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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5 1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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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설명]
마오쩌둥은 중국 역사가 당시 중국이 선진국이 되지 못한 이유가 역사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다보니 유교의 수장인 공자는 큰 박해를 받았음. "공자지우기" 운동도 일어났으며, 마오쩌둥 집권 후에 조상 숭배가 금지되고 문화대혁명 시절엔 공자의 묘가 파헤쳐지고 묘비와 비석은 부서졌으며, 사당과 후손들의 묘도 모두 파해쳐졌음.
또한 진시황의 분서갱유 저리가라 할 정도로 유교 경전들이 불타버렸는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유형, 무형문화재가 실전되었음. 일례로 유교식으로 선대 중국 황제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향법을 기록한 제공대전이 실전되어 한중 수교 이후 중국 유학자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의 석전대제를 배껴서 재현해야 했을 정도였음. (현재 중국보다 한국에 명나라와 청나라때 자료가 더 많아서 한국의 도움 없이는 유교 연구가 어려울 정도라고 함)
재밌는 점은, 공자의 직계 후손은 현재 중국이 아닌 대만에 살고 있음. 장제스가 대만으로 도망갈 때 공자의 적손인 77대 쿵더청을 데리고 갔는데, 이는 중국 역대 황제들에게 공자 집안의 적손을 옆에 두었다는 것은 일종의 정통성 보증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임. 공자의 자손은 대대로 '연성군'이라는 직위를 맡고 있는데, 현재 대만에서는 이를 대성지성선사봉사관으로 이름을 바꿔서 계속 이어오고 있음. 이는 대만 정부의 유일무이한 세습공직이며 그 직위는 장관급이라고 함.
쿵더청은 문화대혁명때 홍위병들이 공자묘는 물론이고 쿵더청의 아버지를 비롯한 선조들의 묘까지 다 파헤쳐 버린데 대해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고, 나중에 중국 본토의 곡부(공자 고향)에 살고 있는 공자의 다른 후손들이 공부가주(공자의 제사에 쓰는 술)을 재현하여 대만을 찾아갔을 때도 "우리 가문에 이런 술은 없다!" 라며 내쳤을 정도로 공산당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고 함. 이후에도 단 한번도 고향인 곡부에 가지 않았고, 중국 정부가 공자띄우기에 나서면서 '한번만 방문해주십사~' 라는 방문요청에도 절대 응하지 않았다고 함. 2008년 본인이 죽을 때도 '절대 내 시신을 곡부에 묻지 말라'고 유언해서 그의 무덤이 대만에 있다고 함.
하여간 잠깐 이야기가 옆길로 샜는데, 그렇게 흘대받던 공자는 1980년대 들어 시진핑 집권 후 재평가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개혁, 개방 정책과 함께 중국이 세계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우리도 문화적으로 뭐 세계에 자랑할 꺼 없나?' 라고 찾아보다가 중화민족 부흥에 활용한답시며 대대적인 공자 띄우기에 나섬. 심지어 90년대에는 유교 사상을 마르크스주의를 대신할 국가 통합 이데올로기로 삼자며 공산당의 스승으로 추켜세우고, 2000년대 들어서는 경제발전과 함께 조화사회론을 내세웠음. 중국의 공자 떠받들기는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정점을 찍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