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MBED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height=300 width=400 src=http://bgm.heartbrea.kr/?3222205 wmode="transparent"><BR><BR><BR>봉팔이는 잠바의 가슴주머니에서 책을 한 권 빼들었다.<BR><BR>봉팔이 한 손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의 책은 어설프다 못해 유치해서<BR>실소가 터지는 풀잎과 뭉게구름으로 채워진 커버, 촌스런 명조체 폰트로<BR>박아 놓은 제목이 조화롭지 못하게 배치되어 있었다.<BR><BR>책에 사선으로 한 자씩 박혀있는 활자는 ‘사후세계’ 나는 그 제목을 잘 알고 있었다.<BR><BR>나보다 더 잘 아는 이가 있을까.<BR><BR>“녀석이 소은씨와 결혼하기 전까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아세요?”<BR>“아르바이트 일만 전전긍긍 했었죠. 술 집, 옷 집, 편의점.”<BR>“아니요. 아닙니다. 놈은 글을 쓰고 있었어요. 아르바이트는<BR>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BR><BR>소은이가 책에 손을 뻗어 책을 쥐었다. 봉팔이 품에서 여지껏 잠들어<BR>있었던 책은 소은이 손길에 낮잠에서 깨어났다.<BR><BR>소은이가 낱장씩 촤르르르 책을 넘기자, 봉팔이 녀석이 말했다.<BR><BR>“그 놈 책입니다."<BR>“그이가 책을 냈었어요?”<BR>“아니요. 그 놈이 쓴 책입니다. 사실은 친구들끼리 모여서, 2년 전 쯤에 만든 책이죠. 출판을 한 것은 아닙니다.</P> <P>이제 햇수로 7년 전인가요. 그 녀석이 마지막으로 제게 신춘문예 투고 작품을 들고 왔었던 일이, 예. 그 즈음일 겁니다.</P> <P>소은씨와 그 놈 사이가 사뭇 진지해졌을 때였으니까요.”<BR><BR>봉팔이가 솥뚜껑 같은 손을 내밀어, 책을 청했다. 별 이유도 없이 책을<BR>받아 든 봉팔이 놈은 어울리지도 않는 흐린 웃음으로 책 중간 페이지를 내려다보았다.<BR><BR>“그 놈이 매번 원고를 들고 제게 찾아 왔었죠.”<BR>“봉현씨가 제일 친한 친구이니까요.”<BR>“그러게요. 그게 꼬이고 꼬인 그 놈 팔자죠. 모르긴 몰라도, 그 놈 많이 답답했을 겁니다. 보여 줄만한 사람이라곤 저 정도고,</P> <P>하지만 그런다 한들 제가 뭘 알아야죠. 전 글씨만 보면 졸기 바쁜 놈이거든요. 녀석이 들고 온 종이 뭉텅이들, 번번이 지겹다, 읽다 지친다.<BR>하며 퇴짜를 놓은 게 몇 번이었는데요. 그랬는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얄궂죠. 녀석이 세상 등지고 나서부터 뒤늦게 녀석이</P> <P>써 놨던 글이 읽히기 시작 하더라 구요. 미리 읽어봤으면 좋았을 것을. 그 놈이 한 번만 읽어봐 달라고 했었는데.”<BR><BR>소은이가 창밖을 돌아보았다. 창문 유리에 붙어 송글송글<BR>맺혀가는 빗방울에게 정말이야? 당신 글도 썼었어? 묻기라도 하는 듯.<BR><BR>“놈의 원고들을 다 읽고서, 친구들을 소집했습니다. 어설프게나마 컴퓨터 좀 만진다는 놈이 커버 그림을 그렸죠.</P> <P>모두가 주머니 쌈지 돈을 털어 책을 만들었습니다. 출판사까지 찾아갈 필요도 없이, 사설로도 요즘엔 얼마든 책을</P> <P>만들 수 있는 세상이 더라구요.”<BR><BR>소은이는 손등에 턱을 괴고 봉팔이 놈의 말을 계속 들었다.<BR>봉팔이 놈은 누구하나 듣고 있는 사람조차 없다는 듯, 혼잣말처럼 계속해 입을 놀렸다.<BR><BR>“아! 좋더라! 이 새끼야. 재미있었다. 마지막에는 울었다. 니 새끼 글에 내가 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P> <P>니 새끼 글을 읽는데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르겠더라! 