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MBED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src=http://bgm.pilsu.net/70b9a537.swf wmode="transparent"><BR><BR><BR><BR>그가 아내의 모습을 본 것은 K가 두 번째 샤워를 마치고 나와 서였다.<BR>그가 누워 있는 호텔 침대에 K가 올라, 이불 속을 헤엄쳤다.<BR><BR>그의 배꼽 즘까지 자유형을 한 K는 머리를 이불 밖으로<BR>빼꼼히 내어 그의 가슴에 안겨와 물었다.<BR><BR>“오늘은 자고가요. 어차피….”<BR><BR>그는 K의 목소리가 볼륨이 꺼진 스피커처럼 멀리 날아가는 것이 느껴졌다.<BR><BR>그의 아내는 K가 앙탈을 부리는 모습을 태연히 지켜보며 꿈뻑꿈뻑 눈을 깜빡였다.<BR>아내가 그와 K를 따라 침대에 드러눕자, 그는 K를 밀치며 일어났다.<BR><BR>“그럴 수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BR>“아직 여덟시인데 떠날 거 에요?”<BR>“이미 30분 늦었어.”<BR><BR>그는 나이트 테이블 옆의 손목시계를 주워 손목에 걸었다.<BR>그리고 K가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BR><BR>시계의 초침은 이미 여덟시 십칠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BR>시계를 본 그가 K를 쏘아보자, K는 서둘러 그의 시선에서 도망쳤다.<BR><BR>그는 빠르게 옷을 챙겨 입곤 넥타이를 뒷주머니에 욱여넣으며 객실을 나갔다.<BR>그가 떠나자 K는 핸드벡을 뒤적여 담배 한 갑을 꺼내 들었다.<BR><BR>“내일 같이 출근하면 좋잖아….”<BR><BR>그는 잰걸음으로 엘리베이터까지 갔다가, 이내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BR><BR>한 번에 두 단에서 세 단씩 껑충 뛰어내리는 그의 발소리에 계단실이 철렁거리는 굉음으로 가득했다.<BR>지하 주차장 까지 도착한 그는 다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BR><BR>8시 24분. 그가 ‘쯧’하고 혀를 차자, 뒤이어 아내가 주차장에 도착했다.<BR>아내의 무덤덤한 표정이 그의 조급증에 똑똑똑 하고 노크를 하고 있었다.<BR><BR>서둘러 차에 오르자, 전화벨이 울렸다. 장인이었다.<BR><BR>“자네, 지금 어디 왔나?”<BR>“예, 아버님. 금방 도착할 것 같습니다.”<BR>“올 때, 오렌지 좀 사오게나. 병원 앞에 마트 있으니.”<BR><BR>그는 혼잣말로 “그 놈의 오렌지타령.” 하며 수북한 오렌지 산을 바라보았다.<BR>선선한 냉장고 바람이 허연 연기 자락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사방에 비비꼬이고 있었다.<BR><BR>“오렌지가 다 똑같지.”<BR><BR>종종걸음으로 마트까지 따라선 아내를 보며 그가 되뇌었다.<BR>대충 큼지막해 보이는 놈으로 다섯 개를 봉지 담았다.<BR><BR>마트를 나선 그는 가만 선 채 잠시 병원을 올려다보았다.<BR><BR>듬성듬성 불 켜진, 병원의 창문. 12층 왼 쪽에서 다섯 번째.<BR>커튼이 쳐진 창 안으로 작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BR><BR>예상보다 하나가 더 많게 보이기에 그는 “장몬가….” 혼잣말을 했다.<BR><BR>“장인어른, 지금 병원 앞입니다.”<BR>“응? 올라오지 않고, 전화는 뭐하러 했나?”<BR>“슬쩍 창문을 보니까, 장인어른 말고 또 한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요.”<BR>“그게 왜? 잠시 간호사가 좀 다녀갔다 만은.”<BR>“아니요, 과일 좀 더 사갈까 했죠.”<BR>“그런 건 대충 사고 어서 올라오게.”<BR><BR>통화중 아내가 손에 담긴 봉투로 손을 집어넣었다.<BR>그는 주먹을 꼭 쥐어 봉지 주둥이를 틀어막아, 아내가 오렌지를 꺼내지 못하도록 했다.<BR><BR>아내는 무던히 애를 쓰며 기어코 비닐 속 오렌지에게서 손을 놓지 않았다.<BR><BR>병실 앞에 도착할 때까지 아내가 봉투를 못살게 굴자,<BR>그는 오렌지를 하나 냅다 집어 복도 저 멀리로 던져버렸다.<BR><BR>아내는 고개를 획 돌려 복도로 데굴데굴 구르는 오렌지를 쫓아봤다.<BR>그 틈에 그는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BR><BR>“왔나? 바빴나 보구만.”<BR><BR>장인이 그를 반겼다. 그는 정중히 고갤 숙여 인사했다.<BR>그러자 장인은 성큼 그에게 다가와 어깨를 토닥였다.<BR><BR>“아빠, 저 그이랑 둘이 있고 싶어요.”<BR><BR>침대에 누운 여인이 말했다. 