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b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우유 마시는 인형</b></div> <div><br></div> <div>이건 내가 어릴 때 겪은 기묘한 체험이다.</div> <div><br></div> <div>우리 아빠는 째째한 사람이라, 우리 집 근처의 쓰레기 두는 곳에서</div> <div>망가진 가정 용품이나 잡동사니 같은 게 보이면</div> <div>"아깝게시리"라며 가지고 오셨다.</div> <div>처음에는 "창피하니까 좀 그러지 마요"라고 말했지만</div> <div>중간에 관두실 성미가 아니란 걸 다들 알고 있었기에 점차 포기하게 되었다.</div> <div><br></div> <div>아빠가 주워오시는 건 한 두가지가 아니었지만</div> <div>그 중에 "이건 대체 왜 주워온 거야?"라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이상한 것도 꽤나 있었다.</div> <div>그중 하나가 제목의 저 인형이다.</div> <div><br></div> <div>어느 날 집에 가보니 나와 동생이 같이 쓰는 방에 처음보는 인형이 있었다.</div> <div>보나마나 아빠가 주워온 거겠지.</div> <div>"지저분한 인형은 왜 주워온 거야.."하고 진절머리내며 인형을 바라봤다.</div> <div>어린 애들 팔에 딱 들어갈 정도되는 우유 마시는 인형이었다.</div> <div>긴 속눈썹에 땡그란 갈색 눈동자.</div> <div>우유를 마시기 위해 약간 벌어진 입술은 당장이라도 말할 것만 같았다.</div> <div>새 것이었으면 아마 귀여운 인형으로 생각했을 것이다.</div> <div>하지만 원래 주인이 험하게 다뤘는지 매끈한 흰 뺨에 매직으로 낙서가 된 데다</div> <div>눕히면 눈을 감아야 하는데, 한쪽만 감기는데다 그마저도 반 밖에 감기지 않았다.</div> <div>그래서 한쪽 눈이 뭉개진 것 같은 처참한 몰골이었다.</div> <div>아무리봐도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그런 걸 아빠는 왜 가지고 온 걸까.</div> <div>아니, 나나 내 동생이나 인형 놀이하는 건 좋아했으니</div> <div>방에는 여러 마론 인형부터 봉제 인형까지 인형이 한 가득 있었다.</div> <div>그 안에 누가봐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인형이 놓여 있었다.</div> <div>다른 인형은 어릴 때부터 가지고 놀던 것들이라 애착도 있었고</div> <div>다들 있을 자리에 놓였달까, 이상하단 느낌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div> <div>그런데 그 우유 마시는 인형만큼은 아니었다.</div> <div>그 인형은 침대에서 자는 날 아무 말 없이 눈동자로 매일밤 지켜보는 것만 같아서</div> <div>좋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div> <div>그렇다고 아빠가 주워온 걸 또 버리기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방에 두었다.</div> <div><br></div> <div>그리고 며칠 정도 지났을 때 기묘한 체험을 했다.</div> <div>침대 위에서 잠이 들려던 그때, 귓가에서 누군가 말하는 게 들렸다.</div> <div>어린아이? 내 귓가, 그것도 매우 가까운 곳에서 갑자기 아이가 웃었다.</div> <div>키득키득 장난기를 가득 품은 즐거운 듯한 웃음 소리였다.</div> <div>처음엔 한 명.</div> <div>그리고 점점 잔파도가 일듯이 웅성웅성하고 다른 웃음 소리도 들렸다.</div> <div>둘? 셋? 정도 되지 않을까.</div> <div>모두 다 앳된 순수한 웃음 소리였다.</div> <div>그러더니 소근소근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div> <div>처음엔 이웃집 애가 놀고 있나 생각했는데</div> <div>이런 한밤중에 아이가 밖에서 놀리가 없지.</div> <div>게다가 소리는 내 귓가에서 들리니까...</div> <div><br></div> <div>처음엔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건지 몰랐는데, 점점 또렷하게 들려왔다.</div> <div>"자나? 자?"</div> <div>눈을 감고 있었지만, 위에서 누군가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기척이 느껴졌다.</div> <div>한 사람이 아니었다. 여럿의 시선이 느껴졌다.</div> <div>갑자기 나타난 그들이 내가 잠들었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div> <div>그러자 그 중 하나가</div> <div>"자는지 어떤지 확인해 보자"라고 했다.</div> <div>그 순간 내 몸이 생선처럼 움찔거리며 떨리더니 온 몸에 털이 쭈뼛섰다.</div> <div>아마 소름이 돋았던 것 같다.</div> <div>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포에 온 몸이 뻣뻣해졌다.</div> <div>눈 뜨면 안 돼. 눈 뜨고 보면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거야. 절대로 봐선 안 돼.</div> <div>그런 느낌이 들었고, 나는 마음 속에서 "사라져 사라져 사라져"하고 기도했다.</div> <div>여전히 베갯머리에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아이들이 소근거렸다.</div> <div><br></div> <div>그후 의식을 잃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아침이었다.</div> <div>찝찝한 꿈을 다 꿨네.. 라고 생각하며 날이 밝은 것에 안도했다.</div> <div><br></div> <div>그런데 꿈은 그 날만 꾼 게 아니었다.</div> <div>그날부터 나는 똑같은 꿈을 계속 꾸게 된 것이다.</div> <div>침대에서 잘라치면 어디선가 아이들 웃음 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div> <div>처음엔 이야기 소리였는데, 점차 베갯맡에서 시끄럽게 뛰어다녔다.</div> <div>둘 셋 밖에 없었는데, 점점 수가 늘더니</div> <div>많은 사람들이 내 주변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시끌벅적 뛰어다니고 있었다.</div> <div><br></div> <div>스피커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고,</div> <div>그 소리는 모두 아이들 목소리였다.</div> <div>순진무구한 듯 웃는 소리, 뛰어다니는 소리.