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 target="_blank" href="http://cafe.daum.net/shogun" target=_blank><U><FONT color=#0066cc>http://cafe.daum.net/shogun</FONT></U></A>의 마법의활 님이 쓰신 글입니다.</P> <P> </P> <P>보통 역사책들을 보면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은 단 두 개로 요약됩니다.</P> <P>"기독교 공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건립 - (천도!)"</P> <P></P> <P>...........물론 시험 볼 때는 답안에 저것들을 채워넣어야겠지만, 실상과는 거리가 좀 멉니다. </P> <P></P> <P>이유인즉슨, 세계사 교과서에는 아무래도 예전 서구 학자들의 업과만 업데이트되어있고, 현대의 수정된</P> <P>보다 올바른 시각을 넣으려면 좀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P> <P></P> <P>(대표적인 것이 황제 교황 주의에 대한 오해입니다. 저 역시 이에 대해 상당히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P> <P>정교회 까페를 들어가서 몇번 물어도 보고, 관련 내부 게시물들을 보면서 다른 비잔티움 관련 서적들과 대조해본 후에야 좀 이해가 되더군요. -아쉽게도 정교회 까페는 현재 폐쇄 상태입니다. (-_- ) - )</P> <P></P> <P>제 생각으로는 시오노 나나미 때문에 이마저도 상당 부분 늦을 것 같지만...여튼 계속해봅니다. </P> <P></P> <P>언급할 것은, <STRONG>로마 제국의 운영 소프트웨어 "기독교"의 완전한 인스톨은 결코 콘스탄티누스 때 완결되지 않았으며,</STRONG></P> <P><STRONG>콘스탄티누스는 아예 이걸 자기 시대에 인스톨이 가능하리라고 믿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STRONG></P> <P>(바로 여기서 콘스탄티누스의 천재적인 정치 감각이 입증되는 동시에..... 이 사람이 죽을 때의 그 마지막 순간을 제외하면 결코 독실한 진정한 크리스트 교도가 아니었다는 것 또한 입증되겠습니다. -_- ) </P> <P></P> <P>313년에 리키니우스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운영 소프트 웨어 기독교의 인스톨이 그때에야 들어갔다는 데 있습니다. 0%, 1%, 2%....<STRONG>하지만 바로 그게 중요했습니다. </STRONG></P> <P></P> <P>물론 콘스탄티누스 이전에도 기독교를 공인하거나 묵인한 황제는 많았습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황제들 개인의 성향이나 취향에 따른 문제였지 뭔가 공적으로 적법한 "로마 법적인 절차" , " Res Publica"의 인증을 받은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P> <P>(누군가는 Res Publica 와 Familia가 종심 방어 전략의 확립과 기독교로 다 무너졌다고 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P> <P>아닙니다. -_- )</P> <P></P> <P>때문에 이건 차후로 황제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달라질 여지가 있었습니다.</P> <P>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와서 이것이 법적으로 공인이 되어서, 설령 후대에 이교도 황제가 나오더라도 저것을 뒤집으려면</P> <P>상당 부분 위험을 감수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기독교도 황제가 나오면 저 공인에 이런저런 조건을 붙여서 강화가 가능하게</P> <P>끔 되었지요. 인스톨 과정의 완성입니다. </P> <P></P> <P>즉 예전 디오클레티아누스 때처럼 무작대기로 "넌 기독교인 = 무법자, 고로 법의 심판을 받아라!"가 안 통하게 되었습니다.</P> <P>이후의 율리아누스도 이 장벽 때문에 자신의 바램을 실천하는 데 상당한 부담을 느꼈으며, 율리아누스 이후로도 실은 완전한 이교도 황제가 한 번 더 등장하지만 그는 그냥 술주정뱅이 임포텐쯔로 역사에 남는 불명예밖엔 누리지 못했습니다. </P> <P></P> <P>다시 콘스탄티누스로 돌아와보면.....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무병 장수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P> <P>여전히 이교 세력이 강세였고 제국을 돌리는 운영 체제는 기독교 인스톨이 한 70 80 넘기 전에는 이교도가 기본 베이스겠지만, <STRONG>뭐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STRONG></P> <P></P> <P>자기 죽은 다음에 인스톨 %가 어느 정도만 넘으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그 예상은</P> <P>맞아떨어졌습니다만..........