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던 친구 놈은 무슨무슨 나라로 이민이 결정됐다며, 나에게 이별주를 사겠다고 했다. <div><br></div> <div>언제나 팍 썩은 양파마냥 우중충했던 친구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듯 막 개화한 진달래 빛이었다.</div> <div><br></div> <div>항상 이슬만 고집하던 우리의 술판이 어쩐 일인지 듣도 보도못한 곡주들로 채워졌다. </div> <div><br></div> <div>알탕? 파전? 과일? 역시 그래도 이별주니 삼겹살 정도는 먹어야겠거니 하고 간 식당은 한우집이었다.</div> <div><br></div> <div>"힘내 쨔샤, 난 질려서 도망가는거고, 넌 남아서 싸우는거라고 생각해"</div> <div><br></div> <div>친구는 덕담인듯 덕담아닌 덕담같은 말을 전한다. </div> <div><br></div> <div>왜 그랬을까? </div> <div><br></div> <div>생전 장난으로만 하던 단어가 어째서 진심이 담겨 나왔던걸까?</div> <div><br></div> <div>"개새끼"</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술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올 무렵 계속 히죽대던 친구놈이 갑자기 진지하다.</div> <div><br></div> <div>진지한 눈빛으로 가득찬 술잔을 응시하던 친구가 무겁게 입을 땐다.</div> <div><br></div> <div>"늦기 전에.. 너도 준비해"</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2002년 고3이었던 우리들은 누구보다 이 나라를 사랑했다. </div> <div><br></div> <div>공부에 치여, 항상 16강 출전을 부르짖던 월드컵에 별 관심이 없었다.</div> <div><br></div> <div>막상 16강에 나가자, 누군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던 고3의 저녁을 바쳐 시내로 뛰쳐나갔었다.</div> <div><br></div> <div>대한민국을 부르짖던 그와 나와 친구와 친구들은 그 순간 조선의 백성이었고, 독립운동가였으며, 호국의 화신이었다.</div> <div><br></div> <div>"대한민국 만세다! 우리 지금 느낌 잊지말자."</div> <div><br></div> <div>그리고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친구는 그 느낌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아니, 봉인했다.</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나도.. 가고야 싶지..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진 않아..니가 제일 잘 알면서 그러기냐?"</div> <div><br></div> <div>자조 섞인 말에 진지하던 친구의 눈동자에서 빛이 난다.</div> <div><br></div> <div>"쉽지 않지만, 여기서 계속 사는 것보단 쉬울껄?"</div> <div><br></div> <div>동의한다. 아니 격렬히 동의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div> <div><br></div> <div>하지만 그 동의 너머에 있는 '나' 라는 자아는 여러 이유를 들어 결국 나를 설득할 것이다. </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우리는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div> <div><br></div> <div>친구에게 그래도 떠나고나면 그리운 것들이 많지 않을거냐고 물었다.</div> <div><br></div> <div>어느 매체에서 본 기억으로 외국에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는 둥, 김치와 고추장 된장이 너무 그립다는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div> <div><br></div> <div>친구는 술병을 들고 자기의 잔을 채운다.</div> <div><br></div> <div>"그립겠지. 많이."</div> <div><br></div> <div>"그러면 가끔 왔다갔다 하면 돼겠네? 뭘 이별주냐? 청승맞게"</div> <div><br></div> <div>살짝 넘칠정도로 잔을 채운 친구는 그 잔을 조심성없이 들어 목구멍에 털어내듯 술을 입 안에 던진다.</div> <div><br></div> <div>"그런데 그리움보다 더한 증오랄까.. 공포랄까.. 그때가봐야 알겠지만, 아마 스스로 여기에 돌아오진 않을거 같아"</div> <div><br></div> <div>이녀석은 항상 진지하게 진심을 말할 때 오른쪽 눈썹이 씰룩거린다. </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너도 생각있으면, 나 있는대로와 이 형님이 기반 잘 닦아놓을테니"</div> <div><br></div> <div>짐짓 유쾌하게 이별을 고하는 친구의 너스레에 의미없는 히죽임으로 입을 연다.</div> <div><br></div> <div>"이 정부가 싫어. 그리고 이 정부를 뽑아준 사람들도 싫고. 하지만 나는 정부가 싫은거야. 이 나라는 좋아"</div> <div><br></div> <div>친구가 눈을 맞춘다. </div> <div><br></div> <div>마주친 눈의 오른쪽 눈썹이 씰룩거리다 못해 파르르 떨린다.</div> <div><br></div> <div>"그래.."</div> <div><br></div> <div>동의인지, 긍정인지, 포기인지 모를 대답이 나왔다. </div> <div><br></div> <div>그리고 그는 샐쭉 웃는다.</div> <div><br></div> <div>그 웃음이 친구를 향한 신뢰일까?</div> <div><br></div> <div>알아서 하라는 포기일까?</div> <div><br></div> <div>아니면 비웃음일까? </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거의 언제나 인사불성 직전까지 갔던 우리의 술자리는 겨우 한 병반 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끝났다. </div> <div><br></div> <div>"가서도 연락해. 잘 지내고"</div> <div><br></div> <div>의례적인 인사에 친구는 웃어준다. </div> <div><br></div> <div>"똥이 더러우면, 치우든 피하든 안 마주치면 끝이야. </div> <div><br></div> <div>그런데 온 세상이 똥이면, 도망가야해. 도망가는 건 나쁜 게 아니야. 그것도 인간이 가진 훌륭한 생존의 방식이거든. 언제든 환영이다."</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집에 들어와 언제나처럼 하던 커뮤니티에 접속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 영어회화 서적을 넘겨본다.</div> <div><br></div> <div>스르륵거리며 넘어가는 종이들이 손에 익는다.</div> <div><br></div> <div>수많은 형광팬 자국들로 걸레가 된 듯한 책장 사이사이 마다 근심과 희망이 묻어있다.</div> <div><br></div> <div>하지만 스스로도 알고 있다. </div> <div><br></div> <div>이 자국들은 결국 도망에 필요한 지식이 아니라. 노예로써 갖춰야 할 지식이 될 거란 걸.</div> <div><br></div> <div>회화책을 덮고, 옆에 있는 가계부를 펼쳐든다. </div> <div><br></div> <div>꽤나 사회생활을 했는데도 아직 학자금 대출이 많이 남아있다. </div> <div><br></div> <div>전세 대출과 자동차 대출. 생명 보험과 상해 보험, 주식과 적금들.</div> <div><br></div> <div>스스로 나온 한숨이 무겁다. </div> <div><br></div> <div>가난한 돈의 흔적은 형벌이다. </div> <div><br></div> <div>언제 끝날지 모르는 형벌에 대해 언제나의 소감은 같다.</div> <div><br></div> <div>"씨발" </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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