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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lovestory_91973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1
    조회수 : 375
    IP : 14.58.***.139
    댓글 : 0개
    등록시간 : 2021/06/09 21:55:34
    http://todayhumor.com/?lovestory_91973 모바일
    [BGM] 아픔은 천천히 검은빛으로 변해간다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정복여, 깊은 방




    내가 세 들어 사는 이곳에 아주 오래된 연못 하나 있었다

    계약서에는 없던 무수한 물방울들이 처음 발을 들여놓자

    사각의 방 모서리를 허물며 둥글게 안으로 흘러들었다

    내 호흡의 울림으로 연못은 여러 개의 둥근 원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둥글게 흔들린 물방울들이 놀라 서로의 몸을 바라보면

    그 빛에 잠을 깬 물개암나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수면 위에는 오래된 연잎이 몇몇 모여 아직 오지 않은

    꽃을 기다린다고 말하였다

    몸 기울여 연잎의 깊은 뿌리를 들여다보았을 때

    그곳에 나 이전의 어떤 빛이 나를 보고 있었다

    흰 달의 그림자 같기도 한 그 빛은 내게

    무슨 말을 하는 듯

    못의 한가운데 솟은 작은 산 하나 보여주었다

    산은 연못보다 더 오래된 깊이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사자처럼 생긴 바위는 연잎의 뿌리에 닿아

    그 뿌리에 사는 빛의 그림자를 안고 있었다

    나는 그 바위 아래서 잠이 들었다

    내가 눕자 연못도 함께 누웠다

    그리곤 보일 듯 말 듯 한 바닥을 내게 주었다

    그 이후 나는 날마다 내 열쇠 하나로

    어떻게 이 연못을 잠가두고 나갈 수 있을까 걱정하였다

     

     

     

     

     

     

    2.jpg

     

    최영철, 새벽 우포에서




    여명은 없었으나

    물살이 추적대며 잠 깨는 소리 들렸다

    푸른 물이끼의 눅눅한 이부자리 헤치고

    늪 가까이 다가서자

    낯선 발소리에 컹컹 동네 개 한 마리 짖었다

    긴 밤을 엎드려 있던 게으른 안개가

    그때마다 몸을 일으키자

    풀썩풀썩 품 안에 갇혀 있던 새벽이

    수초 틈을 헤집고 나왔다

    그 중 초겨울 서리로 하얗게 얼어붙은 눈썹 몇

    억새 위에 맺혔다

    새벽이 빠져나간 여백으로

    오래 기회를 엿보았을 습지 새들이 줄행랑을 쳤다

    후드득 붕어 잡이 어부들이 그물을 거두어들이자

    긴 휘파람 소리 따라

    지상으로 거처를 옮기는 참붕어 떼

    돌아 나올 때 아까 짖던 개가

    잠자코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내 뒤를 따라나선

    새벽안개를 반기는 중이었다

     

     

     

     

     

     

    3.jpg

     

    이문재,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4.jpg

     

    이덕규, 허공




    자라면서 기댈 곳이

    허공밖에 없는 나무들은

    믿는 구석이 오직 허공뿐인 나무들은

    어느 한쪽으로 가만히 기운 나무들은

    끝내 기운 쪽으로

    쿵, 쓰러지고야 마는 나무들은

    기억한다, 일생

    기대 살던 당신의 그 든든한 어깨를

    당신이 떠날까 봐

    조바심으로 오그라들던 그 뭉툭한 발가락을

     

     

     

     

     

     

    5.jpg

     

    조용미, 검은 꽃잎들




    목련의 꽃잎을 그냥 희다고 해야 할까

    마당을 울리며 떨어져 내리는

    목련, 지는 소리

    뿌리 뽑히듯 천천히 땅으로 내려앉는

    저 꽃의 사나운 운명을

    단지 짧은 봄의 날짜 탓으로 돌려야 할까

    목이 메이도록 아픈 흰빛은

    지상으로 내려와

    물기를 다 내어보내고 침향색으로

    검은빛으로 오그라들어

    마침내 흩어진다


    아득한 기억 위로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희고 어두운 꽃잎들


    비 내리고 바람 불어

    불두화 작은 꽃들

    다 흩어져내려 상여 같은 흰 길이 생겨났다

    적멸에 든 작은 꽃송이들

    부처의 머리가 달아났다

    나발들이 흩어져 하얗게 쌓인 앞뜰

    바람에 나부끼는 부처의 머리칼들


    난폭한 봄이 도발해 낸 아픔은 천천히

    검은빛으로 변해간다

     

     

     

     

     

     

    통통볼의 꼬릿말입니다
    kYOH2dJ.jpg

    이 게시물을 추천한 분들의 목록입니다.
    [1] 2021/06/10 07:12:56  59.2.***.158  사과나무길  56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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