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7 펠리페4세 입상
오늘은 벨라스케스입니다.
그는 1599년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로 유명한 스페인 세비야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이달고'계급, 즉 하급귀족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화가 중 누군들 안그랬겠습니까만 벨라스케스도 날 때부터 천재였죠. 엄청 잘 그렸습니다.
덕분에 당시 잘 나가던 화가, 프란체스코 파체코를 스승으로 모시게 됩니다.
스승도 그의 천재성을 보자마자 알아봅니다. '이 놈 물건이다!'
그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신의 딸과 제자를 넵다 결혼시킵니다. 내가 널 키워줄 테니. 넌 내 딸을 잘 키우거라~의 마인드였나 봅니다.
스승은 사위를 한 3년 데리고 있으면서 이것저것 가리킵니다. 그리곤 마드리드에 있던 올리바레스 백작에게 천거합니다.
딸을 위해 제자의 길을 터준 거죠.
올리바레스 백작은 당대의 권력자였습니다. 펠리페4세가 마드리드를 수도로 삼으려 할 때 옆에서 모든 걸 계획하고 실행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는 벨라스케스를 만나보고 얼마 후 그를 자신의 주군 펠리페4세에게 소개합니다. 자기가 데리고 있기엔 실력이 너무 뛰어났던 겁니다.
한 3년 지났나?
1623년 벨라스케스는 펠리페4세의 궁정화가가 됩니다. 24살에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황제와 그 주변을 그리며 별탈없이 행복하게 삽니다.
어쩌면 무미건조한 삶인지도 모르지만...
인생의 롤러코스터는 커녕, 인생의 범퍼카에 쭈그려 앉아 앞으로 쿵~ 옆으로 쿵~ 하고 있는 저로선 부러울 따름입니다.
암튼 그는 황제와 그 가족들을 그리면서 짬짬이 광대나 난쟁이 같은 일반사람들도 그렸습니다.
광대는 그래도 인정을 좀 받았습니다. 왕 옆에서 깐죽대려면 적절한 지성과 적절한 눈치가 필요했으니... 요즘 말로 전문직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난쟁이는 어린 왕자나 공주 옆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장난감이 되기도 하고 그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대신 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있는 사람 입장에선 한 마디로 그릴 가치조차 없는 허접이였던 거죠.
하지만 그는 그런 난쟁이까지도 그립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보통사람과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랐던 건 확실해보입니다.
1645 앉아 있는 난쟁이의 초상(세바스티안 데 모라)
뭔가 쌓인게 많아 보이는 게... 당해본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입니다. 잘 먹고 잘 입는데 뭔가 불만스러운...
왠지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누군가가 떠오르는군요.
암튼 그는 황제의 궁정화가로 살다 조용히 사라집니다.
황제의 성은을 듬뿍받아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로 임명받기도 하지만 오직 황제만을 위해 일했기에 일반대중에겐 알려질 기회가 없었던 겁니다.
덕분에 다른 거장들과 달리 그의 그림은 18세기에 와서야 평가를 받게 됩니다.
1734년 스페인 황궁에 화재가 나면서 일부 작품들이 불에 타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그때 그림들이 얼마나 소실되었는지 점검하다 감춰져 있던 그림들을 무더기로 공개하게 된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벨라스케스 하면 떠올리게 되는 '시녀들(라스 메니나스)'도 이때 발견되었는데.
이후 이런 저런 평가를 받다 푸코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가지게 됩니다. 250년만에 근대 미술의 걸작 중 하나로 등극하게 된 겁니다.
1657 시녀들
이 평범한 그림이 어떻게 걸작의 반열에 오른걸까?
겉보기엔 그저 부모 잘 만난 여자아이의 그림에 불과한데, 왜 철학이나 미학에서는 꼭 한 번씩 다루게 되는 걸까?
그건 이 그림이 그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그림을 보는 순간,
그림을 보는 관객까지도 이 그림으로 끌어당겨 이 그림의 일부분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그림은 피사체에 대한 그림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내 눈에 들어온 대상을 그리는 거죠.
나(바라보는 사람)와 대상(보여지는 대상), 주체와 객체, 노에마/노에시스의 관계가 형성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린 이 그림을 보며 자연스럽게 여기 공주가 그려져 있군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림이 처음 발견됐을 때는 가운데 셋 다 시녀들인 줄 알고 '시녀들'이라고 이름붙였으니까요.)
그리곤 마치 그것이 전부인것 마냥 믿어버리게 됩니다. 다른 건 안 보이니까요.
하지만 자세히 보면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가의 존재가 이를 암시하죠. 화가의 앞에는 커다란 캔버스가 있는데, 화가는 정면을 바라보며 이 캔버스에 무언가 그리고 있습니다.
그림을 보는 우리를 바라보며 마치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 누군가 서 있었고 그것을 그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죠.
뭐지? 이 이상한 느낌은? 하고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말로 약간 이상한 부분을 찾게 됩니다.
저 멀리 어두컴컴한 방 한 가운데, 문이 열려 있고, 문을 나가려는 혹은 들어오려는 사람이 있고, 그 옆에 그림이 하나 매달려 있습니다.
흐릿하게 남자와 여자의 상반신이 그려진 그림입니다.
벽에 걸린 다른 그림들은 다 어두운데 유독 이 그림만 밝게 빛납니다.
아마 거울이기에 빛을 좀 더 받아 빛나나 봅니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리 거울이라도 이렇게 빛날리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뭐지?
그렇습니다. 이 거울은 실재로 빛나서 빛나게 그린게 아니라 주목을 끌기 위해 일부러 빛나게 그린 거울(혹은 그림)입니다.
