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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sisa_397364
    작성자 : sss989
    추천 : 0
    조회수 : 464
    IP : 175.252.***.227
    댓글 : 0개
    등록시간 : 2013/06/02 03:13:50
    http://todayhumor.com/?sisa_397364 모바일
    유신독재비화 정수장학회 내막

     

     

     

     

    5.16장학회가 처음 출범할 때는 단순히 민간에 재단법인이 하나 생긴 것이 아니었다. 5·16장학회는 군사반란으로 수립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직접 나서서 조직한 준국가기관 성격의 장학회였다. 당시 언론은 5·16장학회를 ‘정부의 뒷받침’으로 ‘국가적인 장학사업’을 담당하기 위해 설립된 ‘반관반민의 법인체’라고 소개했다. 박정희가 5·16장학회를 만든 것은 육영사업에 깊은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국가권력을 장악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장학회를 만들지 않더라도 가난한 학생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이 얼마든지 있다. 군사정권이 5·16장학회를 급히 만든 것은 처음 김지태를 잡아 가둔 뒤 ‘재단법인 김지태장학회’를 만들자고 꼬드겼기 때문이다.

     

     

     

    군사정권은 정부가 이미 한국방송(KBS)과 서울신문을 갖고 있는 마당에 언론사를 빼앗아 정부 것으로 만드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김지태의 이름을 딴 공익법인을 만들자고 한 것이다. ‘삼성 이건희장학재단’이나 ‘현대차 정몽구재단’처럼 무슨 일 생기면 재벌 회장들이 휠체어 타고 나타나 어물어물하다가 자기 이름 붙인 공익재단 만드는 것으로 ‘퉁치는’ 방식의 모델을 50년 전에 김지태를 가둬 놓고 군사정권이 제시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기였다. 김지태가 운영하던 부일장학회는 임의단체였을 뿐 아직 법인체로 등록하지 않은 상태였다. 군사정권은 부일장학회를 재단법인 김지태장학회로 개편하면서 김지태가 원래 부일장학회의 기본재산으로 삼으려 했던 토지 10만평 이외에 김지태가 보유한 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부산일보 주식을 김지태장학회의 기본재산으로 기부하도록 한 뒤, 김지태장학회 대신 5·16장학회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런 비열한 경로로 출발한 5·16장학회는 김지태에게서 강탈한 언론사를 담아두는 장물바구니였다.

     

     

     5·16장학회는 총리급 대우를 받는 재건운동본부장 이관구를 이사장으로 하고, 이병철이나 김연수 같은 거물급 재벌을 이사로 선임했음에도 이렇다 할 모금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이병철과 김연수같이 돈 많은 이사들도 체면치레 수준의 돈만 냈을 뿐 5·16장학회의 기본재산은 거의 대부분 김지태에게서 강탈해 간 언론사 주식이었다. 부일장학회의 기본재산으로 삼으려던 토지 10만평은 5·16장학회가 정상적인 육영사업을 위한 기관이었다면 반드시 필요한 땅이었지만, 1년여에 걸친 인질납치범들 간의 장물 분배 과정에서 국방부로 넘어가버렸다.

     

     

     

     

     

     

    5·16장학회가 처음 발족할 때와는 달리 박정희는 곧 5·16장학회를 동창과 친척들에게 맡겨버렸다. 김지태의 재산을 강탈하여 5·16장학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한 전 부산일보 주필 황용주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이었다. 그는 전리품 부산일보 사장을 거쳐 1964년 8월 문화방송 사장이 되었다. 당시 문화방송 사장은 김지태로부터 기부승낙서에 도장을 받아 온 전 법무부장관 고원증이었는데, 황용주는 5·16장학회는 대구사범 계열이 맡아야지 왜 엉뚱하게 고원증이 맡느냐며 박정희를 졸라 고원증 대신 문화방송 사장이 되었다. 황용주는 취임 직후 언론윤리위법 파동 과정에서 강경파인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검찰총장 신직수 등에 맞서 온건론을 제시했다가 이들의 역공을 당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황용주가 떨려났음에도 박정희는 5·16장학회와 문화방송에 대한 대구사범의 지분을 인정해주었다.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에다가 박정희가 사단장 시절 의무중대장을 지낸 조증출은 황용주의 뒤를 이어 문화방송 사장이 되었다. 1965년 5·16장학회의 2기 이사진을 구성할 때 박정희는 자신의 동서인 조태호를 상임이사에 임명했고, 대구사범 출신으로 조증출과 국제신보 사장 서정귀를 이사에 앉혔다. 이들 이외에도 대구사범 동창들은 문화방송에서 전무이사(윤석린), 기획실장(엄한준), 부산문화방송에서 사장(조증출)과 이사(서정귀), 부산일보에서 사장(황용주, 왕학수), 상무이사(석광수), 대구엠비시에서 회장(왕학수), 광주엠비시에서 사장(최승효), 원주엠비시에서 사장(엄한준)을 지내는 등 몇 안 되는 동창들이 서울과 지방의 문화방송에서 요직을 독점했다.

