋 웃었다.
마스다는 그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께름칙했다. 더이상 여기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황급히 일어서서 도망치듯 나와서 집까지 달려갔다.
그 이상한 환각이 머리 속에 새겨져서 도무지 떨칠 수 없었다.
집에 도착했다.
거실로 뛰어 들어가니 엄마가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마스다는 그 모습을 보고 굳어버렸다.
생김새와 '왔니?'하고 건넨 목소리는 분명 엄마였지만 어딘가 분명히 달랐다.
딴 사람이 마스다 집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자 화장실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빠와 닮았지만 달랐다. 딴 사람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집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 엄마와 아빤 어딨지?
마스다는 아무 말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돌돌 말고 떨었다.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내가 모르는 세상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거지? 대체 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 거울 때문이다. 필시 이건 폐허에 있는, 쿠미가 바라보는 그 거울 때문이다.
그 거울을 바라보고 거울 너머에 자신이지만 또 자신이 아닌 그 존재가 나타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게 틀림 없다.
"이를 어쩐담.."
마스다는 이불 속에서 어느 틈엔가 잠이 들고 말았다.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했다.
눈을 떠보니 방 안이 캄캄했다. 시계를 보니 저녁 8시였다. 낮에 있었던 일이 마치 꿈만 같았다.
살짝 이불을 빠져나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갔다가 입이 떡 벌어졌다. 모르는 남자와 여자가 밥을 먹고 있었다.
"어머, 깼니? 무슨 잠을 그리 오래 자니? 얼른 식사하렴"하고 그 여자가 말했다.
마스다는 아무 답도 하지 않고 손전등을 들고 집을 뛰쳐나왔다. 폐허로 달려갔다. 어떻게든 빨리 거울 앞으로 가야겠다.
마스다는 달리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어? 나는 누구지?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내가 누구였는지. 마스다 코우키라는 이름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나일까? 머릿속에 이상한 벌레가 잠식해서 뇌를 좀먹는 기분이었다.
30분 정도 달려서 겨우 그 폐허에 도착했다.
주위는 암흑에 휩싸여 손전등 빛이 닿는 곳 외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폐허에 들어가서 거울 방 문고리를 잡는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만약에 지금 이 문을 열었는데 쿠미가 있으면 어떡하지?
만약 정말 있다면 너무 무서울 것 같았다.
그런데 다행히 쿠미는 안에 없었다.
거울 속에는 손전등을 손에 쥔 자신과 꼭 닮은 모르는 사람이 비쳤다.
마스다는 방 한 켠에 굴러다니는 꽃병을 들어올려 거울을 향해 집어 던졌다.
거울은 너무나 쉬이 부서졌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가루가 났다.
마스다는 머리 속으로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누구인가 생각해보았다.
나는 마스다 코우키. 틀림 없어.
안심되었다. 끝없는 안도가 밀려왔다.
문득 바라보니 방 안에 내 손전등 빛이 아닌 다른 동그란 빛이 보였다.
돌아보니 쿠미가 서 있었다.
쿠미는 무표정한 눈으로 마스다를 쳐다봤다.
마스다는 그런 쿠미가 너무 무서웠다.
"미안해. 견딜 수 없었어. 쿠미 너도 분명 이런 거울은 없는 편이 나을 거야. 위험한 거야, 이건"
쿠미는 아무 말 않았지만 주머니 속에서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괜찮아. 거울 너머 사람은 이 손거울 안에도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후 쿠미는 생긋 웃더니 폐허에서 나갔다.
마스다는 그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아, 쿠미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가버린 거야.
여름 방학이 끝나도 쿠미는 등교하지 않았다. 선생님 말씀이, 여름 방학 도중부터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쿠미의 부모님은 그닥 신경도 안 쓰였는지 쿠미가 없어지고 사흘이나 지나서 경찰에 수색 요청을 냈고,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마스다는 아직도 그때의 자기 스스로가 누군지 알지 못 하던 그 이상한 느낌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