</div> <div>그 중에서도 나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div> <div>그들은 내 귓가에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즐겁게 "자? 자?"하고 말을 건다.</div> <div>답을 해선 안 돼. 눈을 떠선 안 돼.</div> <div>나는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이 굳었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div> <div>"사라져 사라져 사라져 사라져"</div> <div>나는 부들 부들 떨며 공포에 맞서싸우며 꿈이 깨기만을 바랄 뿐이었다.</div> <div><br></div> <div>또 누군가가 내 바로 옆을 달려갔다.</div> <div>많은 사람이 팔짝팔짝 뛰는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div> <div>그런데 나는 이층 침대의 윗칸에서 자는데...</div> <div>그들은 발소리를 내며 허공 위를 뛰어다니는 셈이다.</div> <div><br></div> <div>그런 무서운 꿈을 연달아 꾸다보니 나는 우울증이 생겼다.</div> <div>그게 누구 짓인지를 깨달은 건</div> <div>낮에 꾸벅꾸벅 낮잠을 잘 때였다.</div> <div>반은 자고, 반은 깬 그런 몽롱한 상태에서 또 그 꿈을 꿨다.</div> <div>"자? 자? 슬슬 자나?"하고 말하는 아이들 기척을 느꼈고</div> <div>나는 왠지 이건 그 인형이구나하고 눈을 감은 채 느꼈다.</div> <div>왜 그렇게 생각했냐면 근거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div> <div>그냥 틀림없이 그 인형이라 생각했다.</div> <div>..분명 아닐 수도 있지만,</div> <div>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집요하게 내가 잠들었는지를 확인하는 "그 놈"은</div> <div>"우유 먹는 인형"이 아니라, "우유 먹는 인형 안에 숨어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했다.</div> <div><br></div> <div>이런 소릴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div> <div>미친 거 아니냐고 할 게 뻔해서 잠자코 있었지만</div> <div>이층 침대 아랫칸에서 자는 동생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을 지도 모른다.</div> <div>그런 생각이 들어서 물어봤지만 동생은 이상하단 표정으로 "그런 거 없었어"라고 했다.</div> <div><br></div> <div>우유 마시는 인형이 너무 무서워서,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div> <div>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할지는 어린 나로서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div> <div>내가 이러다 미치는 건 아닐까란 생각에 겁도 나고, 진짜 미칠 것 같았다.</div> <div><br></div> <div>왜 나에게만 그 소리가 들리는 걸까, 왜 내 귓가에 찾아오는 걸까.</div> <div>예전에 나는 희미한 여자 유령을 본 적이 있다.</div> <div>어쩌면 나에게 약간이지만 귀신을 보는 힘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div> <div>그래서 어둠 속에 숨은 무언가의 기척이 느껴지는 건 아닐까.</div> <div><br></div> <div>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또 그들이 찾아와서 귓가에서 떠들었다.</div> <div>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본 건 아니지만</div> <div>기척 상으로는 20명 정도 있었던 것 같다.</div> <div>온 방 안에 이야기 소리가 울려퍼졌고, 귀를 틀어막고 싶을 만큼 시끄러웠다.</div> <div>그 중 다섯 정도는 꼭 내 베개맡에 와서 "자? 자?"하고 말을 걸었다.</div> <div>내 얼굴을 바라보는 건 아무래도 그 인형인 것만 같았다.</div> <div>아이 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div> <div>"깨어 있어, 분명 깨어 있을 걸"</div> <div>그러자 주변의 아이들도</div> <div>"깨 있겠지, 맞아 맞아"하고 일제히 말했다.</div> <div>순진무구한 목소리 사이에서 분명한 악의가 느껴졌다.</div> <div>"이제 슬슬 괜찮겠지? 이제 들어가도 되겠지?"</div> <div>"들어가도 괜찮을 걸. 들어가볼래? 들어가볼까?"</div> <div>"들어가자 들어가자"</div> <div>그때 나는 '얘들이 내 몸을 빼앗으려고 해!'라는 공포에 질려서 비명을 지를 뻔 했다.</div> <div>그런데 여전히 내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부들부들 떨릴 뿐이었다.</div> <div>이대로 가다간 큰일나겠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내가 아는 불경 부분을 머릿 속에서 외웠다.</div> <div>어린 애라서 제대로 아는 건 아니었지만,</div> <div>그냥 일단 아는 부분만 계속 미친 듯이 외어보았다.</div> <div><br></div> <div>정신을 차려보니 아침이었다.</div> <div>지금도 가끔 그건 꿈 꾼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div> <div>어쩌면 꿈이라고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div> <div><br></div> <div>그 일 후 얼마 안 되어 우리가 살던 셋방을 철거한다고 해서</div> <div>우리 가족은 새 집으로 이사갔다.</div> <div>그 인형은 이사하던 중에 사라졌다.</div> <div>이삿짐을 싸면서 엄마가 버린 걸 지도 모르겠다.</div> <div>어쩌면 지금도 서랍 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 수도 있겠다.</div> <div>신기하게도 새 집으로 이사간 후 그런 이상한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div> <div><br></div> <div>지금 생각해봐도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체험이었다.</div> <div>오랫동안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 하고 가슴 속에 품어둔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마음이 개운하다.</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