     

     

     

     

     

     

     

    김대중의 공격과 이종남의 폭로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5·16장학회의 재산이 오백억원에 이른다며 5·16장학회를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부정부패 사례로 공격했다. 그는 박정희가 즐겨 쓰는 ‘중단 없는 전진’을 빌려다가 “부패만이 중단 없는 전진을 하고 있다”고 비꼬았다. 공화당은 이에 대해 “5·16장학회가 재단법인임에도 불구하고 사재 운운하여 국가원수에 대해 최대의 모욕을 자행”했다고 펄쩍 뛰었다. 5·16장학회에 대한 이런저런 비판이 거세지자 5·16장학회 이사장 김현철은 선거 일주일을 앞둔 4월20일 해명서를 발표했다. 김현철은 “본회의 소유 형태는 민법상 재단법인이기 때문에 누구의 사유물도 될 수 없”다며 재단의 재산은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오억원을 넘을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변명했다. 김현철은 “영남대학교 재단과 본 회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밝혀드리는 바”라는 말로 장문의 해명을 마쳤다.

     

     

     

     

     

    3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김대중이 5·16장학회를 두고 자신의 사유물이라고 비판을 가한 것에 대해 나름 대응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1971년 7월1일의 7대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박정희는 문화방송과 5·16장학회에 대한 일대 개편을 단행했다. 1971년 6월15일자로 5·16장학회에서 상임이사를 맡고 있던 자신의 동서 조태호, 5·16장학회의 이사로서 문화방송 사장을 맡고 있던 대구사범 동창 조증출을 물러나게 한 것이다. 문화방송의 후임 사장은 3년 반가량 전라북도 지사를 지낸 경향신문 기자 출신의 이환의였다. 박정희는 이환의에게 자신과 육영수는 문화방송 주식이 한 주도 없는데 야당에서 문화방송이 자신의 개인재산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환의가 엠비시 사장을 맡아 “엠비시와 장학회의 재산을 정리해서 국민 앞에 공개”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1971년 9월의 문화방송 유상증자는 한마디로 박정희가 행한 5·16장학회의 ‘탈박정희화’ ‘탈대구사범화’ ‘탈장물화’를 위한 민간공개법인 코스프레였다. 자본금 3억원이었던 문화방송이 현재와 같이(!) 10억원으로 증자를 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의 일이다. 문화방송은 1969년부터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이었는데도, 증자된 주식(전체의 70%)의 매각은 증권시장을 통해 공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재벌들에 억지로 떠맡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증권거래소는 상장기업이 증권거래소의 허락을 받지 않고 증자분을 마음대로 장외에서 매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펄쩍 뛰었지만, 박정희의 직접 지시로 주식 매각을 추진한 이환의는 막무가내였다. 사실 1969년 문화방송의 주식시장 상장은 “자본조달을 위한 공개보다 세제상의 혜택 때문”에 상장한 것으로 국회에서도 “위장공개, 위장거래를 함으로써 합법적인 탈세행위를 공공연히 자행”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문화방송은 부실 상장 품목으로 계속 주식시장에서의 퇴출이 거론되다가 1979년 7월 상장이 폐지되었다.

