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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3 15: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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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설명]
일반적으로 현재에 말하는 등창은 욕창(蓐瘡, Pressure sore)인 경우가 많은데, 압박궤양이라고 하며 생체 특정 부위에 지속적으로 압박이 가해져서 혈류가 차단될 경우, 차단된 위치의 체세포가 산소 및 양분 부족으로 괴사하는 궤양임. 신체의 방어기재상 특정 부위가 오랫동안 압박을 받게 되면 신경이 반응하게 되어서 몸을 뒤척이게 되는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는데, 코마상태에 빠지거나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 PVD 등의 말초동맥질환자의 경우 이게 안되기 때문에 병이 발병할 수가 있음.
그럼, 조선시대 왕들은 거동이 불편하지 않았는데 사인중에 등창이 이리 많을까? 사실은 조선시대에서 언급하는 등창은 위에 말한 욕창이 아니라 종기(腫氣)라고 봐야 함. 일반적으로 현대 관점에서는 '종기가 왜 무섭지?' '종기 때문에 왜 죽지?'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데, 현대에는 외과적 수술이 일반화되었고, 무엇보다 항생제가 발달했기 때문에 치료가 쉬워진거지, 옛날에는 종기가 엄청 무서운 질병이었음.
종기는 일반적으로 피하감염으로 몸 안에 고름이 형성되는데, 종기가 악화되면 단순한 피부염증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발열, 오한은 물론 심하면 패혈증으로까지 진행될 수 있음. 옛날에 종기가 왜 위험한 질병이냐하면 1) 비위생적인 생활 습관, 2) 면역력 약화, 3) 환부를 도려내는 절개 배농법이 없음(사실 아예 외과적 발전이 전무했으니), 4) 페니실린 같은 항생제의 전무함 이 크리티컬하게 작용했기 때문임. (참고로 현재에도 당뇨 등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에게 종기는 꽤나 신경쓰이는 질병임)
게다가 조선시대 왕들은 과도한 업무로 인한 피로 + 스트레스 + 육식 위주의 식습관 + 운동부족 으로 면역력이 약해지는 경우가 많았고, 젊었을 때는 소위 말하는 '젊음으로' 이겨냈지만 나이들어서 이를 이기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음. 무엇보다 '감히 임금의 몸에 칼을 대느냐'는 관습이 종기 치료를 애먹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였음. 종기가 특히 왕들만 많이 걸린 게 아니라 왕들이니까 기록에 남았지(조선 왕조 27명 중 종기 앓았다고 적혀진 사람이 12명, 그중 종기가 직/간접적 사인인 경우는 5명) 기록에 남지 않은 일반 백성들도 엄청 많이 죽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음.
그리고 현재에는 종기를 단순한 피부질환에 국한하지만, 당시에는 '부어오르는 증상'을 통칭하는 뜻이었다고 함. 단순한 종기가 아니라 봉와직염, 관절염은 물론 체내에 발생하는 염증과 종양도 종기의 일종으로 간주했었음. 간단히 얘기해서 몸 어디가 붓고 아프고 열과 고름이 나온다 -> '종기' 라고 보면 됨. 쉽게 말하면 여러 감염성 질환과 염증 질환, 암 등을 통틀어서 보면 됨. 숙종 때 백광현은 본래 말의 병을 치로하던 마의였으나 종기를 치료하는 기술이 탁월하여 숙종과 인선왕후의 종기를 치료한 후 '신의'라고 불리워졌으며, 정조 시절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을 치료하던 피재길은 웅담 고약으로 정조의 종기를 치료하고 내의원이 된 적도 있었음(처음에는 정조가 이 고약으로 꽤 효과를 보았으나 오래 사용하다보니 내성이 생겼고, 이후 격무와 스트레스가 겹쳐 죽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던 종기는 조선 후기에 '고약'이 확산되면서부터 급속도로 힘을 잃음. 고약이 종기의 배출과 환부의 소독을 동시에 해냈기 때문. 현재는 고약도 사용법의 불편함 등으로 자취를 감췄고 연고와 항생제 복용으로 대부분의 종기는 치료해 낼 수 있게 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