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style="color:#333333;font-family:gulim, Dotum, Helvetica, AppleGothic, sans-serif;"> </font><span style="color:#333333;font-size:9pt;font-family:gulim, Dotum, Helvetica, AppleGothic, sans-serif;">1화 링크 - </span><a target="_blank" href="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readers&no=27487&s_no=27487&page=4" style="color:#0000ff;text-decoration:none;font-size:9pt;font-family:gulim, Dotum, Helvetica, AppleGothic, sans-serif;">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readers&no=27487&s_no=27487&page=4</a></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날이 밝았다. 어느새 잠들었던 사내가 눈을 뜨자 미리 일어나있던 소녀가 말했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역시, 죽는 건 무서워요. 하지만 언젠간 죽겠죠. </font></div> <div><font size="3"> 그래도 꾸준히 생각하니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전히 무섭긴 하지만.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어제보다 따스했다. 사내도 소녀도 계획보다 늦게 일어난 탓이었다. 아침은 하는 수 없이 알약으로 때웠다.</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전날보다 눈이 어느 정도 녹아 있었다. 햇살은 훨씬 눈부셨다. 바퀴가 구를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천천히 의자를 밀었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밤에 아무리 무서워하면서 잠들어도 아침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 잊어요. 햇빛이 저렇게 밝으니까 제 편이라도 생긴 것 같나 봐요. 와, 오늘은 특히 더 날씨가 좋아 보여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사내도 소녀 따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청아한 하늘 아래서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디 공원 의자에 누워 낮잠이라도 자고 싶은 나른한 정오였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여기 겨울에 이런 날 흔치 않은데, 운이 좋네요. 오늘이 마지막 작업이죠?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네, 지금부터 서두르면 해지기 전엔 출발할 수 있을 겁니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그럼 바로 체험할 수 있나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며칠 더 걸리긴 합니다. 지금까지 모은 자료를 다시 컴퓨터로 구현하는 작업이 필요하니까.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헐, 또 기다려야 한다고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원래 좀 오래 걸리긴 합니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의자 미는 속도가 느려졌다. 소녀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그럼 다른 사람들 예약이 많이 밀렸겠네요. 미안해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몇 분이 먼저 예약을 뒤로 옮기겠다고 하셔서 크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옮겼다고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종종 있는 일입니다. 손님 대부분이 벽 안에 사는데, 최근에 안쪽에서 벽을 허물자는 시위가 크게 일어나 며칠간은 모든 관문을 봉쇄한다고 합니다.</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벽 없애자는 시위가 요즘도 있나 봐요? 저 안에 있을 때도 몇 번 봤는데. 이러다 또 그때처럼 안 좋은 일이 일어날까 걱정이네요. 누가 피해 보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소녀가 양손 가득 눈을 담았다. 손틈으로 맥없이 흘러내린 눈가루가 곧 조그만 언덕이 되었다. 그 언덕을 딛고 소녀와 사내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아, 그런데 안 사람들이 왜 여기까지 오는 거예요? 그쪽엔 가게가 없어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규제가 심해서 그렇습니다. 벽 안에선 가상현실 제작권한이 전적으로 국가에 있고, 그마저도 요양원에서 노인들이 죽기 직전에 요청하는 마지막 소원을 구현해주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물론 할 사람은 어떻게든 하겠지만. 거기서 할 돈이면 차라리 출입국에 뇌물 쓰고 밖으로 나오는 편이 훨씬 값쌀 겁니다. 설령 들킨다 해도 외출 목적을 허위로 작성한 죄밖에 성립하지 않을 테니까.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사내는 오늘 일할 자리를 둘러보았다. 광활한 눈밭에 바람만 맴돌고 있었다. 어떻게 장비를 설치해야 할지 알아서 척척 그려졌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자, 이제 일 시작합시다. 늦잠 자는 바람에 오늘은 서둘러야 합니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소녀는 사내를 데리고 돌아다니며 사내가 지정하는 곳에 장비를 설치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나무 하나, 풀 한 포기까지 놓치지 않았다. 서쪽 하늘에서 개밥바라기가 보일 때가 돼서야 사내는 폐건물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남은 음식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데, 소녀가 쭈뼛대며 다가왔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소녀는 사내를 나무 앞으로 데리고 갔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줄래요?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소녀는 나무 가까이 다가가 이리저리 살폈다.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아, 여기다.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소녀가 마주한 줄기에 자그만 구멍 하나가 나 있었다. 소녀는 무릎을 꿇은 채 앞에 쌓인 눈을 조금씩 파내기 시작했다. 젖은 흙이 나오고 나서야 소녀는 새빨개진 손을 호호 불었다. 땅 위로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큼지막한 돌이 보였다. 