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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4 15:3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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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설명]
조수미
1962년생. 대한민국의 리릭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한국 성악의 아이콘, 신이 내린 목소리.
서울대 성악과 수석입학. 이후 이탈리아로 유학하여 산타 체칠리아 국립 음악원(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학교 중 하나. 조수미 말고 엔니오 모리코네, 체칠리아 바르톨리 등을 배출) 5년제 학교를 2년만에 조기졸업함. 이후 다 적지 못할 만큼 많은 상을 휩씀. 수많은 콩쿨 수상을 비롯, 황금기러기상 (이탈리아 최고 소프라노에게만 수여), 국제 푸치니상(이탈리아인이 아닌 사람으로 세계 최초 수상) 그밖에 수많은 공연과 음반활동을 해 왔으며(솔직히 다 적는게 죄송스러울 정도), 사회활동도 열심임
원래 이름은 조수경이었으나 외국인들이 이름을 잘 발음 못해서 '수미'로 개명했음.(영문 이름을 만들지 않고 한글 이름을 만들었음) 글 배우기 전부터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고 하며, 원래는 피아노를 전공하려고 했으나,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선화예중 유병무 선생님이 만명에 한명 있을 목소리라고 적극 권해서 성악으로 전공을 바꿈. 피아노와 관련된 일화 중에 서울대 입시 실기시험을 보러갔을 때 연주자가 오지 않아 시험감독관 교수가 반주자를 찾자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서 60명의 반주를 다 해주고 마지막 자기 차례에 스스로 반주치면서 노래부르자 교수들이 실력에 뻑가서 학과 개설 사상 최고 실기점수로 입학함.
사실 조수미의 집안은 그렇게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음. 피아노를 배울 때도 셋방살이하던 부모가 피아노는 사줘서 연습할 수 있었으며, 유학을 비행기값이 없어서 못갈 뻘한 적도 있었음. 유학 가서도 식사를 제대로 챙겨먹지 못해서 어디 초대받은데 가서 음식 왕창 먹고 남는건 싸가지고 와서 먹기 일수였음. 그러다가 심각한 빈혈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고 함. 집도 성악연습을 할 수 있는 집을 찾지 위해 1년에 몇차례씩 이사를 다녀야 했으며, 집에서부터 학교까지 한시간이 넘는 거리를 지옥같은 이탈리아의 교통을 헤치고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고 나면 뻗기 일쑤였다고 함.
또한 유학생활중 인종차별도 알게 모르게 많이 받았다고 함. 조수미가 유학을 했던 1980년대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아예 모르는 서양인이 부지기수였고 비행기 탈 때마다 여권 체크에 걸리기 일쑤였으며, 오패라 배역을 받을 때도 '금발머리의 유럽형 외모가 낫지' 라며 불이익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고 함. 조수미는 이 때 '한국이 빨리 유명해져야겠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후 자신이 유명해 진 이후에도 한국에서 국제적인 행사가 있으면 가능한 한 참석하려고 했다고 함. 그러다 보니 2002 한일월드컵이나 여수엑스포, 평창동계올림픽 홍보대사 같은 것도 흔쾌히 맡아주었으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당시에도 성모대축일 미사 전 환영행사에서의 공연과 교황집전미사중 성가를 부르기도 함 (조수미는 원래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영예로운 일이었을 것임)
세계 클래식계에서 조수미의 위상은 어마어마함. 동양인 최초로 국제 콩쿠르 6개를 석권했고, 세계 5대 오페라 극장에서 주연으로 공연한 동양인 최초의 프리마돈나 기록도 가지고 있음. 위에서 언급한 카라얀이 "그녀의 목소리는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라는 찬사부터 비롯해서(이후에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자산이다'라는 말도 했음) 플라시도 도밍고는 "조수미가 최고 역량의 소프라노라는데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라고 평가했었음. 그밖에 "그녀의 음악 세게에는 영혼이 깃들여 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이상 비평을 넘어섰다."라는 이야기도 들었음.
그녀의 위상에 대한 일화 중에 IMF시절 주불 한국대사가 프랑스 대기업 총수들을 모아서 지원을 호소하려고 했는데 어려움을 겪자 조수미에게 SOS를 쳤다고 함. 이후 주불 한국대사가 '조수미의 독창회가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한다고 하자 그렇게 모으기 어려웠던 대기업 총수들이 부부동반으로 참석했다는 일화도 있음.
앙드레 김과의 일화도 있음. 앙드레 김이 어느날 조수미의 공연을 보고 '드레스가 너무 형편없다'라며 (위에서 언급했듯 조수미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어서 한벌에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드레스를 구하기 어려워서 시장에서 원단을 끊어 연주회용 의상을 직접 만들어 입었다고 함) 조수미에게 직접 연락해서 드레스를 지원해 주기로 함. 그 이후 20여년간 200벌이 넘는 드레스를 지원해 줬음. 그런 인연 때문에 앙드레김이 사망하자 당시 해외에 있던 조수미는 자기 모든 스케줄을 스톱시키고 한국으로 돌아와 고인의 빈소를 계속 지켰다고 함. 조수미는 나중에 한국 디자이너의 한국미가 넘치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공연하는 것이 늘 자랑스러웠으며, 공연 끝난 후 드레스가 너무 예쁘다고 어느 디자이너 작품이냐고 사람들이 물어봤을 때 정말 뿌듯했다고 함.
또한 조수미는 엄청난 축덕으로도 유명함. AS로마의 광팬이고 토티의 팬으로도 유명함. 유로 대회때는 이탈리아를 응원한다고 하기도 함. 유로 2012때 선발로 나온 발로텔리가 부진하자 '나같으면 디 나탈레를 투입하겠다' 고 트윗을 올렸는데, 이후 교체투입된 디 나탈레가 귀신같이 선제골을 넣어서 "축잘알" 이라는 찬사도 들었음. 2002 월드컵때 월드컵 응원가인 "Champions"를 발표해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