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이야기
내가 10년보다 훨 전에 겪은 일이다.
당시 나는 시골에서 살았다.
우리 집은 옛날에 세워진 전통 가옥이었는데,
주변엔 논밭뿐인 완전 시골이라는 점 외에는 그냥 평범한 집이었다.
대학도 졸업해놓고 취직은 안 하고 매일 빈둥거렸다.
부모님께 매일같이 혼났지만, 포기하셨는지 그냥 방치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찌질했던 것 같다.
어느 날, 매미 울음 소리를 들으면서 툇마루에서 멍하게 앉아 있을 때였다.
"마사"
이름을 누가 불러서 돌아보니, 툇마루를 사이에 두고 옆에 있는 방에 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다 늘어난 런닝 셔츠에, 황토색 복대 차림이었다.
만화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할아버지"다운 차림새였다.
우리 할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어릴 때부터 나한테 온갖 경험을 다 겪게 한 사람인데
솔직히 평범한 사람이 아니란 걸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 맞은 편에 앉으셨다.
"너 취직 안 하냐?"
"곧 할 거야"
"거짓말 마라. 평생 부모 등골 빼먹고 살 거냐?"
"눈치 챘어?"
"마사, 시골에 사는 사람은 정말 필요한 사람 아니면 멍청이야.
넌 필요한 사람도 아니고 멍청이도 아니니 저 멀리 나가서 일해"
"그게 뭐야 ㅋㅋ"
"다 널 생각해서 하는 소리야"
당시 할아버지 눈매가 서늘하게 무서웠다.
목소리는 상냥했지만, 처음 보는 날카로운 눈이 시선을 사로 잡았다.
그때는 할아버지가 뜻하는 바를 알아채지 못 했다.
그날 밤, 저녁을 다 먹은 후 거실 소파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야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
"마사"
또 할아버지가 말거셨다. 낮과 똑같은 차림새였다.
"왜?"
야구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전에 할아버지한테 반항하다가 혼쭐난 적이 있어서 순순히 대답했다.
"너한테 할 말이 있다"
그러더니 엿차하고 내 옆에 앉더니 계속 말하셨다.
"이 집 비밀을 알려주마"
"이 집 비밀?"
"이 집 천장에서 이상한 소리 난다고 한 적 있지?"
"응.. 뭐 그랬지"
나는 이 집에서 태어나서 수십 번이나 천장에서 나는 소리를 들은 적 있다.
누군가가 천장 구석구석을 마구 뛰어다니고 바람소리 같은 낮은 신음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온!@#^$%*&교@#%^$#&"처럼 이상한 경전 읊는 소리 같은 게 들리기도 했다.
그 소리는 할아버지가 저 말을 꺼내던 날까지도 들리곤 했다.
하지만 그런 소리가 나는 건 항상 나 혼자 있을 때였는데, 부모님께 말해봤지만 무시 당했다.
할아버지는 그러지 않으셨지만.
"그게 왜?"
내심 두근거리며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그거 말이다.. 천장에 모시고 있거든"
"..뭘?"
할아버지는 "아"하고 뭔가를 말하려다가 멈칫하셨다.
"아... 이름은 말하면 안 돼.."
"뭐야~ 그거 뭔가 위험한 것 같은데"
당시 동물들이 위험을 감지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위험 감지 스위치'가 반응했다.
"잠시 이리 와 봐라"
할아버지 손에는 어느 틈에 쥐었는지 손전등이 두 개 쥐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씨익 웃었다.
그때 난 이미 식은 땀이 흘렀다. 따라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20년 이상 살아온 집인데 엄청난 심령 장소에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마음의 준비할 시간을 달라며 야구 경기(30분 연장됨)를 다 보고 움직인 지라
아마 9시 반을 넘겼던 것 같다.
부모님은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한다며 이미 잠자리에 드셨다.
지금 아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인데 거참 팔자가 늘어지셨구만.
할아버지와 나는 툇마루를 지나 쭉 이어진 복도를 걸어갔다.
"여기다"
할아버지는 갑자기 멈춰서더니 오른쪽 장지문을 열었다.
여긴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쓰던 놀이방이었다.
게임도 하고 군인 인형을 가지고 놀곤 했던 그리운 방이다.
그런데 거의 창고화 되었다.
그러다 깨달은 바가 있었는데
"할아버지.. 저거.."
내가 가리킨 쪽엔 옻이라도 칠했는지 새카만 나무 문이 있었다.
내 기억에 저런 건 없었는데.. 그냥 흰 문이 달린 벽장이었는데.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네가 이 방을 안 쓰면서부터 바로 바꿨지"
할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말하더니, 벌벌 떠는 나는 본체만체하고 나무 문에 손을 댔다.
소리를 내며 나무 문이 열렸다.
그 안쪽은 새카매서 아무 것도 안 보였다.
나는 속이 안 좋아졌다.
할아버지에게 속이 안 좋다고 했지만, "익숙해질 거야"라며 일축했다.
(할아버지는 요괴할아범이 틀림 없다며 한층 더 밉살스럽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손전등을 켜더니 벽장 천장을 비추셨다.
"마사, 저거 보렴"
할아버지는 내 멱살을 잡더니 억지로 들여다보게 했다.
그 안에도 이상하리만치 까맣게 칠해진 정사각형 문이 또 있었다.
할아버지와 나는 그 문을 통해 천장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할아버지를 내가 밀어올리고, 이어서 내가 들어간 순간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토기가 올라오고 오한이 서렸다.
공기가 무거운 정도가 아니었다. 생명의 위기가 느껴졌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입 안이 빠짝 말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이런 곳에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할아버지가 대단하게 보였다.
"하, 할아버지.. 나 못 견디겠어.. 좀 봐줘.."
