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입니다. 그래도 눈은 항상 뜨던 시간에 번쩍 떠집니다. 시계를 봅니다. 네 시 반. 커피를 만들기 위해 물을 주전자에 받아 올리고, 물이 끓고 나면 커피를 갈아 프레서에 넣고, 물을 따르고, 시간이 3분 조금 넘게 지나면 프레서를 지긋이 누르고 하는 이 모든 것이 관성처럼 이뤄집니다. 흔히 항상성이라고들 하지요. 늘 하던 것들을 이렇게 지켜 내는 것. 그리고 지금 이 시간 뿐 아니라, 내게 너무나 흔한 일상을 지켜 내는 것.
이렇게 아침 커피를 만들어 바나나와 쿠키 한 조각을 하면서 먹습니다. 고지서들 쌓인 것들을 정리합니다. 왜 이런 것들은 꼭 이렇게 마음이 여유로운 날 아침에만 보이는지 몰라, 하면서 이걸 정리하고 나니 순식간에 몇천 달러를 써 버렸습니다. 아, 물론 그동안 썼던 것들을 한꺼번에 정리하는 것이긴 하지만.
내 삶의 항상성, 일상을 지켜내는 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 삶 속의 일상이란 것이 지켜내야 할만한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내가 사는 일상에 참다운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이 어려운 이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 잘못이라기보다는 사회 구조의 모순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 개인은 소중합니다. 내가 없으면 세상도 우주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우주를 존중해 줘야 합니다. 그 존중이라는 것은 전제하고 우리는 마음껏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치 충돌하는 가치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보다는 아마 유럽 쪽에서 더 이런 생각이 더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우리의 생각을 받쳐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권력을 가진 자, 권력을 가진 자에게 총애를 받는 자가 사회적 권력을 갖지 못한 이들의 것을 빼앗고, 그들의 기회를 박탈하고, 다른 출발선을 갖는 사회에선 개인이 서로를 존중하며 자기들의 가치를 마음껏 향유하는 사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
'청와대 권력 제 1위' 최순실씨가 유럽 순방(?)을 마치고 '런던발' 브리티시 에어를 타고 자기 혼자 입국했습니다. 벌써 많은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긴급체포를 하지 않고 '쉴 시간'을 주신 검찰. 권력의 개가 맞긴 맞는 듯 합니다. 죄질로 볼 때 당연히 긴급체포를 했어야 합니다. 한국 사회의 권력관계, 그리고 그 권력을 보장하는 것은 바로 불평등하고 타락해 버린, 오남용되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한 팟의 커피를 다 마셨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오전 여섯 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이 커피 비우고, 바나나 두 개, 쿠키 두 개를 먹었습니다. 운동 가야지. 생각이 많았던 일요일 새벽, 땀도 좀 흘리면 더 좋겠지요.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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