     

     

     

     

     

     

     

    문화방송 주식 10%씩을 재벌들에 ‘억지로’ 떠맡긴 것은 문화방송의 경영 전망이 암울했기 때문은 아니다. 5·16장학회의 문화방송 주식 보유 비율이 ‘아무리 낮아지더라도 문화방송이 ‘박정희 거’라는 점은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1억씩을 부담한 7개 재벌(해태, 현대, 금성, 동아건설, 교보가 각 1억원, 미원이 5000만원, 쌍용 1억5000만원)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문화방송 지분 10%를 보유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재벌 입장에서는 문화방송 주식을 명의신탁 해주고 정치자금을 뜯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일부 신문방송학 연구서나 논문에는 이 당시의 문화방송이 마치 재벌 소유로 넘어간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 것도 있으나, 지분 10% 정도씩을 차지한 재벌들이 문화방송의 주주로 행동하거나 영향력을 발휘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주식보유율 물타기에도 불구하고 문화방송의 경영권은 여전히 5·16장학회가 장악했다.

     

     

     

     

    한편 문화방송은 본사 주식 70%의 매각과 더불어 전국적 네트워크의 확보를 위해 애써 키워온 문화방송의 5개 지방 직할국의 영업권(지방사 주식의 85%)도 이때 매각했다. 문화방송의 공식 기록은 이 돈으로 엠비시가 갖고 있던 악성 단기부채를 모두 갚아 경영을 합리화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매각이 한창 추진중이던 1971년 9월9일 신민당 이종남 의원은 국회에서 엠비시 본사와 지방사 주식을 매각한 자금이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 쓴 자금을 메우는 데 흘러들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째서 그런 커다란 것을 떳떳이 증권거래소에 내놓지 않고 수의계약으로 뒷구멍으로 쉬쉬하고 계약을 하려고 합니까?”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강도가 죽었다”고 김지태는 기뻐했지만…

    1년 뒤 박정희가 유신 친위쿠데타를 일으키자 이종남 의원은 영등포 소재 구 6관구 헌병중대로 끌려가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 이종남은 국회에서 박정희 정권의 고문을 문제 삼으며 중앙정보부의 해체를 주장한 바 있었다. 고문자들은 “너 국회에서 잘 떠들던데 고문이 어떤 것인지 맛 좀 봐라” 하며 고문을 시작했다. 이종남은 “너 같은 새끼 하나 죽여 산에 갖다 묻고는 자살했다고 상부에 보고하면 그만”이라며 달려든 고문자들에게 무참히 짓밟히다가 실신했다. 고문자들은 그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작은 소동이 일어났었다고 한다. 실신했던 그가 깨어나 보니 군의관이 진찰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고문당하고 실신하고 진찰받고를 반복했다. 유신정권은 국회 재무위 간사였던 이종남이 산업은행 총재가 보내온 추석 떡값을 동료 의원들에게 나눠준 것을 혼자 뇌물 받아먹은 것으로 꾸며 징역 2년6월을 선고했다. 문화방송의 주식 매각 흑막을 폭로한 이종남의 유신시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김지태 사장의 5남 김영철은 박정희가 죽었다는 뉴스에 부친이 드디어 강도가 죽었다고 말한 장면을 나에게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자신이 소중히 키워온 언론 3사를 빼앗긴 뒤 김지태는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한시도 중단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 치하에서 달리 방법이 없었다. 1971년 문화방송 주식을 매각한다는 소문이 돌자 김지태는 5·16장학회 쪽에 매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부득이하게 매각을 해야 한다면 창업자인 자신이 되사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그 또한 소용이 없었다. 김지태는 박정희가 권좌에서 물러나야 빼앗긴 언론 3사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박정희는 유신 쿠데타를 단행해 헌정을 유린하고 종신집권을 꾀했다.

     

     

     

     

     

     

     

    김지태에게 박정희는 너무 늦게 죽었고, 전두환은 너무 빨리 등장했다. 박정희 사후 김지태는 1980년 4월 5·16장학회에 재산반환을 정식으로 요구했지만, 채 한달이 안 돼 전두환은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하며 전권을 장악했다. 1979년 김지태의 기업은 갑자기 경영난에 빠졌는데 김지태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생하지 못했고, 김지태는 전두환의 등장으로 빼앗긴 재산도 찾지도 못했다. 1982년 4월9일 김지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숨을 거두었다.

