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b>기억을 따라 오는 여자</b></div> <div><br></div> <div>이야기꾼이란 건 참 얻기 힘든 재능이라고 생각한다.</div> <div>그들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그때까지 보고 겪은 세계가 별세계가 된다.</div> <div>이를테면 아무리 내가 똑같이 이야기를 해도,</div> <div>이야기꾼들처럼 사람들을 무섭게 하거나, 즐겁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div> <div>나보다 다섯 살 많은 사촌 누나도 이야기꾼의 자질이 있었다.</div> <div><br></div> <div>사촌 누나는 온갖 수단을 써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div> <div>나에게 정말 일탈과도 같은 즐거움이었다.</div> <div><br></div> <div>이제는 더이상 들을 수 없지만.</div> <div>사촌 누나처럼 잘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div> <div>지금부터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 중</div> <div>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이다.</div> <div><br></div> <div>중3 초여름, 사촌 누나는 마치 껍데기만 남은 힘없는 사람이 되었다.</div> <div>평소 같으면 내가 재촉하지 않아도, 심령 스폿이나 수상쩍은 곳에 데려가주곤 하는데</div> <div>그때는 아무리 부탁해도 대충 대답할 뿐이었다.</div> <div>내가 들은 새로운 이야기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div> <div>안색도 별로고, 눈 아래에 다크서클까지 쳐져 있었다.</div> <div>어느 날 그 이유를 물은 나에게 사촌 누나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div> <div><br></div> <div>봄철부터 사촌 누나는 종종 어떤 꿈을 꾸게 되었다.</div> <div>그건 꿈이라기보다 기억이었고, 어린 시절의 사촌 누나가</div> <div>당시에 종종 놀러가던 공원의 모래를 쌓은 곳에서 혼자 노는 광경이 보였다.</div> <div>몇 번이나 같은 꿈을 꾸던 중,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div> <div>모래 쌓은 곳에서 고개를 들어보니 여자가 한 명 서 있었다.</div> <div>연핑크 옷을 입은, 검은 긴머리의 여자가 사촌 누나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div> <div><br></div> <div>여자의 존재를 깨달은 다음 날 밤, 꿈의 무대가 바뀌었다.</div> <div>조금 자라서 초등학교에 막 입학해서 수업 참관을 하는 날 광경이었다.</div> <div>뒤에 쭉 늘어 서 있는 학부형 사이에 누나의 엄마도 있어야 했다.</div> <div>선생님이 시켜서 답을 맞춘 사촌 누나는 자랑스러움에 가슴을 쭉 펴고 돌아보았다.</div> <div>하지만 거기 있던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공원에서 누나를 바라보던 여자였다.</div> <div><br></div> <div>그 다음 꿈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 있었던 운동회 때였다.</div> <div>사촌 누나는 반 대항 릴레이 경주에 나갔다.</div> <div>출발하기 위해 폼을 잡고 반 친구가 달려와 바통을 주기를 기다렸다.</div> <div>이제 곧 온다! 허리를 낮추고 자세를 잘 잡고 뒤를 돌아봤다.</div> <div>달려온 사람은 공원에 있던 그 여자였다.</div> <div>양팔다리를 휘적휘적 저으며 엄청난 속도로 다가왔다.</div> <div>사촌 누나는 공포스러워서 도망치고 말았다.</div> <div>순간 그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새하얀 피부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웃고 있었다.</div> <div><br></div> <div>다음 날 밤, 사촌 누나는 자기 전부터 어떤 예감이 들었다.</div> <div>오늘도 그 여자를 꿈에서 보지 않을까. 확신에 가까웠다.</div> <div>그리고 그렇게 되었다.</div> <div><br></div> <div>꿈 속의 사촌 누나는 중학생이었다.</div> <div>기억대로, 연주부 연습에 참가했다.</div> <div>고문 선생님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서 트럼본을 불 준비를 했다.</div> <div>깊이 숨을 들이쉰 채로 사촌 누나는 얼어붙었다.</div> <div>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은 그 여자였다.</div> <div>미친 듯이 건반을 두드리며 얼굴을 사촌 누나를 향하고 있었다.</div> <div><br></div> <div>그 여자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div> <div>이상하리만치 흰 피부, 가느다란 눈, 높은 콧날,</div> <div>새빨간 립스틱이 발린 입술을 크게 벌리고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div> <div>입 안의 덧니가 보였고, 립스틱 때문인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div> <div>길이가 들쑥날쑥한 검은 긴 머리가 여자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 넘실거렸다.</div> <div><br></div> <div>땀에 흠뻑 젖어 눈이 떠졌고, 사촌 누나는 어떤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div> <div>자신의 꿈 속에서 성장 과정을 되짚고 있는 것이다.</div> <div>처음에는 어린 시절, 다음은 초등학생, 이번엔 중학생이었다.</div> <div>어쩌면 그 여자는 내 기억을 따라오고 있는 게 아닐까.</div> <div><br></div> <div>그 가설은 맞았다.</div> <div>잠이 들때마다 꿈 속의 사촌 누나는 성장했고, 여자도 어딘가에서 나타났다.</div> <div>어떤 날은 고개를 들었을 때 계단 위에서,</div> <div>어떤 날은 전철의 맞은 편 자리에서,</div> <div>어떤 날은 교실 옆 자리에서.</div> <div>사촌 누나는 이쯤 되어서 하나의 법칙을 더 깨달았다.</div> <div>여자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div> <div>이제는 그 여자의 흰자위, 이와 이 사이에서 늘어진 타액까지도 똑똑히 보였다.</div> <div><br></div> <div>사촌 누나는 잠을 자지 않으려고 커피를 마시며 밤을 샜다.</div> <div>하지만 한계가 있었ㅈ다. 여자는 잠시 자는 낮잠에서도 나타났다.</div> <div>그리고 결국 현실에 다가왔다.</div> <div><br></div> <div>여기까지 말해주더니 사촌 누나는 고개를 숙였다.</div> <div>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렸다.</div> <div>몰입해서 이야기를 듣던 나는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재촉했다.</div> <div>재촉하던 나를 치켜뜬 눈으로 응시하더니, 사촌 누나는 천천히 웃었다.</div> <div><br></div> <div>"그러니까 현실까지 따라왔다고 했잖아"</div> <div>그렇게 말하던 사촌 누나의 입가에 덧니가 나 있었다.</div> <div><br></div> <div>사촌 누나가 언제부터 덧니가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div> <div><br></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