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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5 21: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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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나라 디자인이 저런..현실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우선 시장 크기가 너무 협소해요. 영화 포스터로 예를 들자면, 영화 매니아나 팬층만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려면 수지타산이 맞질 않습니다. 영화에 별 관심이 없지만 가끔 문화생활의 일환으로 가볍게 즐기는(사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긍정적 이미지의 문화생활이 영화이니까요..) 타겟층까지 공략하려면 온갖 정보들을 다 적어주는게 낫죠. 영화 즐겨보는 사람들이야 배우별, 감독별로 성향이나 스타일을 알기에 감독 이름만 적혀있어도 그 감독이 자기 취향이면 일단 기대를 걸지만, 영화에 관심없는 사람이라면 그 감독의 전작 중에 대중적으로 성공한 것들을 적는다거나 그런식으로라도 한명의 관객이라도 더 끌어들이려는 겁니다. 안타깝긴 하죠. 애당초 타겟층이 불분명한 채 다양한 관심사의 다양한 사람들을 다 공략하려고 들다보니, 그래야 수지타산이 맞을 정도로 내수시장 크기가 작다보니 홍보도 중언부언 구차해지는거죠.
두번째 이유로는 사는게 워낙 팍팍하다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을 그리 많이 쏟질 못합니다. 돈벌이에 관련되지 않은 단순 취미라면 영화건 음악이건 죄악시하는 분위기가 있어서, 깊게 파고들질 못해요. 영화에 관해서도 자기 취미에 대해 좀 더 깊게 관심을 쏟는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장르, 감독, 배우, 시나리오 작가, 감독의 차기작 정보 등등을 스스로 찾아 알게 되겠지만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보니 각각의 영화들이 각자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매번 총력을 다해 될수 있는 한 많은 정보를 한번에 쏟아내야하는 상황이 오는거 같습니다.
세번째 이유는.. 관료주의 탓이라 봅니다. 디자인을 자기 회사 소속 전문 디자이너나 외부 디자인 회사에 맡겼다면, 디자인 전문가의 의견을 어느정도 존중하고 수렴해야 하는게 정석입니다만 일단 높으신 분들께서는 본인들이 전문가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기 취향을 강력하게 주장하죠. 본인 취향보다는 홍보 전략에 따른 디자인이 우선되어야 함에도 그런거 없습니다.. 심지어 자기 취향을 디자인에 반영을 시키더라도, 최소한 본인이 뭘 원하는지라도 디자이너에게 정확하게 전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커뮤니케이션도 안되죠. 어디서 주워들은, 하지만 본인은 이해도 못하는 수식어들을 동원해서는 '화려하면서도 모던한' 이런 식의 말도 안되는 주문을 뜬구름 잡듯이 두루뭉술 펼쳐대며 '어디 내 머릿속에 든 것을 당신이 알아서 한번 구현해 봐봐' 이런 자세입니다..
중간 간부들의 오지랖도 문제죠. 이들은 높으신 분이 보기 전에 자기가 뭐라도 입김을 좀 행사해둬야 한다는 강박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높은 분들이 결재서류를 받으셨을때 '중간 간부 OOO의 입김이 여기 쪼끔 들어있습니다'하는걸 어필하기 위해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 (예를 들면 자신이 디자인팀의 간부가 아님에도 디자인 같은 분야)에까지 밑도 끝도 없는 참견을 하는거죠. 이런건 관료주의가 극에 달하는 공기업, 정부기관, 대기업 등에서 유독 심합니다.
지금은 디자인을 관두고 다른일을 하고 있습니다만 예전 제가 잠시 디자인을 했던 시절, 이제 막 민영화된지 얼마 안된 모 거대 공기업의 신임 사장 취임식 발표 자료를 만든적이 있었습니다. 새 사장님 취임식에 쓰일 자료이다보니 아랫 사람들이 엄청 들이댔죠. 전무가 9명인가 됐었는데, 컨펌을 9차례 받는 동안 저는 무슨 사망유희를 찍는 줄 알았습니다. 각자 새 사장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 자료에 자기 입김을 강렬하게 적용시키길 바라다 보니 그냥 이유도 없이 본인 취향에 따라 디자인을 다 갈아 엎더라구요. 당시 잡스옹의 키노트 스타일이 한창 국내에서 이슈를 끌던 참이라 심플한 디자인의 초안이 나왔었는데 전무 1이 거기에.. 텍스트를 이래저래 첨부시키고 몇번 갈아엎다가 겨우 컨펌.. 그리고 그걸 다시 전무 2에 의해 갈아엎고 텍스트가 잔뜩 추가.. 전무 3이 페이지를 더 늘리고 이미지도 추가하고 글자수도 늘리고.. 전무 4가 폰트사이즈를 줄여가며 더 빽빽하게 뭔가를 집어넣고.. 전무 5는 회사가 전에 이뤘던(아마도 본인이 추진했었던 걸로 추정되는) 어떤 업적에 관한 내용을 또 추가하고.. 전무 9까지 통과하는 과정이 참 험난하고 괴로웠습니다. 데드라인은 다가오지, 디자인은 걸레가 되어가지, 시간 없다고 그 회사 사람들이 파견나와 밤새도록 내 뒤에 병풍 둘러싸고 디자인하는 거 지켜보며 '저기 저 이미지 몇센티(...픽셀도 아니고 센티..)만 밑으로 내려주세요' 해대지..
결국 그 지옥같은 사망유희 9층탑을 다 통과한 뒤에 신임 사장이 최종 결재를 하는 순간, "이 따위걸 내 취임식에 쓰라고 만든 거냐" 격노하신 사장님의 일갈에 의해 잔가지 다 쳐내고(시간도 없었던 관계로...) 처음의 그 심플했던 디자인에 매 페이지 텍스트 한줄씩만 집어넣어서 완성했습니다...
이게 우리나라 디자이너의 현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