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P> <P></P> <P><STRONG>인스톨 폴더를 어디에 설치할 것인가? </STRONG></P> <P></P> <P>어쨌든 제국의 행정 수도를 어딘가에 건립할 필요는 있었습니다.</P> <P></P> <P>다만, 로마는 애초부터 탈락. </P> <P>애초에 로마가 행정 수도 노릇을 못하게 된건 이미 3세기때부터 증명된 사항이라 그건 이미 얘깃거리가 아니었습니다. </P> <P>설혹 로마에 기독교도가 콘스탄티누스 시대보다 100배는 더 많았을지라도, 이교 유적이 없었어도, 콘스탄티누스가</P> <P>로마에 다시 행정 기능을 되돌리는 등의 일은 여러 요건상 불가능했습니다. </P> <P></P> <P>그러나, 로마 시민들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야! 전통의 수도를 무시할 거냐? 이제 나라도 태평하니 과거의 영광을 돌려달라!</P> <P></P> <P>인스톨을 그냥 예전 인스톨 폴더에 겹치기 해랏! 이 되겠습니다. </P> <P></P> <P>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다소 생각이 달랐습니다. </P> <P></P> <P>"니미..........겹치기 했다가 뻑나면 니들이 책임질겨? 속도 존내 안 받쳐주는 로마 파티션으로 뭐 어쩌라고? "</P> <P></P> <P>그러나 대놓고 이 말을 할수는 없는 법. 제아무리 콘스탄티누스라도 제국 수도를 옮긴다는 청천 벽력의 말을 했다간....</P> <P>모가지감이 너무 뻔했습니다. 이건 독불장군 내공으론 콘스탄티누스에 결코 뒤지지 않았던 디오클레티아누스도</P> <P>끝내 할 수 없었던 짓이었지요.</P> <P></P> <P>하지만...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했던 구라 방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P> <P>"당분간 분할 파티션으로 부팅했다가 로마 파티션 파일을 슬슬 다른 파티션에 백업하는 거야...폴더만 살려두면 지들이</P> <P>뭘 알겠어? 폴더 안은 나만 볼 수 있는 내용인데...힛힛힛"</P> <P></P> <P>해서.....그래서 어느 파티션에 인스톨 할거냐?</P> <P>이번에 인스톨할 파티션은 기독교 인스톨을 잘 백업해주는 동시에 그 자체로도 우수한 하드 성능을 발휘할 그런 데를</P> <P>선택해야만 했습니다. </P> <P></P> <P>1안. 실상은 니코메디아가 모든 면에서 가장 우수하고 유력한 후보 중 하나였습니다. </P> <P></P> <P>디오클레티아누스가 4분 통치할 때 심혈을 기울여 건설해두어 인프라는 이미 완비된 상태였고, </P> <P>이 곳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다른 꼬붕 황제들을 컨트롤했기 때문에 소통이라면 그것또한 큰문제가 없었습니다.</P> <P>아시아와 유럽을 모두 통제할 수 있다, 는 조건도 동일. 기독교인도 많고.</P> <P></P> <P>그러나..........</P> <P></P> <P>"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영감태기하곤 달라!"</P> <P></P> <P>2안. 해서 선택된 곳은, 비잔티움이었습니다. </P> <P>2안이 1안보다 나은 점은..... </P> <P></P> <P>1. 심시티를 즐길 수 있다. </P> <P></P> <P>요게 제일 좋은 점이었지요. 그리고 다른 점도 하나.</P> <P></P> <P>"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하나님께 봉헌했다"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P> <P>니코메디아는 그렇게 못하죠. </P> <P>"니코메디아를 봉헌했......... <- 이 새X야, 몇백년 역사 니코메디아를 네가 다 만들었냐? "</P> <P>(여담이지만 엠비우스 분봉왕이 이점에서 누구보다 몇 배는 더 위대합니다.)</P> <P></P> <P>2. 뻥치기 하기에 좋다. (언덕이 거기도 일곱 개고 신께서 나한테 새로운 도시를 지으라고 등등등등....-_-)</P> <P></P> <P>근데 2안에는 중대한 결점이 있었습니다. </P> <P></P> <P>돈이 존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은 가족의 피가 묻은 손으로 행해졌다는 데 암운이 있었습니다. </P> <P></P> <P>ps. 여담입니다만 그 세베루스 황제가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물리칠 때 비잔티움을 파괴하는 삽질만 안 했다면....</P> <P>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P> <P></P> <P>그 전에는 여기가 니코메디아 못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이 없었다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필시 비잔티움을</P> <P>자기 수도로 택했을 겁니다. </P> <P></P> <P>..............