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 <p> 그대에게 드리는 꿈 </p> <p> </p> <p> 5. 처녀유격대(2)</p> <p> <br></p> <p> <br></p> <p> “자, 이거 받어. 글피 아츰에 면소로 집합이여.”</p> <p> 정순은 신가가 건네주는 영장을 박박 찢어버렸다.</p> <p> “나넌 분명히 갖다줬은게 딴소리허덜 말어라이.”</p> <p> 잘 째부렀어야. 까막눈이 읽을 수나 있겄다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면서 신가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정순도 학교를 다니지 못해 문맹이었다. 열한 살에 김진사네에서 꼴머슴을 시작한 신가는 여섯 살 난 그 집 손자를 업고 서당에 다녔다. 김진사 손자는 삼 년 만에 천자문을 겨우 뗐던 것이고, 반면 소싯적부터 영악하고 눈치가 빨랐던 신가는 어깨너머로 천자문을 뗐던 것이다. 아니었다면 구장 자리까지는 언감생심이었다. 이 모두가 자신이 잘났기 때문이라 믿었다. 자신이 새삼스레 기특한 신가였다.</p> <p> 신가는 내일 다시 면소로 나가서 정순이 영장을 찢어버린 사실을 보고할 생각이었다. 정순이 정말 도망이라도 친다고 날뛸지 몰랐다. 그래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겠지만. 그래도 책임은 면해야 했다. </p> <p> 고샅을 돌아나가는 신가의 뒤를 향해 주먹을 지르며 외포댁이 한숨을 쉬었다.</p> <p> “그나저나 종우쪼가리까정 주는 거 봉게 부역도 아닌 거 겉은디 왜눔덜이 허는 일얼 우덜이 어치케 막는다냐?”</p> <p> “엄니, 걱정허덜 마시오. 나가 다 수가 있은게!”</p> <p> 정순이 결연히 말했다. 말은 그리 했지만 당장 무슨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수가 있어도 정신대로 끌려갈 수는 없다는 게 수라면 수였다. 종군성노예에 대한 소문은 정말 끔찍스러웠다. 처녀인 분님이나 자신이 성노예로 끌려가지 않는다는 어떤 보장도 없는 지금이었다. 혹시, 거기로 가면 안될까? 그 순간, 그녀의 뇌리에는 지리산이 떠오르고 있었다.</p> <p> 외포댁이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낮췄다.</p> <p> “수넌, 니가 무신 수가 있어야?”</p> <p> “냉중에 말씸 디리겄소.”</p> <p> 한마디 내뱉고는 정순은 입을 닫아버렸다. 외포댁은 정순의 성미를 아는지라 더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은 시름으로 갈가리 찢어지고 있었다.</p> <p>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정순은 분님의 집으로 갔다. 정순은 지리산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힌 참이었다. 분님의 집은 초상집이나 다름 없었다. 아직도 눈물을 찍어내는 분님이었다.</p> <p> “가시내, 누가 죽었간디? 울기넌......”</p> <p> 정순은 분님을 데리고 물레방앗간으로 갔다.</p> <p> “니 정신대 갈 거시냐?”</p> <p> 목소리를 한껏 낮춘 정순이 다그치듯 물었다.</p> <p> “그럼 벨수 있간디?”</p> <p> “야, 거그 가먼 우째 되는지 알기나 혀?”</p> <p> 정순은 답답했다.</p> <p> “왜눔덜 노리개 된단 말여! 성노예 된단 말여! 니, 소문도 못 들었냐?”</p> <p> “구장이 공장 간다든디......”</p> <p> 분님이 자신 없어 하며 하는 말이었다.</p> <p> “임빙! 그거넌 신가눔 말이고!”</p> <p> 답답함을 참지 못한 정순이 제 앙가슴을 소리가 나게 퍽, 퍽, 쳤다.</p> <p> “우덜언 무조건 거그로 끌려가게 되야 있어야. 나이도 글고, 둘 다 예쁘장헝게로. 요 맹추야! 니, 사내허고 거시기 헌다는 거시 월매나 심들고 지긋지긋헌지 아냐?”</p> <p> “...... 글먼 니넌 혀봤냐?”</p> <p> 그 경황 중에도 분님은 킥, 웃고 말았다. 굴러가는 쇠똥만 봐도 웃음이 나온다는 꽃다운 처녀들이었다. 정순이 분님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 그녀도 킥, 웃었다.</p> <p> “요 맹추, 꼭 혀봐야 아냐? 니도 생각혀 봐라. 니 배 우에 무건 거 얹어 놓면 심들겄냐, 안 들겄냐? 글고 신랑도 아니고 낯짝도 모르는 왜놈들인디......”</p> <p> 마치 지금 일을 당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정순이 진저리를 쳤다. 분님의 몸에도 소름이 돋아났다.</p> <p> “니, 쩌어쪽 산에 사람덜 있단 소문 들었지야?”</p> <p> 손으로 남쪽을 가리키는 정순의 음성이 갑자기 은근해지고 있었다.</p> <p> “...... 응.”</p> <p> “우리 거그로 가자!”</p> <p> 분님이 화들짝 놀랐다.</p> <p> “잽히먼 큰일 당헐 거인디......”</p> <p> “임빙, 겁만 많여 갖고! 잽히기넌 와 잽혀. 나 말 믿어, 죽어도 안 잽힌게. 글고 차라리 잽혀 죽넌 게 나서. 