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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9 13: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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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매 이닝 무슨 일이 벌어질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경기가 재미있는 경기이긴 하겠지만, 그런 경기는 양 팀 투수진에 '변수'가 많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고 투수진이 막강한 두 팀이 만났을 때는 이뤄지기 힘든 매치입니다. 야구가 투수놀음이란 말이 왜 있냐면, 투수가 강력할 수록 변수가 적어지고 예측가능한 경기가 이뤄지기 때문이죠. 강한 투수진은 팀의 경기에서 예측 불가능한 부분을 제거하고, 경기를 자신들의 예상과 계획하에 이뤄지게 만듭니다. 소위 '경기를 지배한다'는 걸 가능하게 해주는거죠.
소위 야구팬들이 재미있다고 이야기하는 '매 이닝이 승부처'인 경기가 나올 조건은 생각외로 까다롭습니다.
양팀 투수들이 모두 불안해야 합니다. 어느 팀 투수든 간에 '얘 나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라는 투수가 있으면 안됩니다. 있더라도 체력이 고갈됐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해서 불안한 요소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게다가 한쪽 팀 투수들만 그래서도 안됩니다. 양쪽 팀 투수들이 모두 단체로 상태가 '맛이 가있어야' 가능합니다. 이 와중에 양팀 타선도 한번에 대량 득점낼 수 있는 찬스에서 한두점 밖에 못 뽑거나, 아쉽게 계속 찬스를 놓치거나를 반복해야 합니다. 어느 팀이던간에 찬스를 너무 확 살려버려 대량 득점을 해버리면 그 순간 그 경기는 원사이드 게임으로 흐르며 긴장감이 확 죽어버리죠. 7:2, 9:5 뭐 이런 스코어는 이기는 팀 팬을 제외하곤 별다른 재미를 못 느낄 점수차니까요.
이런 조건을 만족시킨 포스트시즌 시리즈도 흔치 않습니다. 가깝게는 작년 삼성vs두산의 플레이오프가 이런 경기였는데요, 두산은 준PO에서 5차전까지 가는 승부끝에 투수진 체력소모가 극심했고, 삼성은 시즌 중 선발에 구멍이 생겨 불펜들이 체력을 많이 소진한 상태였죠. 양 팀 다 이름값으로는 매우 훌륭한 투수들을 가졌지만 체력적으로 언제 퍼질지 모르는 폭탄같은 상황에서 붙었으니 아슬아슬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점수차의 살얼음판 경기들이 가능했습니다. 8개구단 팬 모두가 손에 땀을 쥘만한 경기였죠.
하지만 이런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대다수는 뭐 그냥 한쪽이 일방적으로 쥐어 터지는 경기가 나오게 마련이니까요. 그보다는 더 자주 나오는 케이스가 훌륭한 투수진을 갖춘 팀끼리 한두점 싸움을 벌이는 경기들입니다. 투수진이 좋은 두 팀이 맞붙으면 어느 한 팀이 대량 실점을 할 가능성이 극히 적고, 누가 선취점을 내느냐, 누가 한두점 리드를 잘 지켜내느냐에 승패가 달린 경기가 되죠. 엎치락 뒤치락하는 경기가 매 이닝 양팀의 분위기가 이쪽 저쪽으로 뒤집히는 주기가 짧은 경기라면, 팽팽한 투수전은 그렇게 분위기가 뒤집어지는 주기가 비교적 긴 경기입니다.
이런 경기에선 별 소득없이 흘러가는 많은 이닝들 속에 딱 한두차례의 찬스가 오게 마련이고, 그 찬스를 누가 살리느냐가 가장 중요한 경기입니다. 막 말로 그 '찬스의 1~2이닝'만 모아서 봐도 그 경기에서 볼 거 다 본 셈 치는 경기죠. 어느 팀이 찬스가 왔느냐, 거기서 점수를 냈느냐, 냈다면 다음 수비때 상대팀이 바로 반격을 해 따라 붙으며 분위기 반전을 시켰느냐, 아니면 찬스에서 점수를 못내고 놓쳤느냐, 못 냈다면 다음 수비때 상대팀이 바로 분위기를 가져 가느냐가 이런 경기의 관전 포인트입니다.
야구가 '위기 뒤에 찬스'가 찾아오는 경기다보니 좋은 찬스를 맞았을때 일수록 그때 점수를 못내면 바로 다음 수비 시작할때 마음이 상당히 불안해 집니다. 반대로 위기가 찾아왔을때 위기의 크기가 클 수록 불안함도 커지지만 '이번에 막으면 반드시 찬스가 온다'하는 기대감이 들게 마련이죠. 투수진이 강력한 두 팀간 경기에선 이런 불안과 기대가 더 커집니다. 솔직히 1,2점 나는 투수전에서 경기 보는 맛은 이게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무사 2,3루 찬스에서 한점도 못내고 답답하게 공격을 끝낸 다음 수비 시작할때, 팬의 마음은 타들어갑니다. 아무리 잘 던지던 투수라도 이 상황에서는 마음이 흔들리게 마련이니까요. 헌데 그 수비를 탈삼진 포함 범타 유도하며 삼자범퇴로 깔끔히 막아냅니다. 타격전 좋아하는 분들 보기엔 그냥 재미없게 삼자범퇴 이닝 하나 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투수전 좋아하는 이들의 눈에는 '상대방에게로 경기 분위기가 넘어가려는 것을 투수가 힘을 앞세워 짓밟아버렸다'는게 보입니다. 반대로 무사 2,3루의 위기가 찾아왔다면 보통의 경우 1점으로 막으면 매우 잘한것, 2점 주면 그냥 보통, 연타 두들겨 맞으며 대량실점하면 망한것 정도로 보겠지만 그걸 또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기적'을 만드는 투수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투수들이라고 매번 위기를 다 넘겨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기대를 품음직한 선수들이죠. 투수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무실점으로 아웃카운트 3개를 잡아내는 것이 팀 간판타자가 만루홈런 치는 것만큼의 쾌감을 선사하는 일입니다. 경기 분위기의 흐름을 투수의 힘을 이용해 확 끌어오는 일이니까요.
팽팽한 투수전의 묘미는 실제 점수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분위기 점유'의 싸움에 있습니다. 어느팀이 경기의 분위기를 자신들의 것으로 가져가느냐의 치열한 싸움이죠. 단 한점의 점수가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경기이기에 경기 후반부에선 딱 한점을 도망가려는 리드한 팀과, 그걸 막고 딱 한점을 따라잡겠다는 리드당한 팀의 신경전이 어마어마합니다. 한 두번의 결정적 삼진, 한 두번의 기가막힌 수비 혹은 실책으로 경기가 결정나기에 살얼음판 같은 긴장과 집중이 이어지죠.
점수도 많이 안나고 너무 예측 가능한 경기들이라 재미없다고 하시는 분들은, 오히려 예측이 가능하고 변수가 적기에 그 적은 변수가 언제 어디에서 툭 튀어나와 예측을 뒤집을지 잘 쫓아가며 경기를 보면 의외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겁니다. 누가 봐도 분위기가 넘어갔다 싶은 순간에, 타격이 아닌 투수력과 수비력으로 분위기 반전을 시켜내는 포인트는 잘 눈여겨 보지 않으면 휙 놓쳐버리기 쉽상이거든요..
아마 이번 시리즈에서 투수전이 아닌 '변수 투성이의 예측불가 게임'이 벌어지려면 4~5차전이 아니라 6~7차전까지 갔을때에나 나올 것 같습니다. SK불펜진의 체력이 완전 고갈되고 삼성 투수들도 비축해둔 체력이 바닥날 때 쯤 되어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