</P> <P></P> <P>근데 아니네. 그랬다면 니코메디아를 택했겠군요. -_- </P> <P>......왜냐하면 황제의 손에 친아들의 피가 묻어있었기 때문입니다. </P> <P>크리스푸스의 제거인데, 크리스푸스가 황제인 아버지보다 위명이 높아지니까 제거했다는 식으로 누구는 얘기하지만,</P> <P>콘스탄티누스는 그 정도로 구제불능의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P> <P></P> <P>다만, 이건이라면....</P> <P>콘스탄티누스가 죽인 막시미아누스의 딸, 파우스타에게 죄를 물을 수 밖에는 없겠습니다. </P> <P></P> <P>파우스타는 비록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와 오빠를 죽였지만 여전히 콘스탄티누스에게 충성했고, 그 결과는</P> <P>많은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파우스타가 왜 콘스탄티누스에게 충성했을까? 그건 콘스탄티누스가 결국 그녀의</P> <P>자식들에게 제국을 상속할 거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P> <P></P> <P>근데 크리스푸스가 갈수록 위명이 높아지니 이건...... </P> <P>파우스타는 베갯밑 공사로 크리스푸스를 갈리아 지역 담당 카이사르에서 해임시키고 그 자리에 자기 큰아들을</P> <P>올려놓는데, 결국 제거에는 실패한 모양입니다. </P> <P></P> <P>콘스탄티누스가 정말로 크리스푸스에게 위협을 느꼈다면 해임한 그 단계에서 바로 살해를 하거나 구금헸어야 합니다.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를 죽일 때 그렇게 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벨리사리우스에게 그렇게 하려했고, 유스티누스 2세가 그런 식으로 나르세스를 쳐냈습니다. -죽이지는 못했지만-</P> <P></P> <P>그래서 그 다음 단계. 자신과의 불륜 관계였다고 속이는 것. 콘스탄티누스는 욱하는 성질이 다분한 인간이었기 때문에</P> <P>이런 식으로 자극하는 게 아주 효과적이었지요. 해서 크리스푸스가 단박에 죽었지만, 콘스탄티누스도 실상을 깨달았고,</P> <P>파우스타에게 신속한 죽음을 내립니다. 결국 파우스타도 제거. </P> <P></P> <P>해서 남은 게 골칫덩이 철부지들이었는데...이건 일단 나중에. </P> <P></P> <P>아직 안 다룬게 있어서 그걸 짚고 넘어가도록 합니다. </P> <P></P> <P>........콘스탄티노폴리스 건립 외에 콘스탄티누스의 중요한 업적으로 꼽히는 것이, 니케아 공의회의 개최입니다. </P> <P></P> <P>니케아 공의회에서 당시 선풍적으로 밀어닥치던 아리우스 파가 이단으로 단죄되었고, 아타나시우스 파로 알려진</P> <P>삼위일체가 정통 교리로 채택되었습니다. </P> <P></P> <P>다만 여기서도 나올 수 밖에 없는 모작가 얘기.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모 작가의 해석이</P> <P>문제가 되는 건 ,<STRONG>콘스탄티누스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데 있습니다. </STRONG></P> <P></P> <P>무슨 행위를 했다하면 그 모두에 심층적인 배려가 있었다고 해석을 하는 건데 </P> <P></P> <P>(..<EM>...<STRONG>유명한 예:</STRONG> 카이사르가 빚을 많이 진 것은 크라수스에 대해 강자의 입장에 서기 위해서다!!!! </EM></P> <P><EM></EM></P> <P><EM>아....이거 진짜...... 미안하지만 이건 박조께서 일제 국민학교 다니실 때 뒤에서 삼등 한것을 두고 황민화 교육에 대한</EM></P> <P><EM>저항으로 해석한 갑제 본좌의 해석과 거의 같은 수준이라고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_- </EM></P> <P><EM></EM></P> <P><EM>그때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빚을 변제받을 능력이 없는 놈이 자꾸 빚을 얻으러 오면 끝내는 몸으로 때우도록 하는 건</EM></P> <P><EM>동서고금 마찬가지입니다. 실상은 크라수스가 카이사르에게 투자를 했던 것임에 불과합니다. </EM></P> <P><EM><STRONG>이런 식의 투자는 크라수스 말고도 고대의 부자들이라면 누구나 했던 방식입니다. )</STRONG></EM></P> <P></P> <P>그리스어도 어눌했던 콘스탄티누스가 자기도 이해 못하는 유의 교리 따위가 정통 교리로 채택되는 게 마땅하다고</P> <P>생각했다는 이건 어불성설의 얘깁니다. </P> <P>실인즉슨,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교리가 국가 통합에는 더 유리합니다. </P> <P>핵심 문제에서는 대단히 간단명료한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유태교를 생각해보면 나오는 