왜놈덜헌티 시달리는 것보돔.”</p> <p> “거그도 다 남정네덜만 있을 거인디......”</p> <p> 한 가지 걱정이 또 생긴 분님이었다.</p> <p> “임빙, 남정네라고 다 같가니? 한짝은 짐성겉은 왜눔덜이고, 한짝은 독립운동허는 사람덜이여.”</p> <p> “그려도......”</p> <p> “글고 니도 들었지야, 곧 해방된다는 소문? 눈꼽만치 고상허먼 해방돼 불 거시여. 근디 머던다고 끌레가서 그 고상헐 거시냐, 거그서 개죽음 당헐지도 모르는디 말이여, 안 그냐?”</p> <p> “그러까이......”</p> <p> “가시내, 알았어야. 니넌 왜눔들헌티 징허게 시달리다 죽어라이! 나넌 산으로 갈텐게!”</p> <p>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분님을 향해 정순이 매몰차게 내뱉았다. 분님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서는 정순의 팔을 부리나케 잡았다.</p> <p> “그려, 알었어. 나도 갈텡게.”</p> <p> “그려, 잘 생각혔어.”</p> <p> 분님의 손을 잡는 정순은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p> <p> “시간이 없은게 내일 밤에 뜨더라고.”</p> <p> “우리가 떠불먼 울엄니 울아부니 겁나게 당헐 거인디......”</p> <p> 분님이 말끝을 흐렸다.</p> <p> “걱정허덜 말어. 도망가 부렀다는디 죽이기야 허겄어. 우덜이 전장에 끌레가 왜눔덜헌티 당허는 것보돔 훨썩 나슬 것인게.”</p> <p> “그야......”</p> <p> 분님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p> <p> “내일 밤에 나가 느집에 갈 거니께 딱 준비해갖고 있어야?”</p> <p> “알았어. 근디 울집에 말허먼 안되까이?”</p> <p> “니가 알아서 혀라. 좌우당간 내일 밤에 못 뜨먼 끝장인 중 알어!”</p> <p> 집으로 돌아온 정순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이 산으로 들어가고 나면 어머니가 말 못할 고초를 당할 것은 뻔했다. 어떡하든 조금이라도 어머니가 고초를 덜 당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잠을 못 이루는 것은 외포댁도 마찬가지였다.</p> <p> “엄니!”</p> <p> 정순이 나직하게 외포댁을 부르며 손을 잡았다.</p> <p> “왜 그려?”</p> <p> 그러지 않아도 뭔가 물어보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던 외포댁이었다. 응어리진 걱정이 가슴을 금방이라도 터트릴 것만 같이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p> <p> “엄니, 나가 수가 있다고 그렸지?”</p> <p> “수넌 먼 똑별난 수겄냐?”</p> <p> 외포댁은 일부러 심드렁하게 물었다. 도무지 무슨 수가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정순이 오기로 한 번 해보는 소리거니 치부하면서도 가슴 한켠으로는 무슨 좋은 수가 생기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는 외포댁이었다.</p> <p> “엄니, 나, 산으로 갈라네.”</p> <p> “산으로? 먼 말이여?”</p> <p>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순이 외포댁의 손을 어루만졌다.</p> <p> “엄니도 지리산에 독립운동허넌 사람덜 있넌 거 알지야?”</p> <p> “글먼 거그로 간다 말이여?”</p> <p> 지리산에 있는 사람들의 소문은 급격하게 퍼지고 있어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도 남자들만 있는 곳이 아닌가.</p> <p> “거그도 남자덜만 있을 터인디 니가 갈 데가 워딨냐?”</p> <p> “그 사람덜언 남자가 아니고 독립운동허는 사람들이여.”</p> <p> “그 말이 그 말 아니여?”</p> <p> “그 사람덜언 남자로 볼 수 없단게로!”</p> <p> 정순의 음성에 짜증이 조금 묻어났다. 외포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p> <p> “차라리 정신댄가 머신가 가는 게 낫덜 안혀? 어채피 끌려가는 신센게 까깝허겄지만 공장서 일허고 밥은 겁나 준단게로.”</p> <p> “엄니넌 시방 무신 소리 한디야? 고거는 다 허넌 소리고, 성노예 얘기도 못 들어 봤소, 엄니넌? 아짐씨덜이야 공장으루 가겄지만 우덜 겉은 처녀덜언 몽창 군대로 끌레간단게로! 시집도 못 가고 전정 망친단게로!”</p> <p> “그거이 그리 되냐? 그라먼 안 되제! 암, 안 되고 말고!”</p> <p> 깜짝 놀란 외포댁의 어조가 정순 보다 더 단호했다. 왜놈이라면 안 그래도 치가 떨리는데 목숨 보다 중한 딸을 절대로 왜놈들의 노리개로 내줄 수는 없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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