그 말을 제가, 못해줬어요. 그래서 책으로나마 놈에게 표시해 줄려구요.</P> <P>나, 니가 쓴 글들 전부 읽었다. 한 토시도 놓이지 않고, 다 읽었다. 하구요. 이게 갖고 싶었지? 네가 쓴 책이 갖구싶었지? 하구요.”<BR>“고마워요.”<BR>“아니요. 고마워하지 마세요. 전 소은씨에게 감사받을 이유 없습니다.”<BR>“그이 대신이라고 생각해 주세요.”<BR>“아니요. 그 놈은 소은씨 때문에 글을 그만 쓴 것이니까, 소은씨에게 감사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BR>“무슨 말씀하세요?”<BR>“그 녀석은 소은씨 때문에 불행했어요. 오랜 시간 불행해 했습니다. 저에게 이혼 상담까지 했었는걸요.”<BR><BR>소은이가 왼손의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깨알 같은 다이아 부분을 꾹꾹 눌러주는 건,<BR>소은이의 버릇이었다. 다이아 알이 한 번 빠트려 잃어버렸던 이후, 심심하면 소은이는<BR>반지 알을 매만졌다.<BR><BR>“녀석이 결혼 이후, 마지막으로 원고를 가져오면서 그랬습니다. 이 원고는 보내지 않을래. 이 번에도 떨어지면,</P> <P>나는 아쉬워서 정말 포기를 못할 거야. 죽어도 포기 못할 거야. 그러니까 이 원고는 보내지 않을래. 어차피 붙지도 못할 거야.</P> <P>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알 수 있었어요. 그 녀석은 결혼 한 것 자체를 후회하고 있다는 걸. 밤낮으로 일만하고,</P> <P>소은씨와 앞으로의 미래만을 생각하며 사는 삶이 지루했던 겁니다. 지친 겁니다.”<BR><BR>소은이의 굳은 표정이 밀랍처럼 한 결 같았다. 소은이가 책을 쥐고 일어서며<BR>“식사 하실래요.” 물었으나, 봉팔이 놈은 “보내 주는 게 아닙니다. 놓아 주는 겁니다.”<BR>하는 말을 마지막으로 자릴 털며 일어났다.<BR><BR>나를 무엇이라 명명하면 좋을까. 암세포, 독, 하다못해 손에 박혀버린 가시바늘이라<BR>칭해도 좋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서야 이치에 부합되는 것 아닌가.<BR><BR>병을 독으로 다스리는 한방치료처럼 나를 모함해서 소은이에게 나를 잊게 할 근거를 주자,<BR>생각해 낸 것은 처제였다. 그리고 봉팔이는 처제의 말을 들었을 뿐, 봉팔이의 의견과 사실 관계는 일절 배제된 근거 없는 말이었다.<BR><BR>봉팔이 놈은 현관을 나서며 떨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BR><BR>“미안하다.”<BR><BR>죄 지었다. 생각하지 말렴. 봉팔아. 내가 정말 고맙다. 너무 고맙다.<BR>나 좀 죽여주렴. 꼭 좀 죽여주렴. 우리 마누라 좀 살려주렴. 친구야.<BR></P> <P> </P> <P><BR>결혼. 그 말에 눈앞이 컴컴해져 본 남자가 몇일까. 누가 누구를 책임지고,<BR>함께 생활해 나갈까. 나는 결혼이란 제도에 부정적이었다.<BR><BR>나는 나 하나 건사하는 것도 벅찬 사람이었으니까.<BR><BR>결혼 생활이 꼭 틀에 박힌 내 상상 같지만도 않다는 것을 배웠지만,<BR>결과가 이 모양이어선 배운 보람이 없다.<BR><BR>“결혼 할래?”<BR><BR>소은이가 물었었다.<BR><BR>“혼인 신고서에 우리 이름 쓰고, 증인이 사인해주면 결혼 할 수 있어.”<BR><BR>왜, 결혼이 하고 싶어? 왜 나야? 그럼 결혼식은?<BR><BR>그런 물음보다도 어째서 분식집에 앉아 김말이 튀김 먹다 <BR>런 생각을 했냐는 말이 먼저 나왔다. 나도 참 들 떨어 졌지.<BR><BR>그런 생각을 튀김 먹던 몇 분 사이에 결론지어 입 밖으로 내었을까.<BR><BR>증인은 처제와 봉팔이 두 사람이었다. 양가부모님 허락도 없이 제출 된 혼인 신고서.<BR><BR>처제는 “미쳤어?” 라는 말을 미친 듯이 물었고,<BR>봉팔이는 서명 란에 한자도 써야 되냐고 물었다.