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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료약품 및 그 분량 : 이 약 1정(90mg) 중 성상 : 흰색의 원형 당의정 게스토덴(별규) 0.075mg 효능효과 : 피임 에치닐에스트라디올(USP) 0.030mg |
용법용량 : 자세한 내용은 첨부 문서를 참조. 월경이 시작되는 1일째부터 1일 1정 씩 21일 간 표시된 순서에 따라 복용하고 7일 간 복용을 중지함. 매일 같은 시간에 복용하는 것이 바람직함. |
월요일
현정은 마지막 알약 하나를 차가운 물과 함께 삼킨다. 차가운 것이 자신의 구멍 뚫린 식도를 흘러내려가는 걸 느낀다. 3 주 전만 해도 가득 차 있던 공간이 지금은 텅 비어있다. 한 때 알약을 안전하게 외부로부터 차단하던 은박은 찢어져서 제 기능을 잃었다. 그녀는 그 빈 공간과 터진 은박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21 개의 구멍, 달력에 표시된 21 개의 Ⅹ. 앞으로 7 일 간의 지겹고 고통스러운 생리가 시작될 것이다. 그녀는 얼굴을 한 번 찡그리고 주방을 나선다.
화장실에서 실크 잠옷을 벗는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감촉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유두를 인지한다. 만으로 내리고 내려 20 대라고 우길 수 있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지만, 아직은 탄탄한 몸이다.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따뜻한 물을 뿌린다. 샤워 부스에서 뿜어져 나온 물이 그녀의 정수리를 때리고 몸의 굴곡을 따라 아래로 흐른다. 마침내 바닥에 닿은 물줄기는 검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녀는 옷장에서 지난 밤에 미리 준비해 놓은 옷들을 꺼낸다. 수수한 흰 색 속옷 세트와 검은색 팬티스타킹, 다려놓은 하얀 블라우스, 몸에 딱 달라붙는 블랙 숏재킷, 옆트임이 들어간 네이비 H라인 스커트. 머리는 올려 묶어 망으로 고정하고. 화장은 옅게 눈썹은 조금 가늘고 짙게 입술은 강조. 인칸토 참을 뿌리고 작은 귀걸이와 시계로 마무리. 백에 생리대를 챙겨 넣고 검정 하이힐을 신는다. 불을 끄고 문을 잠근다.
1 층으로 내려오고 길쭉한 건물의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그렇게 사람들은 흩어지는 듯 보였지만 이내 또 한 곳으로 몰려든다. 그녀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지하철역으로 간다. 지하철이 도착하고, 다시금 기다란 것에 몸을 맡긴다. 길쭉한 금속 덩어리는 좌우로 몸을 비틀어가며 앞으로 미끄러져간다. 그녀가 창 밖 풍경을 감상할 틈도 없이 지하철은 도시의 깊은 어둠 속으로 파고든다. 이제야 이름에 걸맞은 곳으로 움직인다.
2~3 분 마다의 짧은 여정이 끊어질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간다. 그리고 다시 꾸역꾸역 들어온다. 그녀는 지하철이 종점에 이르기 한참 전에 내린다. 그녀가 내린 후에도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종점까지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은 중간에 나올 수 밖에 없는 사정을 갖고 있다. 그녀도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내려야만 하는, 도시의 피부 아래에서 다시 위로 올라와야만 하는 사정이 있다. 지상에는 콘크리트들이 우뚝 서 있다.모두가 지면으로부터 꼿꼿이 서 있다. 그녀는 아파트에서 나왔던 것처럼, 아니 그와는 반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터로 올라간다.
“좋은 아침.”
“송대리님은 언제나 일찍 오시네요.”
이제 갓 주임을 단 후배 녀석이 알랑거린다.