결론입니다. </P> <P></P> <P>콘스탄티누스 같은 경우도 이해하기 쉬운 아리우스의 교리에 마음이 더 기울어져있었고요. </P> <P>(성자는 성부와 동등한 신이 아니며, 성부보다 한 단계 낮은 신으로써 성부의 피조물이다. </P> <P>----> 아리우스 자체는 대단히 신실한 크리스트교인이었기 때문에, 그도 성자가 인간이고 신이 아니다, 라고까지 주장한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아리우스가 그렇게 주장했다고 아타나시우스가 오독을 했고, 혹은 그렇게 몰아붙였습니다. </P> <P></P> <P>나중엔 아리우스 파들마저도 헤깔려서 이런 식으로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서 그렇지만, 아리우스 자신은 그렇게까지</P> <P>생각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교리 논쟁들 보면 거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세싸움들하고 아주 똑같은 측면이</P> <P>있습니다. )</P> <P></P> <P>그러나 왜 콘스탄티누스가 개최한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누스의 결론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는가? </P> <P>이로 인해 수많은 오해와 억측이 나오고 있는데, <STRONG>이는 황제 교황 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풀어가면 답이 나옵니다. </STRONG></P> <P></P> <P><STRONG>소집자고, 의장이라고 해서 회의에 참여해서 결론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낼 권리가 황제한텐 없었습니다. </STRONG></P> <P>어디까지나 콘스탄티누스는 황제고, 주교가 아니며 교회의 위계 체제 밖에서 교회를 보호하는 수호자일 뿐.</P> <P></P> <P>공의회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결론을 낼 권리가 있는 것은 위계가 높은 대주교들이었고, 그것은 이후의 공의회에서도,</P> <P>마찬가지였습니다. </P> <P></P> <P>삼위일체론은 그 시초가 교부들한테까지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주류 세력들이었기 때문에, 신흥 이론 세력인 아리우스</P> <P>파로써는 제아무리 일시적인 우위를 점했다한들 보수파의 기세를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공의회가 신도들의 표로</P> <P>정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P> <P></P> <P>(여기에 대해서 얘기를 풀려면, 플라톤 주의와 원수정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하니까, 이에 대해선 글 하나를 더 려서 더 자세히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P> <P></P> <P>여하튼 일단 이정표는 정해졌고, 콘스탄티누스는 오래된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서,</P> <P>이후 황제와 교회의 역할에 대해 선례를 만들었습니다. </P> <P></P> <P>이 선례를 마구 깨려 들었던 후임 황제들이 끝내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것은 아주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P> <P></P> <P>어떤 의미에서는 교회가 원로원 역할, 그리고 철학자 역할을 계승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주교와 사제단 자체가 실은</P> <P>고대 유태교 랍비들과 선지자들의 후예라기보다는 (자기네는 그렇게 믿고 싶어했지만)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P> <P>제자들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역시 부정하고 싶어했지만) </P> <P></P> <P>근데.....그러거나 말거나, 콘스탄티누스는 그딴거 관심도 없었습니다. 여하튼 교리 문제만 매듭졌으니 그 다음은....</P> <P></P> <P>도시를 봉헌하는 문제가 남았는데.....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의 폐허 위에 로마 노바를 지으면서, 뭔가를 깨닫습니다. </P> <P></P> <P>"가만, 생각해보니 좀 아깝네...도시를 지어서 왜 봉헌하냐? 그냥 내가 가져야지...." </P> <P>(엠비우스도 이렇게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_- )</P> <P></P> <P><STRONG>즉, 자신이 사도도 하고, 신도 해야겠다!!!!</STRONG></P> <P></P> <P>해서 미친 듯이 신 도시 건설 공사가 강행되었습니다. 