소녀는 다시 그 아래를 팠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마을을 내려다보던 사내 뒤로 소녀가 다가왔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아저씨.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사내는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조그만 나무 상자를 들고 있었다. 사내는 유골함보다 얼어붙은 소녀의 볼에 더 눈길이 갔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잠깐 이리 좀.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소녀가 가까이 오자 사내는 더 오라는 손짓을 했다. 소녀는 허리 숙여 사내와 눈을 맞췄다. 갈색 눈동자가 사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사내는 메고 있던 목도리를 풀러 소녀에게 걸어주었다. 소녀가 조그맣게 웃었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아까 짐 챙기다가 목도리를 가방 맨 아래 넣는데, 꺼내기 귀찮더라고요. 목이 허전했는데 이제야 좀 따뜻해지겠네요. 사실 아까부터 내심 아저씨가 걸어주기만 기다렸어요. 끝까지 안 줬으면 제가 뺐었을지도 몰라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사내는 이번엔 소녀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장갑은 어쨌습니까?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소녀는 잊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아, 맞다. 아까 주머니에 넣어놨어요. 흙 묻는 게 싫어서. 이제 다시 껴야죠.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함은 왜 다시 꺼냈습니까?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아저씨가 벽 안으로 갖고 가주셨으면 해요. 이것이 제 부탁이에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소녀가 함을 건네려 했지만 사내는 받지 않았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여기로 데려올 때부터 어렴풋이 예상은 했는데 정말 그걸 부탁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받은 의뢰는 하나가 끝입니다. 그것도 그쪽이 보여준 전자 종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 말입니다. 양심이 있다면 여기서 끝내십시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사내가 뒤돌려는 순간 소녀가 이를 막았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그래요. 그건 제가 협박한 의뢰였죠. 하지만 이번엔 정식으로 부탁드리는 거예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소녀는 묵직한 봉투를 건넸다. 돈 약간과 지도 한 장이 들어있었다.</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선금하고 지도예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지도?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보물 지도요. 사실 음식 사 온 돈이 여기서 조금 빼 온 거였어요. 이제 아저씨 돈일 텐데 몰래 써서 미안해요. 그래도 아저씬 분명 제게 고마워할 날이 올 거예요. 뭐, 아직은 다른 의뢰가 먼저니까 엄마는 마을 납골당에 잠시 데려갈게요. 여기에 다시 묻으면 아저씨 혼자선 못 올 거 같으니까. 아저씨는 1년 안에만 벽으로 가면 돼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소녀는 사내가 의뢰를 받아들였다고 이미 기정사실로 한 듯했다. 사내는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그저께에는 묻힌 돈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거짓말한 거죠. 아마 보면 깜짝 놀랄 걸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알겠습니다. 어머님께서 눕고 싶으시다 한 곳이 정확히 어디였습니까?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뒷산. 그렇게만 말씀하셨어요. 아마 엄마가 벽 안에서 살던 집 뒷산이겠죠. 주소 적어줄게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사내와 소녀는 천천히 언덕을 내려왔다. 녹았던 눈이 다시 얼어 올라올 때보다 훨씬 위험한 길이었다. 소녀가 발을 몇 번이나 헛디디는 바람에 사내는 죽음에 관해 고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시장 장사는 저녁부터라는 사실을 몸소 증명이라도 하듯 장터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내가 지나가자 몇 사람이 인사를 건넸다. 소녀는 그럴수록 목도리에 코를 더 깊이 묻었다.</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한참 후에야 둘은 검문소를 통과했다. 소녀도 그제야 목도리를 벗었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인기 많네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처음 여기 정착할 때 저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제가 반대로 도와주는 처지지만, 어쨌든 고마운 친구들입니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친구라니, 신기하네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뭐가 말입니까?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가상현실 가게 주인이 현실에서 친구 만드는 일은 되게 드물지 않아요? 만나보니까 전부 은거 왕따던데.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폐쇄적인 직업이라 그런 사람도 몇 있긴 할 겁니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단순히 ‘몇 있는’ 정도가 아니라니까요? 아마 아저씨 빼고는 죄다 방구석 폐인일 거예요. 전에 다른 가게 가봤을 땐 깜짝 놀랐어요. 하나같이 자신만의 세상에 푹 빠져서 밖으로 나오려 하지도 않더라고요. 아마 아저씨처럼 현장조사라도 하는 가게도 거의 없을 거예요. 아저씬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직업적으로는 너무 잘 어울리는데 성격은 전혀 안 맞는 거 같아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사내는 지난 십오 년간의 가게 생활에 만족하는 편이어서, 성격 운운하는 소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소녀가 찾아온 시기가 화상 입은 여자 이후였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소녀는, 사내의 게을러진 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중이었다. 사내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때 소녀가 아저씨, 하고 부르며 사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신을 보라는 뜻이다. 사내는 고개를 돌렸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이 의뢰 끝내고 나면 그냥 가게 접으면 안 돼요? 