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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7 00: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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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장 3루쪽 덕아웃 옆에 앉아서 땅볼을 치는 노인이 있었다. 날도 더운데 빠른 퇴근을 하려고 땅볼 하나 쳐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가격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땅볼 하나 가지고 값을 깎으려오? 비싸거든 채태인한테나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더 깎지도 못하고 땅볼이나 쳐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커트질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노볼 2스트로 빨리 죽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커트 하고 저리 골라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땅볼이나 치고 죽으면 됐는데, 자꾸만 커트질이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죽으라고 해도 못 들은 체한다. 퇴근 시간이 바쁘니 빨리 죽으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체 대꾸가 없다. 점점 수목드라마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다.
땅볼치지 아니해도 좋으니 그만 삼진이나 당하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하면서 오히려 야단이다. 나도 기가 막혀서,
"어차피 풀카운트라 공하나면 끝나는데 이제와 땅볼이 무얼 더 필요하단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려. 드라마 시간에 늦는다니까……."
노인은
"모상기 대타나 쓰시우. 난 안 치겠소." 하는 퉁명스런 대답이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대타 쓸 수도 없고, 어차피 각시탈은 오늘 결방인거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諦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쳐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공이 뒤로 튀고 늦어진다니까. 땅볼이란 제대로 당겨쳐야지, 결대로 밀어 놓으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투다.
이번에는 방망이를 숫제 가랑이에다 끼고 태연스럽게 타임을 부르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 노인은 또 커트질 하기 시작한다. 저러다가는 방망이가 다 깎여 없어질 것만 같았다. 또, 얼마 후에 몸쪽 공을 이리저리 골라 보더니, 땅볼을 쳐준다. 사실, 칠려면은 아까부터 칠 수 있던 땅볼이다.
이른 퇴근을 놓치고 늦게 집에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땅볼 아웃 될 거 풀카운트 승부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불친절(不親切)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니, 노인은 열심히 내달리며 1루 베이스 바라보고 있다. 그 때, 어딘지 모르게 야구선수다워 보이는, 그 내달리고 있는 옆 모습, 그리고 필사적인 질주와 빠른 발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놀림도 조금은 덜해진 셈이다.
3루로 눈을 돌려 타구를 살펴봤더니, 최정은 땅볼을 예쁘게 쳐내 놓쳤다고 야단이다. 1회에 친 2루앞 병살 땅볼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아 왜 놓쳤는지 의아했다. 그런데 최정의 설명을 들어 보면, 공이 너무 높게 튀면 속도가 느리고, 뒤로 가서 잡으면 되고, 공이 너무 낮게 튀면 멀리 뻗지 못하고 국대 3루수 손놀림에 붙잡히기 쉽다는 것이고, 요렇게 딱 알맞은 땅볼 안타는 좀처럼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내야 땅볼 안타 2타점을 보며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