     

     

     

     

     

     

     

    박정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5·16장학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5·16장학회의 이사장은 박정희가 상당한 예우를 갖추는 원로들이 임명되었다. 박정희가 죽고 나자 이제 5·16장학회 이사장은 대접받는 자리가 아니었다. ㈜문화방송·경향신문 회장으로 박정희가 죽기 한달 전 5·16장학회 이사장을 맡은 최석채와 5·16장학회 이사로 ㈜문화·경향 사장을 겸했던 이환의는 1980년 6월20일에 열린 5·16장학회의 임시이사회에서 해임되었다. “계엄포고령 등 위반으로 9명의 사원이 연행된 데 대한 부하사원의 통솔감독 불충분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했다는 것이다. 이사회는 이사장 직무대리로 박정희의 동서 조태호를 선임했다.

     

     

     

     

     

     

    이보다 앞서 1980년 2월22일 전두환은 5·16장학회의 이사로 통일주체국민회의 사무총장 박영수와 통일원장관 이규호를 임명했다. 이들은 모두 전두환 밑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는 점에서 전두환은 5·16장학회에 자신이 신임하는 측근들을 밀어넣은 것이다. 전두환은 최규하를 끌어내리고 대통령에 오르기 직전인 8월28일 5·16장학회의 이사로 새로 문화·경향 사장이 된 이진희와 경남기업 사장 신기수를 임명했다. 신기수는 한때 박근혜와의 약혼설까지 나돌았던 인물로서 전두환의 지시로 1982년 8월 박근혜에게 성북동 집을 지어준 사람이다. 신기수는 이 무렵 5·16장학회 이사뿐 아니라 영남학원과 육영재단의 이사도 지냈다.

     

     

     

     

     

     

    전두환은 집권 초기 언론 통폐합 등 언론계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을 추진했다. 3개의 언론사를 보유했지만 실소유주 박정희가 갑자기 사라진 5·16장학회는 당연히 언론 통폐합의 도마에 오르게 되었다. 박정희가 김지태에게서 빼앗아간 장물은 박정희와 김지태가 모두 세상을 떠난 뒤 어떻게 관리되어 왔을까?

     

     

     

     

     

     

     

    5·16장학회가 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꾼 뒤 정수장학회 문제는 한동안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민주화가 시작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사악한 언론장악을 상징하는 이 문제는 다시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일보는 4·19의 도화선 역할을 한 자랑스러운 기억 대신 5·16장학회로 넘어간 후 ‘숙명적 여당지’로 침묵과 굴종을 강요당했다. 1988년 7월11일 부산일보 노조는 ‘민주언론 쟁취’, ‘공정보도 우리의 소원’, ‘편집국장 내 손으로’ 등의 구호를 내걸고 파업에 돌입했다.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파업인 부산일보의 파업은 전국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부산일보의 파업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서울의 다른 언론사 사주들이었다. 그들은 부산일보 사장 윤임술에게 노조에 굴복하여 편집권 독립이라는 ‘나쁜 선례’를 만들지 말라고 압력을 가했다. 전국 언론노조들과 부산시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부산일보 노조는 공격의 표적을 사장 윤임술에서 정수장학회로 돌렸다. 여러 언론이 정수장학회의 출생 비리 등 존립의 정당성 자체를 문제삼게 되면서, 정수장학회도 사장 윤임술을 해임하고 노조 쪽이 요구해온 편집국장 3인 추천제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업은 6일 만에 노조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김영삼의 약속과 오인환의 볼멘소리

    부산일보 파업은 정치권으로 비화했다. 민주당 총재 김영삼은 파업 현장을 방문하여 국회 문공위원회에서 공청회를 열어 부산일보의 소유권 이전 경위를 살피고 현 사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겠다고 약속했다. 뒤에 국회의장을 지낸 박관용은 국회 문공위에서 부산일보 사태를 단순한 편집권 독립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면서 1962년 5·16장학회가 김지태 소유의 부산일보를 강제로 빼앗아 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25년 전 박관용이 정수장학회가 부산일보 주식 100%를 보유하게 된 것 자체를 “잘못됐다 솔직하게 뉘우칠 줄 알아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한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불행하게도 국회는 더 이상 정수장학회 문제를 파고들지 못했다. 현재의 언론문제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5·16 직후 박정희의 언론장악 문제가 있다는 것을 다들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국회는 최근의 광주학살과 5공 비리 문제를 파헤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출범 첫해인 1993년 7월 김영삼 정권은 방송위원회 산하에 공영방송발전연구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위원회가 내놓은 ‘공영방송 발전방안’은 문화방송에 대해 “공영성 확보를 위해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의 위상 재정립을 전제로 현재 정수장학회가 소유한 30% 주식지분을 방송문화진흥회가 흡수한다”는 방침을 제시했다.

