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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08:3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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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설명]
국내에 가장 오래된 흥부전은 1833년에 만들어진 흥부만보록임. 가장 오래된 흥부전이자 가장 오래된 판소리 작품이고, 이후 흥부전에서 생략된 흥부 놀부의 출생과 배경이 자세하게 나와 있어서 역사적 연구 가치가 큼.
흥부만보록에 따르면 흥부와 놀부의 성은 장씨로 원래 이름은 장흥보, 장놀보였음. 평양 서촌 출신이던 흥부와 놀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둘 다 부잣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감. 그런데 흥부는 이후 부모를 모시기 위해 돌아왔지만 놀부는 '내가 잘먹고 잘살게 된 게 처갓집 때문인데 왜 친부모를 봉양해야 하냐'며 거부하고 처갓집에 눌러앉음. 그래서 이후 둘 사이의 빈부격차가 커졌다고 함. (원래 흥부놀부전과는 다른 부분) 이후 제비다리 스토리는 같고, 흥부는 훗날 무과에 급제해서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함.
그래서 학계에서는 흥부놀부전의 배경이 조선시대가 아니라 고려시대가 아니었을까 한다고 함. 평민 집안의 남자가 부잣집 딸의 사위로, 그것도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아이를 여럿 낳을때까지 산다는 것 자체가 신분간 차별이 극심했고 데릴사위도 1~3년밖에 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시대상과는 맞지 않는 반면, 고려시대때는 신분을 넘어 비교적 자유로운 연예가 가능했던 고려시대때가 가능했기 때문.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구전설화의 경우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면서 당시 시대상이 많이 반영된다는 점임.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흥부놀부이야기의 경우 놀부를 좀 더 나쁜 악인으로 만들어 권선징악을 당하게 하면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는데, 그 이면에는 조선 중후기에 심화된 빈부격차와 부익부빈익빈, 장자상속제도의 공고화 등이 이야기속에 녹아들어갔다고 보는게 좋음.
조선 전기만 해도 부모의 유산 배분시 장남과 차남, 심지어 딸도 특별한 차이 없이 고르게 유산을 분배받았고 사위가 집안을 잇는 일도 흔했음. 족보에도 아들과 딸이 같이 기재되었음. 그러나 조선 후기에 성리학이 뿌리내리면서 장자인 아들이 부모의 제사를 모신다는 이유로 유산의 대부분을 가져가게 되고 또 그게 당연시되었음.(이 글 쓴 사람 마인드) 또한 두 번의 큰 전쟁 (임진왜랑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남성 중심, 혈연 중심의 가족제도가 강화된 점도 있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놀부가 면책받는 것은 아님, 17세기까지만 해도 딸에게 유산의 1/3은 줬다는 기록이 있고, 동생에게 줘야 할 유산을 다 뺏고 내쫓은 놀부의 행동은 분명 잘못된 것임)
또한 조선 후기에는 모내기의 발달로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게 되고, 이는 토지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부를 모으게 되는 효과를 갖게 됨. 역으로 토지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노동력만 제공하는 노동자로 전락함 (흥부전에서도 흥부 마누라가 '여보 우리 품이나 팔러 갑시다')라는 장면이 있음. 즉 놀부는 당시 신흥세력으로 세를 불리던 지주들을, 흥부는 임금 노동자로 전락한 일반 서민들을 대변한다고 보면 됨.
하여간 위에서도 언급했듯 구전설화는 전해내려오면서 당대의 시선이 녹아들게 되어 있음. 과거 인력=노동력이었던 시대에는 다산이 축복받을 만한 행동이었으나 현대에서는 '아니 저렇게 무계획적으로 애를 낳으면 어떡하나?' 라고 하듯, 덕수 장씨의 시조 이야기였던 흥부놀부전이 시대가 지나서 당시 사회상이 녹아든 것처럼 나중에 이 이야기가 후대에 어떻게 전해지고, 후대에서는 이걸 또 어떻게 해석할 지 흥미로운 부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