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
2017-12-01 07:00:16
1
'아 목말라,'
깊은 새벽 갑자기 찾아온 갈증에 눈이 떠졌다.
남편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남편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의야한 생각에 뒤를 돌아보니, 남편이 자리에 없었다.
괜히 이런 저런 걱정이 떠올라, 전화를 걸었으나, 신호음만 들릴 뿐, 벨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한참 연결음을 기다리자 마침내 그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평온한듯 꾸민 그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울렸다.
어디에서 뭐하냐는 나의 질문에 남편은 고민이 많아 잠시 산책을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 20년의 경험 통해 나는 그가 단순히 산책을 나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과장되게 정돈된 어투는, 그가 누군가와 함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왜 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 본능은 그가 어떤 여자와 함께 있다고 확신을 했다.
그렇게 생각이 가닥을 잡자, 그동안의 일들이 들어맞기 시작했다.
과하게 가정적이 된 그의 최근의 모습은, 어쩌면 자신의 외도에 대한 미안함의 표시였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빤히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길때는, 아마도 지난 세월을 되 짚으며 우리 인연의 마지막을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최근 그의 대부분의 표현에서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현저하게 줄어든 것도, 더이상 '우리의 미래'는 없을거라는 그의 생각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이렇게 차분하게 정리해가는 내 모습에 흠칫 놀랐다.
아마도, 내 무의식은 그의 변한 모습에서 이런 결말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다.
담담하게 가슴이 사실을 받아들이자, 이성이 그 이후의 행보를 지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마당에, 그의 미래를 저주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비극의 피해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한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증거'.
그가 나를 밀처낼 그럴듯한 사실의 임의적 조합을 생성하기 전에, 이 비극의 시작을 짚어 줄 확실한 실체가 필요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을 그보다 일찍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그가 바람처럼 침대에서 사라질때마다, 나는 그림자처럼 그 뒤를 밟았다.
하지만 그는 그저 집 주변을 한바퀴 돌고는, 주차장 아래 그의 지하 작업장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일주일을 지켜본 뒤, 이런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좀 더 적극적이고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
시작은 말할 것도 없이 지하 작업장이었다.
그가 무엇을 준비하고 있든지, 그 곳이 아니라면 당장은 어디에서도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토요일 아침 8시, 늘 그렇듯 남편은 테니스 모임을 위해 집을 서둘러 떠났다.
그리고 그의 차량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도 집을 나섰다.
회색으로 칠해진 지하 작업실 문 앞에 섰다.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자물쇠는 디지털 락이 추가되어 이중으로 접근을 막고 있었고, 문 주변으로는, 철제 구조물이 덧 붙여져 있었다.
또, 모든 유리문들에는 반사 필름이 부착되어 있어서, 절대 안을 들여볼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도데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외부에 (아니면 나에게) 노출되어서는 안될 것을 보관하고 있는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약간은 엉성하게 , 특히나 왼쪽 아래 힌지부분은 서둘러 마감했는지, 철제 구조물이 비뚤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허술한 그의 마감에 실소가 쏟아졌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뒤 문을 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열쇠를 여는것은 간단했다, 기존 자물쇠를 교체하지 않았는지, 보관하고 있던 마스터키를 돌리자, '철컥' 하며 잠금이 풀렸다.
하지만 디지털 락이 문제였다. 한번도 집에서 디지털 락을 사용한 적이 없었을 뿐더러, 그것에 대해서 그가 언급하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언뜻 생각나는 대로 그가 좋아하는 숫자, 좋아하는 야구팀의 상징적 연도, 기록등을 눌러 보았지만 디지털락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생각나는 모든 숫자들을 넣어도 열리지 않아, 이리 저리 문을 둘러보다가, 왼쪽 하단의 작은 글씨에서 눈길이 멈추었다.
'E.Y ♥ H.J.'
우리가 처음 이곳으로 이사를 오고 이 작업실을 꾸미면서 만든 사랑의 징표였다.
색 바램이 없는 고급 페인트에 몇번이고 마감을 더하여, 이 글씨가 지워질때까지 사랑하자고 속삭였던 추억이 스쳤다.
갑자기, 철제 구조물이 사실은 이 글씨를 피해서 만들어져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어쩌면 그가 이 구조물을 만들 당시에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를터였다.
그리고, 자신없게 누른 내 생일에 디지털락이 반응했다.
'띠리릭.'
문은 지나치게 빡빡했다. 쉽게 열리지 않아 체중을 던져 문을 밀어야 했다.
'투둑.'
뭔가가 떨어지며 문이 열렸다. 문에는 각종 전선들이 연결되어 있었고,
작업실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장비들, 해석할 수 없는 그래프를 보여주는 모니터가 늘어져 있었다.
'세상에..'
모니터 너머 유리로 이루어진 작은 방안에는 어떤 여자가 묶여 있었다.
고개를 떨구고 있는 것이 잠에 빠진 것인지, 기절한 것인지, 죽은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도움을 요청하려고 핸드폰을 찾아 보았으나, 카메라를 챙기면서 핸드폰은 집에 두고 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잠시만요.. 잠시만 참으세요.."
밖으로 나가 경찰을 부를 것인지,
일단 그녀를 꺼내 같이 밖으로 나갈 것인지 고민을하다가, 그녀를 꺼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장비들이 물려 있었기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모니터에서는 뭔가 붉은 불빛이 깜빡이는 것이 어쩌면 묶인 그녀의 위급한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한참을 허둥대다가, 구석에서 차량 탈출용 망치를 발견했다.
"잠깐만요.. 좀 시끄러울 거에요.."
망치를 들어 유리문을 두드렸다. 쉽게 깨지지 않아 등 뒤에서 땀이나고 팔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유리문이 큰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유리 잔해를 피해 조심하며 그녀에게 다가가 벨트를 풀려는 순간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엘리나, 안되요..!!!!!"
그의 외침과 동시에 나는 벨트를 풀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남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았다.
그건 처음보는 표정이었다. 마치 죽음을 대면한, 공포와 포기가 섞인듯한 오묘한 표정이었다.
너무나 처절한 그의 표정에 나는 잠시 몸이 굳었다.
하지만, 어깨를 적시는 축축한 물기에 나는 다시 몸을 움직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이름모를 생명체의 커다란 눈 속에서 남편의 표정을 한 내 얼굴을 보았다.
그건 더 이상 여자가 아니었다.
아니,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기괴하게 자란 뿔과 말도 안되게 커다란 눈, 그리고 그리고 불길을 내뿜는 코와 입..
감사의 표시였을까, 그 괴물은 적어도 당장은 나를 죽일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동안의 감금이 마음에 들지 않은건 확실한 모양이었다.
그것은 몸을 일으켜 날카로운 앞발로 지붕을 조각내고, 입에서 내뿜은 불길로 그 조각들을 순식각에 태워버렸다.
그리고는, 고막을 울리는 큰 괴성을 지르고는 순식간에 하늘로 솟아 버렸다.
나는 털썩 다리가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내가 뭘 한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