이런 장치는 200년 전부터 플랑드르(지금의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 그림에서 자주 사용되던 장치입니다.
그림에 그려진 장면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모습까지 함께 그릴려고, 그래서 그릴 수 없는 것까지 같이 그릴려고 만든 장치입니다.
대표적인 그림이 아래 얀 반 아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입니다.
1484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_얀 반 아이크
자세히 보시라고 그림을 좀 크게 넣었습니다.
여기서도 그림의 중앙을 자세히 보면 뒤편 벽에 거울이 걸려있고, 거울에 이들 부부의 뒷모습과 이들 앞에 있는 사제와 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뿐 아니라,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까지도 함께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벨라스케스는 이런 장치를 사용해 무엇을 보여주려 했던 걸까요?
그림과 그림의 너머에 존재하는 실재세계? 이들의 거울 같은 관계? 아니 그것보단 좀 더 나아가는 듯 합니다.
벨라스케스는 지금 황제부부를 그리고 있습니다.
'시녀들'은 그 황제부부를 알현하러 온 공주와 공주의 시녀들을 황제부부의 시점에서 그린 그림입니다.
'시녀들'의 맞은 편에는 황제부부가 있고, 황제부부의 시선이 있으며, 황제부부의 그림(시녀들에 보이는 캔버스)이 있습니다.
황제는 공주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공주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바라보는 자다. 하지만 언젠가는 타인이 나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림이란 그런 것입니다. 서구의 그림은 원근법을 기반으로 하며 원근법은 대상을 바라보는 눈, 즉 화가의 시선을 기준으로 구축됩니다.
화가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을 기준으로 이 세상을 재현(정의)하는 자입니다.
이 세상을 재현하고 정의하는 자, 마치 황제와 같은 권력을 지닌 자입니다.
보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과 비교해 본다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권력을 가졌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집트 '라'신은 온 세상을 보는 전능자였고, 그 상징이 지금 미국 1달러에 보이는 피라미드 위의 눈입니다.
본다는 건 힘이 있다는 겁니다. 달러... 이 세상 모두가 달러신님께 절하잖아요?
반면 그림은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대상입니다.
황제는 모든 권력의 정점, 시선의 정점에 서 있지만, 그림에 그려진 순간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대상이 되고 맙니다.
자신이 자랑스러워 자신을 기록하고 기념하게 만들려 했는데... 그런 내가 결국은 타인에게 보여지는 대상이 되고 만다니...
황제는 자신을 영원히 기록하고 기념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화가는 그 길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자신과 캔버스도 그림에 그려넣음으로써 그 실마리를 남겨놓습니다. 알아볼자는 알아보라는 거죠.)
황제가 영원히 자신의 시선을 유지할 수 있는 길... 그것은 자신을 숨기고 자신의 시선을 남겨놓는 것입니다.
마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처럼, 화가의 시선, 이젠 황제의 시선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는 그림을 그리는 겁니다.
비록 황제는 그려지지 않고 보이지 않겠지만, 황제의 시선은 영원히 그림으로 남게 됩니다.
관객이 그림을 바라보는 위치에 서는 순간 그는 황제의 입장에서 황제의 시선이 되어 그림을 보게 됩니다.
황제는 관객을 통해 영생을 얻고 관객은 황제를 통해 황제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겁니다.
내가 황제의 자리에 서다니~!
황제의 시선을 간파하고, 더 나아가 이걸 기획한 화가의 시선마저 간파해 내다니~!
나는 그들의 위에 서게 됩니다. 그런 짜릿함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그 자리는 화가가 마련해준 자리이지만. 이 조차도 이 그림의 장치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이 장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그저 공주를 보며 시녀를 떠올리게 될 뿐입니다. 황제의 시선을 대리하는 대리자가 될 뿐이죠.
여기서 그림의 소재가 누구인지, 그림을 바라보는 시선이 누구인지, 그림을 만든 작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이 그림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정의하는가? 누가 이 그림을 이해하고 정의하는가입니다.
당신은 어느 자리에 서고 싶으십니까?
어디까지 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
.
.
.
.
.
.
.
.
이 그림을 보면 본질을 따지는 것은 그닥 의미없어 보입니다.
이 그림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 그림? 그림의 소재? 그림을 보는 시선? 그림을 만든 작가?
본질은 본질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정의하는 시선, 주제, 물음에 의해 본질로서 호명됩니다.
예를 들어 칸트의 '물자체' 같은 겁니다. 물자체가 본질이냐 아니냐도 골치아픈 문제지만 우선 '물자체'로 설명해보죠.(아는 게 이것 뿐이라)
지구는 지구입니다. 실재하는 본질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보느냐 박쥐가 보느냐에 따라 지구의 이미지는 달라집니다.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세계와 음파로 이루어진 세계는 그 차원 자체가 틀립니다.
감각기관의 감각형식이 달라지니 본질도 달라지고 마는 겁니다.
하지만 감각기관의 감각형식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박쥐의 세계가 나와 다르다는 건 알아도 내가 박쥐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후설처럼 현상만이라도 진실하게 만들려는 시도도 실패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판단중지도 지향성에 괄호치기를 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본질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럼 본질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본질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양자역학의 전자들처럼 말입니다.
중요한 건 본질이 있냐 없냐보다, 본질을 정의하는 내가 누구냐, 내가 어떻게 정의하고 그 정의의 기준은 무엇이냐를 밝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언젠가는 본질이 밝혀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본질을 알 수 없습니다.
정말로 본질을 밝히고 싶다면 그것부터라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읊조리게 되네요.
'너 자신을 알라',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둘 다 소크라테스의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