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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9 02: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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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실 그날의 기억이 분명치 않습니다. 분명 아침 누군가에게 배가 침몰한단 소식을 듣고 별 일 아니겠지, 작은 유람선이나 뭐 그런게 유원지에서 사소한 사고가 난 해프닝 정도인가 하며 뉴스를 켰고 생각보다 훨씬 큰 배가 생각보다 훨씬 큰 사고가 났단걸 알았지만 전원 구조됐단 소식에 다행이다 하고 넘겼던 기억까지는 납니다. 그러나 이후 그게 오보였단 황망한 소식에 충격을 받고 그냥 다 거짓말 같고 현실감각이 없어진 이후 그날 제가 뭘 했는지 더이상 자세한 기억이 나질 않아요.
다만 엄청난 충격 속에서 그래도 희망을 붙잡고 간절히 간절히 구조 소식이 이어지길 기다리며 초조하게 뉴스를 시청한 그 날의 그 기분, 그 느낌만 생생하게 기억날 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그날 제가 정확히 뭘 했는가를 말하라면 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냥 말그대로 충격과 혼란과 슬픔과 분노와 그래도 일말의 희망과 기대 속에 전전긍긍했던 그 감정만 기억날 뿐이거든요.
평범한 국민의 한사람인 저는 이럴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날의 충격이 그만큼 엄청났으니까요.
그러나,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할 대통령이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럴수는 없습니다. 대통령은 그 어떤 이유로도, 한낱 필부일 뿐인 저 처럼 그날의 본인 행적을 기억하지 못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그것이 심지어 저처럼 너무나 큰 충격에 공황상태가 되어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라 한들, 대통령은 그래서는 안됩니다.
거대한 재난 앞에 수많은 국민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진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만약 대통령이 충격과 공황 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래서 심지어 당일의 기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이는 대통령으로서의 자격 상실입니다. 만약 이렇다면 대통령으로서의 자리를 내려놓고 저처럼 필부의 위치로 내려와야 마땅한 일이지요. 이는 대통령 변호인단이 탄핵소추의 다른 이유들에 대해 변명하는 '실제 위법 사실이 증명 되었냐 아니냐'와 별개로, 대통령으로서의 심각한 자격미달과 그로 인한 대재난 방치, 이로 말미암은 수많은 국민들의 사망 사태 야기, 이것만으로 이미 탄핵 사유가 충분히 넘치고도 남는다는 것이죠.
게다가 대통령이 밝힌 그날의 행적을 보면, 저처럼 충격과 혼란, 공황으로 인해 아무것도 못했다거나 기억조차 제대로 못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머리를 만졌다니요. 그게 몇십분'밖에' 안 걸렸다는둥 몇시간'씩이나' 걸렸다는 둥 그런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재난 앞에 수백명의 국민이 목숨을 잃어가는 그 위급한 순간에 공황에 빠져 아무것도 못하고 기억조차 못했다 해도 대통령 자격 상실인데, 태연하게 일상을 보내며 그런 것들을 기억하고 있다고 제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더이상은 밝힐 수 없다며 그럼에도 자신이 국민 보호에 최선을 다한 것만은 분명하니까 믿으랍니다.
못 밝혀낸 7시간의 나머지 부분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스스로 밝힌 조금의 시간들조차도,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공감능력마저 결여된듯 보이는 태연한 일상적 행보들로 채워져 있으면서 국민 구조에 최선을 다했다구요?
누누히 말하지만 대통령이 그 7시간동안 뭘 했는지를 그렇게 꽁꽁 숨기는데, 그것을 밝히는데 힘 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그 7시간동안 무엇을 '안 했느냐'이고, 그것은 이미 훤히 드러난 사실이니까요.
대통령이 그 7시간, 수백의 국민, 수백의 아직 꽃피우지도 못한 우리 아이들이 차가운 바다 속으로 침몰해가는 그 피눈물 나는 7시간 동안 머리를 만졌는지 늦잠을 잤는지 관저에서 책상에 앉아 있었는지 침대위에서 굴러다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목숨걸고 최선을 다해야 할 총 책임자로서의 대통령이 출근조차 하지 않고 법적 제도적 절차를 통해 정해진 업무 프로세스를 하나도 진행하지 않아놓고 재택근무 운운하는 같잖은 변명이나 일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탄핵 백번은 더 당해 마땅한 대통령 자격상실입니다.
뇌물과 국정농단 헌정질서 유린 등등 다른 수많은 탄핵 사유들과 별개로,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탄핵 인용에 아무런 토를 달 수 조차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