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b>손목</b></span></div> <div><br></div> <div>대학 동기가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을래?"하고 전화를 했다.</div> <div>반 년만에 목소리를 들었고, 만나게 되면 1년 만에 보겠네 하고</div> <div>퇴근하던 길에 멍 때리며 대충 듣고 대충 답하다 보니</div> <div>나도 모르게 2주 후 주말은 그녀 집에서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div> <div>그런데 당일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div> <div>일을 끝나고 저녁에 그대로 그녀 집으로 갔다.</div> <div>도착하니 손수 만든 요리를 대접 받고, 업무상 불만을 들어주고</div> <div>방문 선물차 가지고 간 술과 안주를 비울 즈음에는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div> <div>그럼 이만 자자며 상쾌하게 옆으로 누워 눈을 감았지만</div> <div>안절부절하며 계속 뒤척이는 그녀 때문에 좀처럼 자질 못 했다.</div> <div>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사실 말 안 한 게 있어"라며 내키지 않는 투로 말했다.</div> <div>"2주 전부터 그랬는데... 손목이 나와"</div> <div>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침대 정면의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옷장을 가리켰다.</div> <div>"처음에는 저 옷장 사이에서 손가락이 나와 있었어</div> <div> 그때는 내가 잘못 본 거겠지 하고 신경쓰지 않았거든</div> <div> 그런데 다음 날 책장 너머로 손가락이 보인데다</div> <div> 그 다음 날은 탁자 옆에 손이 보였어"</div> <div>라고 그녀가 말했다.</div> <div>말한 순서대로 시선을 옮겨보니 그 "손"은 분명 침대를 향해 이동하는 것 같았다.</div> <div>실제로 내가 본 것도 아닌데 괜히 오싹했다.</div> <div>"그래서 있잖아"하고 긴장한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div> <div>"어제 침대 끝자락에 손목이 보이는 거야"</div> <div>그러니 어쩌면 오늘은 무슨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고 힘 없이 이어진 말에</div> <div>여러 생각이 안 든 건 아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div> <div><br></div> <div>그대로 내가 한참 아무 말도 안 했더니 갑자기 웃으며 "거짓말이야"라고 했다.</div> <div>"누가 자러 오면 괜히 겁주려고 지어낸 이야기야. 무서웠어?"</div> <div>하고 웃는 그녀가 너무 즐거워보여서 조금 기분이 좋지 않았다.</div> <div><br></div> <div>사실 나도 아까전부터 그녀에게 말 못 한 게 있었다.</div> <div>손 이야기를 시작할 때, 그녀를 잡으려고 쭈그린 남자가 점점 앞으로 기울기 시작해서</div> <div>이야기가 끝날 때는 그녀를 덮쳤고,</div> <div>그 후 웃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지만</div> <div><br></div> <div>나는 천천히 이불 속으로 들어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듯 눈을 감았다.</div> <div>어느 틈엔가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