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face="돋움">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br><br><br><br>네가 바라는 사랑이 뭐냐고 그녀가 물었다.<br>이번에 쓰는 소설은 어떤 내용이야?<br>내게는 그녀의 질문이 꼭 그렇게 들렸다.<br><br>나는 정확하길 포기한 평범함을 묘사하려 했다.<br>하려 했는데,<br>나의 부끄러움은 늘 말이 될 수 없었다.<br><br>결국, 곧이곧대로 평범함이라고 말했다.<br>그러나 그녀는 특별함에 관해 알고 싶어 했다.<br>왜 하필 그 사람이었던 거야?<br><br>You were there.<br>사랑하는 소설 속 문장이 떠올랐다.<br>모르겠다는 말 하나만이라도 확신을 담아 발음하고 싶었다.<br><br>모르겠어.<br>그가 인연이라고 말한 순간<br>나도 인연이라고 동시에 말했어.<br>넌?<br><br>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늦잠과 <br>먼저 하는 샤워와 미리 차려진 아침 식사와<br>탄산수로만 가득 찬 냉장고 그리고<br>저녁 식사에 관한 전화통화를 기억해냈다.<br><br>그녀의 지난 사랑을 듣고 보니 조금 알 것 같았다.<br>나와 그는 상상투성이였고<br>약속투성이였고<br>기대하고 짐작한 것투성이였다.<br><br>평범함을 겪어본 적이 여태 한 번도 없었구나.<br>잡히지 않는 대화 속에서 혼자 생각하며 혼자 깨닫기 시작했다.<br>꿈을 이야기하듯 내 눈은 감겨 있었고 <br>말은 앞을 보지 못해 더듬거렸다.<br><br>네가 잘못한 게 아냐.<br>네 잘못이 아닌 내 잘못이야.<br>내 탓이야. 내가 나빠.<br><br>끝은 원래 이런 거니?<br>모두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해.<br>내게 끝을 건넨 사람들도, 내게서 끝을 전해 들은 너희마저.<br><br>아냐.<br>그 말이 옳다면 <br>내 마지막이 매번 같을 리 없잖아.<br><br>나도 잘못했어. 나도 나빴어.<br>센 척했어. 착한 척도 했고. 화를 품고 행복을 빌어줬어.<br>끝을 말한 그의 진심에 거짓말로 갚았어.<br><br>있잖아, 실은 아무도 특별하지 않고<br>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거야.<br>이해는 네가 바라는 그런 게 아냐.<br>두 사람을 본 적 없는 이가 명쾌한 결론을 내린다.<br><br>나는 다시 도전하고 있어.<br>그녀가 내 생각을 깨고 반짝이며 고백한다.<br>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의 사진을 내게 보여준다.<br>만나본 적 없는 남자의 이름과 그가 기르는 불도그의 이름을 외운다.<br><br>예쁘다. 그녀는 볼수록 예뻐진다.<br>나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이제 곧 오후 아홉 시.<br>쓸모없는, 지우고 싶은 사진이 몇 장 남지 않았다.<br>그렇게 우린 서로의 뺨에 입을 맞춘 뒤 헤어진다.<br><br>너 오늘 정말 예쁘더라.<br>집에 돌아오니 그녀가 문자로 그런 말을 한다.<br>웃음이 나왔지만, <br>착각하지 않겠다고 주먹을 쥔다.<br><br>그리고 벽이 아닌 벽을 응시하며<br>지금 내가 아닌 그녀와 사랑하는 한 남자를 그려본다.<br>그 모습에 상처받지 않는 나를 들여다본다.<br><br>이름도 나이도 목소리도 모르는 그 남자를 기다려보기로 한다.<br>인연도 이해도, 처음도 마지막도 <br>입 밖에 꺼내지 않고<br>그저 평범한 나인 채로.<br><br>*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제목에서 빌려옴<br><br><br><br></font><font face="돋움">스물여섯<br><br><br><br>어제는 스물여섯 해 만에 깊은 잠을 자고 꿈을 꿨어요.<br>눈을 감자마자 보인 사람은 분명 모르는 이였는데<br>금빛 골목길에서 어찌나 그리운 모습으로 웃던지<br>가슴이 마른 강아지풀처럼 흔들렸고<br>나는 그가 곧 나를 알아보리란 걸 예감했어요.<br><br>듣지 못한 목소리를 상상했어요.<br>오래된 노래를 불러주는 목소리가 귀 옆을 떠날 수 없도록<br>내 손등을 내가 고이 쓰다듬었어요.<br><br>물이 찬 욕조에서 왼쪽으로 몸을 눕히고 왼쪽 귀만 물에 담그면<br>바다의 재잘거림이 들려요 진짜로.<br>그러니까 더는 소라를 찾으러 모래 위를 걷지 않아도 돼요.<br><br>처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스물여섯 해 전 그날의 새벽<br>내 왼쪽 눈 밑엔 작은 점 하나가 생겼고<br>오른쪽 눈은 쌍꺼풀이 더 짙어졌어요.<br>왜 나조차도 내가 지우고 싶은 걸 지우지 못하게 막는 건지<br>초를 세며 영영 이어지지 않을 동그라미와 곡선을 그려댔어요.<br><br>우리가 오늘 이렇듯 딱 한 번 어깨를 스치기 위해<br>지난 생에 몇억 번의 밤을 함께 지새웠는지 아니?<br>그 흔한 말을 기억하고 싶었어요.<br>내가 무엇을 잊었는지<br>다른 누군가가 내게 일러주길 기다리지 않고 이젠<br><br>눈을 뜨고<br>고마워 꿈에서 우리가 서로를 알아본 순간 깨고 말았네<br>하며 하나의 꿈이 부서질세라 껴안고 싶었어요.<br><br><br></font> <hr><font face="돋움"><br><br>요즘 제 주위를 보면 인연이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게.<br>계속 같은 사람이 나를 찾아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려나. 음. 아무튼, 그렇네요.<br>저는 지금 다시 도전하고 있지도 않고 그냥 보고 듣고 되새기고만 있어요. 잠도 잘 자고 꿈도 많이 꾸고.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지만.<br>말 걸어주시면 여기 있다고 대답해드릴 테니까.<br>물지 않아요.<br><br></fo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