적잖은 나이에 할아버지에게 매달리며 울먹였다.
"안 돼. 두 눈 똑똑이 뜨고 봐"
할아버지는 낮에 본 것보다 더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가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곳에 왜 데려온 거야! 죽일 생각이냐고 바락바락 대들었다.
일단 진정하려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다가 사레 들렸다.
먼지 투성이였으니 여기서 심호흡하면 사레 걸리는 건 당연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지은 지 90년 된 우리 집 들보 구조가 훤히 보였다.
대충 손전등을 비춰보니, 손전등이 비치는 둥근 불빛 안에 반짝 빛나는 게 보였다.
뭔가 싶어 다시 그쪽을 비춰보니,
신을 모시는 선반처럼은 생겼지만 어딘가 이상한 게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사당 같기도 한 것이 수상쩍은 느낌을 폴폴 풍기고 있었다.
"할아버지, 저거 뭐야?"
입이 떨려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걸 겨우 겨우 누르고 있었다.
"소리가 나는 원인은 바로 저것 때문이야"
할아버지가 사당에 빛을 비췄다.
그런데 갑자기 할아버지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내 손전등까지 뺏아서 불을 꺼버렸다.
순간 어둠에 휩싸였다.
저 표정을 보아하니, 할아버지가 꽤나 당황한 것 같았다.
"할아버지?"
나는 나대로 내가 본 할아버지 표정과, 지금 당면한 어둠 때문에 정신이 혼미했다.
"쉿, 조용히 하고 있어"
할아버지가 소근거리며 날 책했다.
"마사, 이제 출구로 갈 테니 숨 참고 있어"
"뭐? 숨을 참으라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출구에 갈 때까지 저걸 똑바로 봐!"
'저거'란 아마 사당을 말하는 거겠지. 그런데 대체 왜?
왜 숨을 참고 사당을 보면서 출구까지 가야 해?
그래도 시키는 대로 했다.
나가면서 어둠에 눈이 익어서 윤곽 정도는 보였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물론 사레도 걸렸다)나니 바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사당 문에서 이상한 그림자 같은 게 쑤욱 나왔다.
"그것"을 본 순간 난 돌처럼 굳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사람인 것 같았다. 어둠보다 더 짙은 색이었고, 둔하게 움직였다.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갑자기 넘어진 줄 알았더니 거미처럼 기어다니고
도무지 내 어휘력으로는 표현도 못 할 기괴한 모습으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처음 본 '그것'은 공포도 공포지만, 흥미가 일었다.
하지만 분명 위험한 존재임엔 틀림 없었다.
'그것'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더니,
할아버지가 내 옷자락을 당기셔서 뒷걸음질치며 출구까지 갔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다행히 그것은 우리 존재를 눈치채지 못 했다.
아마 숨을 참으라고 했던 게, 이것 때문인 것 같았다.
우리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출구까지 갔다.
출구에서 내려갈 때까지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천장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방바닥에 내려가, 발이 닿는 순간.
할아버지를 버려둔 채 거실로 후다닥 뛰어갔다.
불을 켜고 tv를 켜고, 억지로 조금 전까지 있던 곳을 잊으려 했다.
할아버지가 거실에 오셨다.
"봤냐? 엄청나지?"
내가 무서워하는 걸 보며 할아버지는 만족하는 것 같은 눈치였다.
손주한테 저런 걸 보여주다니..
그것에게 들켰더라면 분명 살아있지 못 했을 것이다.
틀림 없다. 분명해.
"뭐야 그거! 대체 뭘 하고 싶어서 그런 걸 보여준 거야?!"
나는 화를 삭히지 못 하고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왓하하하 그거 말이야, 우리 조상에게 원한을 가진 귀신인데
나도 잘은 모르지만, 우리 조상이 위험하다며 사당에 모시고 천장에 가뒀대.
검은 문이 결계인 셈이지.
혹시 모르니까 옆에 있는 절에 부탁해서 만든 거야, 그거.
저것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저것에게 씌이니까 말하면 안 돼"
씌인다고..? 죽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런데 또 다른 의문점이 생겼다.
"그런데 할배는 이름을 어떻게 알아? 할아버진 멀쩡하잖아"
"비밀이야"
그 후 몇 번이나 이유를 알려달라고 해봤지만 가르쳐주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또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어제 일이 꿈은 아니었을까? 아마 맞을 거야. 우리 집에 그런 게 있을 턱이 있나.
그렇게 계속 생각하던 그때 할아버지가 내 맞은 편에 앉으셨다.
지금 집 안에서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인데.
"잘 잤어, 할아버지?"
일단 아침 인사는 했다. 꼬장꼬장한 옛날 사람이라 안 하면 잔소리가 끝도 없다.
아무리 내 기분이 안 좋아도 인사는 해야 한다.
"오냐 오냐"
할아버지는 미소지었지만, 날 보자 마자 팔짱을 꼈다.
그리고
"○○○○○"
"뭐?"
"○○○○○"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갔다.
틀림 없이 저건 '그것'의 이름이었다!
내가 기억 속 저 멀리 잊어버리려 노력한 어제 일이 단번에 되살아났다.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이 미친 영감탱이가 손주한테 '그것'의 이름을 알려줬다.
"오, 눈치 챘냐? 걱정할 것 없다. 이 집에 안 살면 되니까.
저건 우리 집에서만 살 거든"
라며 천하에 태평한 소릴하도 웃어댔다.
그 후 바로 도쿄에 취직해서 그 집을 빠져나왔다.
참고로 할아버지는 2년 후에 돌아가셨다.
참 밉살스럽다 생각했지만, 장례식 참석해야 해서 집에 갔다.
그런데 별다른 일은 없었다.
아마 할아버지가 집에서 쫓아내려고 거짓말하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