     

     

     이 방안은 일부에서 제기되어온 문화방송의 민간상업방송화 또는 민영화에 반대하고 공영성 강화를 제시했다. 공보처는 1995년 7월14일 국회 문공위에 ‘선진방송 5개년 계획’을 보고하면서 문화방송의 공영방송으로서의 위상 강화를 위해 엠비시 본사의 주식보유 구조를 개선하겠다고 보고했다. 당시 김영삼의 최측근인 박종웅 의원은 공보처 장관 오인환에게 장관 취임 2년이 넘도록 정수장학회가 보유한 엠비시 주식 문제에 대해 애매모호한 답변만 늘어놓고 있다면서, 차제에 방송관계법을 고칠 때 엠비시 주식 소유 문제도 확실하게 방침을 정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편인 박종웅에게 닦달을 당한 오인환은 볼멘소리로 “정수장학회를 대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정수장학회의 대표성을 문제삼았다. 물론 정수장학회에는 이사회를 대표하는 이사장이 있고 법률적인 책임과 권한을 갖는 이사진이 있었다. 그런 상황을 뻔히 아는 공보처 장관이 정수장학회를 대표하는 사람이 없다며 ‘정수장학회의 대표성’을 문제삼고 나온 것이다. 당시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은 서울대 농대 조경학과 교수로 있던 김귀곤이었다.

     

     

     김귀곤은 당시 50대 초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였는데 1963년 제1회 5·16장학금의 수령자였다. 김영삼 정권이 정수장학회가 보유한 문화방송 주식 30%를 방송문화진흥회에 넘기라고 요구하자 김귀곤은 자신은 그런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고 버텼을 것이다. 공보처 장관이 국회에서 정수장학회의 대표성을 문제삼은 것은 재단 기본재산의 처분을 결정할 만한 실질적 권한도 상징적 권리도 갖지 못한 ‘바지사장’ 대신 재단의 ‘실소유자’로 인식되고 있는 박근혜를 콕 집어 불러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임기가 1년가량 남아 있던 김귀곤이 물러나고 박근혜가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에 취임한 것은 이로부터 한달 반 뒤인 1995년 9월2일이었다.

     

     

     

     

     

     

    박근혜는 전두환이 퇴임하고 난 뒤 처음 맞는 박정희의 기일인 1988년 10월26일을 앞두고 자신을 회장으로 하는 ‘박정희대통령 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 및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박근혜로서는 매우 오랫동안 고대해온 일이지만, 상황은 몹시 꼬여 있었다. 7월의 부산일보 사태로 정수장학회가 사회적 논란의 핵심이 된데다, 8월 초에는 10·26 직후 청와대의 박정희 집무실에서 발견된 6억여원이 박근혜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이 처음 보도되면서, 박정희의 청렴성에 대한 신화가 산산이 깨져버렸다

     

     

     

     

    . 박근혜는 박정희가 퇴임 뒤를 대비하여 만들었다는 영남대학교의 이사장에 박정희 사후인 1980년 4월24일 취임했지만, 학내의 반발로 그해 11월8일 이사장직에서 물러나 평이사로 재임해왔다. 민주화의 열기 속에 영남대에서는 재단이사들이 깊숙이 관계된 부정입학 사건이 폭로되었다. 이 사건으로 영남대 재단이사장 조일문과 상임이사 김정욱, 이사 박근혜, 김창환, 손미자 등이 물러났다. 이들 중 김창환은 정수장학회에서 이사장, 손미자는 상임이사, 김정욱은 이사를 지냈다. 부산일보 사태와 영남대 사태가 초래한 극도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탓인지 정수장학회 이사장 조태호는 그해 연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박근혜는 부산일보 파업과 영남대 부정입학 사건으로 대단히 곤란한 상황이었지만 박정희의 9주기 추도식과 박정희, 육영수의 기념사업을 밀어붙였다. 특히 기념사업을 위해서는 신문에 광고를 내고 자신의 이름으로 된 계좌번호를 제시하면서 기념관 건립을 위한 성금을 보내줄 것을 호소하였다.