“내가 너 땐 1 시간 전부터 와 있었어.”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업무 일지를 확인한다. 원래대로라면 내일 있을 회의가 오늘 오후로 앞당겨졌음을 알아차린다. 과장이 내일 출장을 가게 된 것이다. 하루치 업무만을 빨리 끝내고 가려 했던 그녀의 계획이 월요일 첫 날부터 엎어진다. 휴대폰이 울린다. 부장의 메시지. 모든 일은 언제나 연달아 닥친다. 그녀는 오늘 퇴근길에 피임약과 함께 두통약도 살 것을 계획한다.
화요일
현정은 오늘도 어제와 같은 시간에 눈을 뜬다. 채널을 맞춰둔 TV에서는 뉴스가 한창이다. 아침부터 곱게 차려 입은 캐스터가 나와 하루의 날씨를 설명해준다. 현정은 녹즙을 마시며 캐스터를 관찰한다. 파스텔 톤의 화사한 복장과 생기발랄한 화장. 크게 화려하지 않은 귀고리와 눈에 잘 띄지는 않는 네일 아트. 만면한 미소로 오늘의 강수 확률이 40%라고 말한다. 창 밖을 보니 벌써부터 검은 구름이 짙게 깔려있다. 밖은 어두운데 TV 만이 밝게 빛을 발한다.
그녀는 옷을 꺼낸다. 강렬하지만 무거운 색들의 옷들이다. 검은색 무늬가 있는 붉은 속옷, 밴드스타킹에 가터벨트, 작은 프릴이 달린 바이올렛 블라우스, 와인 색 스커트, 네이비 재킷, 액세서리는 그대로, 향수는 인칸토에 손을 뻗었다가 다른 걸 뿌린다. 좀 더 가벼운 걸로. 그리고 백 안에 작은 우산을 챙겨 넣는다. 생리대도 확인한다. 바로 옆에 어제 산 두통약이 보인다. 검붉은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선다.
좁고 긴 지하철에서 해방된 그녀는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다. 우뚝 솟은 건물들로 가려진 하늘은 여전히 어둡다. 잿빛 구름들이 꾸륵거린다. 그녀는 배를 움켜쥔다. 이내 시선을 내리고 걸어간다.
“어머!”
다행히도 넘어지진 않았다. 뒷굽이 나갔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간다고 해도 그녀가 가진 붉은 구두는 지금 신고 있는 것 하나 밖에 없다.물론 분홍색이나 이제는 잘 안 신는 주황색 등이 있긴 하지만, 현재 코디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시계를 본다. 남은 시간 동안 수리가 될 것 같지도 않다.그리고 수리는 그녀 스타일이 아니다. 수리해봤자 한 번 망가진 건 계속 말썽을 부리기 마련이다. 고쳐서 새 것인 척을 해도 다 티가 나고 금방 다시 떨어진다. 이미 대학생 때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최대한 조신하게 걸으면서 가까운 매장으로 들어간다. 최대한 색감이 비슷한 구두를 사고, 망가진 건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일단은 맡겨둔다.
“오늘은 웬 일로 직전에 오시네요.”
어제의 후배가 고개만 내밀며 인사한다.
“어이 남씨, 니 정강이도 내 구두처럼 부러지고 싶니?”
“와우~ 오늘은 민감하신 날인가 보네.”
“종 친다. 모니터나 봐.”
“네이 네이~”
그녀는 자리에 털썩 앉는다. 뭐가 일진이 사납다. 아침에 본 기상캐스터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미소가 지금 생각하니 기분 나쁘다. 이질감이 느껴지는 구두를 한 번 만지고 컴퓨터를 켠다. 부팅을 기다리고 있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구두 때문이 아니라 진짜로 몸이 이상하다.
“하아~”
그녀는 백에서 생리대를 챙겨 일어난다. 사무실을 나서는데 후배 녀석이 다시 참견한다.