가뜩이나 없는 재정에 무리를 해서 각지의 신전에서 석재를</P> <P>공출하고 예술품을 공출했으니 이건 뭐....</P> <P></P> <P>해서 불과 한 오륙년만에 소위 로마 노바라는 도시 하나를 뚝딱 해치워만듭니다. </P> <P></P> <P>실로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었고,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대단히 만족했습니다. </P> <P>중앙 성당이란 곳에는 12사도 무덤이란 걸 주변에</P> <P>빙 둘러 만든 뒤 중앙에 자기 꺼 하나 세운 모양인데, 이게 후대에 12사도와 동급이니 뭐니로 알려진 시초였습니다만,</P> <P><STRONG>콘스탄티누스의 의도는 그딴 게 아니었습니다. </STRONG></P> <P></P> <P>그러잖으면 도시 중앙에 대가리 모양을 자신을 본떠 만든 태양신 주상을 세울 수가 없는 것이지요. </P> <P>그의 목표는 바로 12사도보다도 우위인,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거였습니다. </P> <P></P> <P>도시도 결국은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만족의 의미로, 남들은 경멸의 의미를 붙여 부른 콘스탄티노폴리스란 이름으로 통칭되었지만...</P> <P></P> <P>콘스탄티누스의 업적 중 일부가 그랬듯이 영 속빈 강정이었습니다. </P> <P></P> <P>이 도시는 겉보기에는 썩 좋았는데, 모든 것이 부실에 부실의 연속으로 지은 날림 공사의 집합체였기 때문에, </P> <P>벌써부터 유스티니아누스 시대가 되면 콘스탄티누스가 지은 건 고작 기둥 몇개만 꼴랑 남은채 전부다 새로 지은 것이</P> <P>들어서게 됩니다만.... -_- 물론 콘스탄티누스 의도는 아니었고, 콘스탄티누스 자체가 상당히 뭐랄까, 그런거 있잖습니까.</P> <P></P> <P><STRONG><EM>군대 다녀온 분들이면 다 아는 그런거. </EM></STRONG></P> <P>"아, 그 기간 안에는 도저히......."</P> <P></P> <P>"이 색히, 기간 안에 안되면 알아서 해!!!! 누군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P> <P></P> <P>뭐 이럼 동서고금 다 똑같습니다. </P> <P>"제길할....야! 눈에 보이는 부분만 삐까번쩍하게 해!!! 아 씨 철사가 부족해? 네 개 할거 두개만 집어넣어, 하루 이틀 해보냐? </P> <P>검열할 때만 대충 넘어가면 되...</P> <P></P> <P>석재가 부족해? 야 임마 부족하면 니가 알아서 때워야지....... 옆에 작업하는 얘들 꺼 밤에 셉여서 끼워넣어! "</P> <P></P> <P><STRONG>....분명히 말하건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행보관들의 땀과 노고로 완성된 도시였던 것입니다. -_- </STRONG></P> <P><STRONG>전방 막사라면 모르겠는데 일국의 수도를 그 따위 마인드로 지었으니 결과는 너무 뻔했습니다. </STRONG></P> <P></P> <P>여기에 대해선 근거는 없지만,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세웠다는 성벽도 그딴 식으로 세워졌을 게 불을 보듯 뻔합니다. 말년에 과대망상증에 걸린 황제의 닥달질에 관료들이 거의 공포에 질린 채 속전속결로 완비하려 했기 때문이죠. 뭐 나중에 도시를 확장하면서 어물쩍 철거된 모양인데, <STRONG>부실 공사로 지은 성벽이라 허무는 건 좀 쉬웠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STRONG> 이런 것도 선견지명이라고 보면 아주 곤란하지만 말이죠. </P> <P></P> <P>여하튼 콘스탄티누스는 죽기 전에 기독교도로 개종하고 죽어 소원대로 12사도보다 더 높은 자리를 상징하는 위치에 안장됩니다. 소원대로 그는 죽어 신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STRONG>콘스탄티누스는 로마 가톨릭에서도 정교회에서도 명실공히 성인으로, 일명 성 콘스탄티누스입니다. </STRONG></P> <P></P> <P>그 다음에 이어지는 건, 앞서 언급한 철부지들의 시대인데.... 그래도 후대의 진행 경과를 아는 저는 이들을 구태여 단죄하고</P> <P>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P> <P></P> <P>호부견자 없다고, 그래도 철부지들이 모 작가의 묘사와는 달리 전쟁이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상당한 기본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단죄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 경제에 대한 무관심인데, 전쟁이나 정치도 아예 못했던 테오도시우스 아들들의 바보 듀엣 쇼에 대면 뭐......-_-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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