<BR><BR>장모님은 이런 결혼 무효다. 이런 능력 없는 놈에게 우리 소은이는 맡길 수 없다,<BR>말씀 안으시고 “열심히 살아봐.” 담담히 응원하셨다.<BR><BR>장인께선 “너 정도면 됐지 뭐. 살 집은?” 이라 물으셨고,<BR>엄마는 “소은이 같은 며느리면 환영이지!” 하셨고…, 하셨고.<BR><BR>아버지, 우리 아버지는 “장하다.” 고 하셨고,<BR>친구들은 “축하한다. 부럽다.” 고 했다.<BR><BR>내가 뭘 알았겠는가. 소은이가 없었으면 나 따위가 뭐가 됐겠는가.<BR>세상엔 그런 행복이 있었다고, 그런 만족감도 있다고, 알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BR><BR>그 다음을 함께 못해 미안할 뿐이다.<BR><BR>“정말이야?”<BR><BR>봉팔이가 떠나고 횡 해진 거실이 심심하게 느껴졌다.<BR>그 자리에 가만 앉아버린 소은이는 몇 시간이고 움직임이 없었다.<BR><BR>그리곤 문득 생각난 듯, 속삭이는 듯 허공에 물었다.<BR><BR>“정말이야?”<BR><BR>당연히 아니지. 아니지만 믿으렴. 그 말은 아주아주 쓴 약 같은 거라서 몸에 좋단다.<BR>그 말은 수술대의 매스처럼 날카롭고 차지만, 소은이 너를 치유해 준 단다.<BR><BR>믿어보렴. 믿어주렴.<BR><BR>처제가 소은이에게 다시 찾아온 것은 봉팔이가 다녀가고 사흘 만이었다.<BR></P> <P>전화는 모두 불통이었고, 집은 잠겨있었다.<BR><BR>지인들과의 연락도 없었다는 말에 처제는 혼비백산 소은이에게 들이쳤다.<BR></P> <P>처제 얼굴에는 핏기가 가셔 하얗게 질려있었고, 겁을 집어먹었는지 만사를 허둥대며 실수를 연발했다.<BR></P> <P>결국 자동잠금장치를 두 번이나 틀리게 입력하고 소은이를 발견한 처제는 질겁을 했다.<BR>소은이는 숨도 쉬지 않는 이처럼 가만히 거실에 누워있었다.<BR><BR>열려있는 창으로 찬바람이 불었고, 주방에선 음식이 슬슬 상해가는 냄새가 풍겼다.<BR></P> <P>처제가 “언니!” 하고 큰 소리로 소은이를 불렀지만, 소은이는 대꾸가 없었다.<BR>소은이는 걱정한 것처럼 죽어있지 않았으나,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BR><BR>“나랑 같이 살자. 언니랑 나랑 봉현이랑.”<BR><BR>처제의 말에 소은이는 고개 한 번 끄덕이지 않았다.<BR>소은이는 움직이는 것조차 거부하는 듯 처제의 부축에도 늘어져 내렸다.<BR><BR>이후 처제는 빈번하게 소은이에게 다녀가길 반복하다가 결국 자신의 집에 소은이 방을 만들었다.<BR>좁으면 외로워한다. 넓으면 공허할 것 같다며 고심의 고심 끝에 봉팔이와 쓰던 안방을 내줘가며 만든 방이었다.<BR><BR>하지만 소은이는 말도 없이 훌쩍 사라지곤 했다.<BR>처제는 소은이가 사라질 적마다 사방을 헤매었으나, 행선지는 나와 소은이가 살던 아파트뿐이었다.<BR><BR>처제는 끈기 있게 소은이를 마중해 자신이 준비해 준 방으로 대리고 왔다.<BR></P> <P>그런 반복이 몇 달, 처제도 지쳤을까. 처제는 소은이가 아파트를 찾아들 때마다<BR>하나씩 하나씩 집의 가구며, 가전 등을 내다 버리기 시작했다.<BR><BR>처음엔 소소한 수저며, 젓가락으로 시작해, 내 옷가지, 내 책들, 내 삶의 흔적들을 꼼꼼히 지워갔다.<BR>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가는 집의 풍경을 소은이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보였다.<BR></P> <P>그것이 효과가 있었을까. 