     

     

     

     

     

    박근혜-박근영-박지만 재산싸움의 뿌리

    박근혜가 아버지의 추도식과 부모의 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배후에는 최태민 목사가 있다는 설이 파다했다. 조태호가 죽은 뒤 박정희 유가족의 갈등은 본격화되었다. 1990년 가을 박근혜와 박근영(박서영) 자매는 육영재단의 관리권을 놓고 골육상쟁을 벌였다. 박근혜는 1982년 10월 육영재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한 이래 8년간 맡아온 이사장 자리를 동생 박근영에게 빼앗기다시피 물려주게 되었다. 박근영과 박지만은 1990년 8월14일자로 A4용지 12장 분량인 장문의 탄원 편지를 당시 대통령 노태우와 다수의 유력인사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 편지에는 박근영과 박지만의 이름이 쓰여 있지만, 본문에서 박근혜를 ‘언니’로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박근영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진정코 저희 언니(박근혜)는 최태민씨에게 철저히 속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속고 있는 언니가 너무도 불쌍합니다! 대통령의 유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고 또 함부로 구원을 청할 곳도 없었습니다”라며 최태민이 “유족이 핵심이 된 각종 육영사업, 장학재단, 문화재단 등 추모사업체에 깊숙이 관여해 회계장부를 교묘한 수단으로 조작하여 많은 재산을 착취”했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이어 최태민이 “부모님의 유덕을 기리는 기념사업회를 형식적으로 만들어 놓고 이름만 ‘박정희대통령 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이고 실제 내용은 최태민 기념사업회로 전락해 가고 있다”고 탄식했다. 박근혜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최태민은 자기를 도와준 고마운 분이라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박근혜 후보는 정수장학회와 자신은 아무 관련이 없으며, 정수장학회는 공익법인이기 때문에 개인의 사유재산 운운함은 근거 없는 비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수장학회, 육영재단, 영남대학교 등이 개인이 손댈 수 없는 재산이라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부모를 가진 친형제 간에 청부살인이니 납치니 하는 험한 꼴을 보이며 20년간 싸우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1995년 정수장학회 이사장에 취임한 박근혜는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부일장학회 강탈 의혹 사건의 조사에 착수하자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박근혜의 후임으로 이사장을 맡은 사람은 유신시대에 청와대 비서관으로 ‘영애’ 담당 업무를 맡은 최필립이었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조사과정에서 최필립을 만났을 때, 그는 박근혜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를 1970년대 중반 자신이 청와대 의전비서관으로 있을 때 박정희가 불러 박근혜가 어린 나이에 중책을 맡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도와주라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때 박정희는 최태민의 이름을 콕 집어 말하면서 그런 자가 박근혜 옆에 얼씬대지 못하도록 최필립이 박근혜를 잘 도와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요컨대 박정희는 최필립을 최태민으로부터 박근혜를 지키기 위한 안전장치로 박근혜의 곁에 두었던 것이다.

     

     

     

     

    10·26사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궁정동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은 조갑제와 행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판단을 잘못해서 최태민의 마크맨으로 최필립을 추천하게 되었다고 후회했다. 김계원에 따르면 비서실장인 자신에게 최필립을 추천한 것은 의전수석 최광수였는데, 최씨 몇이 몰리게 되면서 최태민과 최필립이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조갑제가 “참 이상한 게 그전의 박 대통령 같으면 최태민을 잡아넣었을 텐데”라고 말하자, 김계원은 “한번은 ‘야단치려고 해도 에미 없는 것이 불쌍해서 눈물 나더라’고 하시던데요”라고 답했다. 70년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란 노래가 유행했지만, 동정은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그 값싼 동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sss989의 꼬릿말입니다
    야구 여행 좋아함  .수구꼴통 매국노 듣보잡 쥐때박멸 '말로는 신의 종이라면서 뒤로는 개만도못한 나쁜짓 다하는 개독 사악한목사들 박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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