다른 주인들처럼 될까 봐 걱정돼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사내는 씁쓸히 웃었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자기가 만든 기계에 앉아서 백골로 발견되는 것 말입니까?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네, 그거. 현실 부정하면서 평생을 망상 속에서 보내다 결국 자신이 설계한 가상현실로 들어가 영원히 갇히는 거.</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사내는 어느 순간 입을 열지 않음으로써 자연스레 소녀의 부탁을 피했다. 소녀도 이젠 묵묵히 걷기만 했다.</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희미하게 폭죽 소리가 들렸다. 마을 쪽이었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새해맞이 행사인가 봐요. 잠깐 구경할래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갈 길이 멉니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소녀는 빙긋 웃더니, 아저씨한텐 선택권이 없어요, 라고 말하곤 의자를 돌렸다. 그렇게 올려다본 하늘은 달도 별도 없는 검은 도화지였다. 사내의 무의식이 다시 붓을 꺼내려 할 때, 별안간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이어 도화지 위에 한 송이 꽃이 활짝 폈다. 중심에서 사방으로 힘껏 뻗어 나가는 샛노란 민들레였다. 한순간 주위가 밝아졌다.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여자가 건넸던 흑백사진 속 풍경처럼, 빛과 그림자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내는 조용히 소녀 편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눈이 꽃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뒤에도 개나리, 분홍들국화, 장미, 진달래, 매화 등 온갖 종류의 꽃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눈이 부신 것도 잊은 채 사내는 소녀가 그려준 한 폭의 그림을 멍하니 보기만 했다.</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놀이가 끝났다. 한바탕 호들갑을 떤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졌다. 하지만 밤하늘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구름 사이로 달이 조금씩 저를 드러낸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소녀는 다시 바퀴의자를 밀었다. 잠시 걷다 말고, 사내가 소녀를 올려다봤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분명 말소리가 들렸는데.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아, 잠깐만요. 뭐가 들리긴 하네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소녀는 귀를 기울였다. 폭죽이 솟아올랐던 곳에서 누군가 소리울리미로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유심히 듣던 사내는 순간 이 세상에 소녀가 두 명 있다고 생각했다. 저편에서 들리는 목소리도 소녀의 목소리였다.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하지만 이내 인형 소녀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또 다른 자신이 말하는 새해 인사를 들던 소녀는 갑자기 손잡이를 놓더니 끌린 듯이 그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내도 황급히 바퀴를 굴렸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한참이 지나서야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을 한가운데 서 있는 커다란 전광판에 인형 소녀가 보였다. 소녀는 그쪽을 바라보며 닿지도 않을 전광판을 향해 자꾸만 손을 뻗고 있었다.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가까이 가자 목소리가 좀 더 뚜렷이 들렸다. 인형은 광장에 모인 이들에게 짧은 감사 인사를 건네는 중이었다. 진심으로 행복한 한 해였다고, 다음 해에도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 부탁한다고,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소녀는 뒤늦게 사내를 알아차렸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아, 미안해요.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얼마 안 됐습니다. 이제 갑시다. 이대로 가다간 길 위에서 잘 지경입니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한참이나 서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소녀는 의외로 순순히 손잡이를 잡았다. 과거의 자신을 멀리서 지켜보는 시간 여행자처럼, 소녀는 인형을 향해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나직이 속삭였다. 잘 살아, 너라도 행복해라.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마지막으로 고개 돌린 쪽은 사내였다. 전광판 속 소녀가 눈길 속으로 사라져갔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저 인형도 과연 몸을 팔수 있을까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사내는 마시던 물을 뱉고 한참이나 캑캑댔다. 사례가 심하게 들린 모양이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왜 그렇게 놀라요?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사내는 대답 대신 소녀를 바라보았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그걸 왜 묻습니까.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궁금해서요. 겉모습이야 그렇다 쳐도, 그 복잡 미묘한 내부까지 완벽히 구현할 수 있나?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사내는 그 복잡 미묘한 내부가 가장 먼저 개발됐을 것이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소녀가 말한 내부는 도덕심 같은 추상적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잠시 의자가 느려지더니 소녀가 말을 꺼냈다.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br></font></div> <div><font size="3"> 효율적인 방법으로만 움직이는 인형이니까, 엄청난 제안을 받으면 인형도 그걸 하겠죠?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인형‘도’라니, 매춘이라도 했단 말입니까? </font></div> <div><font size="3"> </font></div> <div><font size="3"> 네, 몰랐어요?</font></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