매일 같이 아파트로 향하던 소은이의 발길이 이틀 간격으로,<BR>사흘 나흘 간격으로 벌어지고, 시간이 흘러 가을로, 겨울로 접어들며 소은이는 어느새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BR><BR>스스로 수저를 들어 밥을 떠먹고, 먼 거리는 아니었으나 처제와 외출을 하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BR>마지막에 내 흔적이라곤 아내가 왼손에 끼우고 있는 결혼반지 하나 밖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BR><BR>그리고 그해 겨울 어느 밤, 처제는 소은이가 잠든 사이 몰래 반지를 빼내었다.<BR>다음날 이상하게도 소은이는 반지가 빠졌단 사실조차 모른다는 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BR><BR>반지는 거의 10년을 그 왼손에 끼워져 있었다.<BR></P> <P>이상하게도 소은이는 반지가 빠졌단 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이상하게도.<BR><BR>그리고 봄. 꽃샘추위도 가시고 거리엔 새싹들이 고갤 들고 있었다.<BR>길 건너마다 노랗게 핀 개나라며 화사하게 웃는 진달래들이 수를 놓았고,<BR>때로는 시원한 듯 때로는 따뜻한 듯 느껴지는 바람이 거리를 매웠다.<BR><BR>소은이는 혼자서도 외출을 하며 적적할 때 즘 정처 없이 산책을 즐겼다.<BR><BR>오늘도 소은이는 혼자 걸음 길에 나섰다.<BR><BR>처제의 밤색 코트를 빌려 입고, 혹시 아직은 추울까 얇은 니트에 요즘 젊은 아이들처럼 다리에 꼭 맞는 청바지를 입었다.<BR>허리까지 내려온 머리는 처제와 함께 미용실을 찾아 고불고불 멋을 내었다.<BR><BR>아아, 내가 저 여인에게 반하지 않고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그렇게 소은이는 아직도 아름다웠다.<BR><BR>소은이는 집 근처 놀이터로 공원으로 선선히 걸었다. 큰 도로를 따라서 번화가까지 나갔다간 다시 발을 돌려 근처 도서관으로,<BR>역 앞의 쇼핑상가로 이어졌다. 멀리 뜬 햇살은 순조로운 듯 보였다. 소은이의 걸음을 등지고 부는 바람은 소은이의 발길을 가볍게만 했다.<BR><BR>그렇게 두 시간 쯤. 갑작스럽게 비가 내렸다.<BR>날이 좋아 해가 쨍한 날, 대낮의 여우비였다.<BR><BR>사람들은 소식 없었던 비에 건물 안으로 간판 밑으로 몸을 피했다.<BR><BR>비는 소리 없이 소은이의 머리와 어깨를 적셔왔다.<BR>몸이 젖기 시작한 소은이는 걸음을 멈춰섰다.<BR><BR>소은이는 하늘 한 번 올려다보지 않고 말했다. <BR><BR>“자기 기다렸어요. 잘 가요. 이렇게 보내서 미안해요. 잘 가요. 우리 다시 만나는 건 조금만 미룰게요.”<BR><BR>말을 마친 소은이는 발길을 돌려 처제의 집으로 향했다.<BR><BR>어째선지, 매 번 옆에서 보이듯 하던 소은이의 모습은 뒷모습으로만 남아있었다.<BR>점차 멀어지는 소은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보이고 있는 듯 했다.<BR><BR>마누라, 나를 보낼 거니? 나는 여기에 남아있으면 되는 거니?<BR><BR>축하해. 나는 지금 너무 기뻐, 당신은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미소를 짓고 있어.<BR>잘 안 보이지? 하지만 이게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미소야.<BR><BR>혹시 들리니? 들리지 않겠지만, 내가 칠 수 있는 가장 큰 손뼉을 치고 있어.<BR>칠 수 없는 박수지만, 나는 있는 힘을 다할게.<BR><BR>길 가는 사람들. 저 여자를 좀 보세요. 저 여자는 이제 저를 모릅니다. 저를 잊었어요.<BR><BR>모두들 저를 대신해 박수를 보내주지 않을래요?<BR>벅찬 환호로 그녀의 앞길을 축하해주실래요?<BR><BR>앞으로 그녀의 걸음걸음 행복만이 놓여있기를, 저를 잊는 그녀에게 축복을.<BR><BR></P> <P><BR>그리고 안녕, 안녕히.<BR><BR><BR><BR><BR><BR>- 비가 되어 내리는 남편 완결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