장인은 “안 그래도, 담배가 다 떨어진 참이었어.” 하며 병실을 나섰다.<BR>여인은 길게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청했다. 하얗고 가는 손마디가 미미하게 떨려왔다.<BR><BR>여인의 손을 받아 든 그는 시선을 여인의 다리로 가져갔다.<BR><BR>여인의 다리에는 철심과 나사가 정신사납게 양 무릎을 칭칭감은 채 단단히 결박되어있다.<BR>무릎을 파고들어있는 나사 주변의 살점에 발린 뻘건 소독약에서 쓰디쓴 약냄새가 풍긴다.<BR><BR>“늦어서 미안해.”<BR>“아니에요. 일도 바쁜데.”<BR>“오늘은 안 아팠어?”<BR>“괜찮아요.”<BR><BR>여인의 말을 끝으로 병실에 심심한 공기가 떠다녔다.<BR><BR>어색한 공기를 감지한 그는 봉투에서 실한 오렌지를 하나 집어 올렸다.<BR>오렌지의 머리에 엄지를 힘껏 밀어 넣고 꼭지를 따내자, 여인이 말했다.<BR><BR>“여보…, 나…………, 입 맞춰주면 안돼요?”<BR><BR>푸른 불꽃. 그녀는 푸른 불꽃이라 불렸다.<BR><BR>그가 그녀를 모르던 시절부터. 그리고 그가 그녀와 결혼한 지금에 이르러서도,<BR>그녀가 양 다리 무릎이 산산 조각이 난 이 사고 이후에도, 사람들은 그녀를 푸른 불꽃으로 기억한다.<BR><BR>불꽃의 가장 밑에서 피어오르는 파란 기운. <BR><BR>사실을 천도시가 넘어 꼭대기의 진홍 불꽃보다 몇 곱절 뜨거운 불꽃이지만,<BR>사람들은 사실과는 무관계하게 그녀의 차가운 외견에 빗대어 칭한 것이다.<BR><BR>마치 얼음과도 같은 불꽃. “다가가면 데일라.” 그녀를 두고 선배들이 하던 소리다.<BR><BR>다른 여동기들은 “아니야, 얼마나 친절한데!” 반기를 들기도 했으나,<BR>대체로 남자들은 그녀의 높은 콧대를 조롱하고 비하하며 동시에 갈망했다.<BR><BR>아무도 만질 수 없는 불꽃이었다.<BR><BR>그녀는 캠퍼스 내에서 항상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존재였다.<BR>큰 눈망울에 옆으로 슬적 찢어진 눈매가 그녀의 새침할 것 같은 성격을 대변하고 있었다.<BR><BR>한 번도 치마 따위나 노출 있는 옷을 입고 나타나는 일이 없고,<BR>언제나 온 몸을 감추듯 한 여름에도 긴팔 면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곤 했다.<BR><BR>그녀는 스스로 자각 하고 있었을까? 오히려 그녀의 몸매를 명확히 드러내는 옷이<BR>그녀를 동경하는 남성들에겐 차라리 발가벗은 것만큼이나 자극적이었다는 것을. <BR><BR>대학 내에서 소문 자자한 바람둥이 P가 학생식당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일화는<BR>전설처럼 아직까지 입에서 입으로 돌고 있다.<BR><BR>그녀는 선 듯 “혹시 남자친구는 있어?” 하고 물어오는 P에게<BR>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식탁을 차며 일어났다.<BR><BR>그 순간의 정적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BR><BR>아직 그녀가 한 번도 손에 쥐지 않은 깨끗한 스테인레스 수저가<BR>쨍하고 반짝이며 P의 구겨진 얼굴을 거울처럼 담아냈다.<BR><BR>그녀는 오랜 시간이 지나 그 날의 일을 입에 담은 적이 있다.<BR>그녀가 그에게 말하길 “너무, 무서웠어요.” 했다.<BR><BR>그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식탁에 흘려두고 간 갈색 노트의 궁금증을 해소 할 수 있었다.<BR>그는 그 갈색 노트만 아니었다면, 이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BR><BR>그 갈색 노트는 그와 그녀를 이어준 인연의 메신저와도 같았다.<BR><BR>그는 입을 맞춰 달라 청하는 아내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BR>착잡해지는 심경이 그의 깊은 미간으로 여실이 배겨가고 있다.<BR><BR>다들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푸른 불꽃은 이미 꺼지고 없다는 것을.<BR>그녀는 그에게 입 맞춰 달라 칭얼대는 소녀 같은 여인이 아니었다.<BR><BR>그는 눈을 감아 그녀의 입에 길게 입을 맞췄다.<BR><BR>그리고 그 모습을 그의 뒤에 서있던 아내가 또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BR><BR>그에게 아내가 둘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BR>아내가 차도로 뛰어든 그 사고의 날, 그 밤, 그 전화로부터였다.<BR><BR><BR><BR><BR><BR>- 1부 끝 2부에서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