“설마 저 때문은 아니죠?”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바로 화장실로 간다. 코너를 돌아서 첫 번째 입구, 는 남자화장실. 어리버리하던 입사 초기에 몇 번 실수하고선 이젠 습관이 된 듯 하다. 순백의 남자소변기를 확인하고서야 그녀는 남자화장실을 나온다. 여자 화장실. 비릿한 향이 그녀의 코를 자극한다. 그 하얗던 생리대가 붉게 물들어 있다. 그녀는 재빨리 생리대를 갈고 자리로 돌아온다. 암호 입력 창이 떠 있다. 암호를 입력하고 기다린다. 모든 게 별로다.
부장은 그녀에게 먼저 간단히 저녁을 먹자고 제안한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비가 올 텐데 회를 먹자고 한다. 어차피 그녀가 계산하는 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참 구린 센스다.
“여기 회는 마지막까지 살아서 팔딱거리지. 참 싱싱해.”
그러면서 도미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연분홍 살결 가득 붉은 초고추장이 흘러내린다. 축축한 그것은 부장의 마른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부장의 입술에 초고추장이 묻는다. 정말로 구린 센스다. 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려 돔을 간장에 찍는다. 그렇게 싸구려는 아니다.
1 차에 이어 2 차도 간단히 한 후 모텔에 들어간다. 부장이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간다. 붉은 카펫, 하얀 화장대와 의자, 붉은 스탠드, 하얀 이불. 그녀의 시선이 점점 멀어지다가
“저 먼저 씻을게요.”
“너무 오래 씻지는 마.”
그녀는 겉 옷을 모두 벗어 옷걸이 걸고 속옷만 입은 채로 욕실로 향한다. 그 사이에 부장은 침대 위에 앉아 TV를 틀고 연신 채널을 돌리고 있다. 그녀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보인다. 붉게 물든 생리대를 휴지통에 버린다. 그녀는 한동안 물을 맞으며 서 있다가 대충 마무리를 하고 나왔다. 하얀 가운을 걸치고 붉은 카펫 위를 걸어간다. 화장대의 의자를 빼서 앉는다. 그녀와 부장 사이에 붉은 스탠드가 있다.
“전 다 씻었어요.”
“이대로 하지?”
“네?”
“어차피 또 씻을 텐데 말이야. 굳이 물 낭비,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아무래도 이 남자, 피곤한가 보다. 그런데도 그건 하고 싶고. 이전에는 조금이나마 분위기 잡는 척이라도 하더니 이제는 매우 노골적이다. 남자는 그녀의 몸 밖에 원하는 것이 없어 보인다. 뭐, 사실 그녀도 진짜 연애 감정으로 만나는 건 아니니까 상관은 없다. 저런 늙은이를 만나기엔,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아깝다고 생각하니까. 그저 서로 원하는 것을 바꾸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스스로도 종 잡을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자신이 주려 하는 것의 상태를 말한다.
“지금 생리 중인데, 괜찮겠어요?”
“내 몸도 아니고 네 몸인데, 난 상관 없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남자는 허리띠를 푼다. 그를 옥죄이던 단추들을 풀어버리고 어정쩡한 반나체로 침대 위에 앉아 있다. 바보 같은 남자. 생리 중의 성관계가 얼마나 안 좋은지도 모르고 콘돔도 꺼내지 않는다. 그녀는 집에 청결제가 얼마나 남았나를 떠올리며 침대 위로 올라 간다.
“비릿할지도 몰라요.”
남자는 붉게 물든 자신의 성기를 슬쩍 본다.
“처녀랑 하는 것 같구만.”
안개 같은 빗방울이 떨어지다가 만다.
수요일
평소보다 한 시간 이른 알람이 울리고 현정은 하얀 이불 속에서 눈을 뜬다. 구름만 아니었다면 해가 막 뜨기 시작할 참이다. 아직도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부장을 뒤로 하고 그녀는 욕실에 들어선다. 하얀 거품과 함께 붉은 덩어리들이 씻겨져 내려간다. 어지러울 정도로 향이 강한 바디워시로도 비릿한 냄새가 안 지워지는 것 같음을 느낀다. 그녀는 두 번이나 거품을 씻어내고 나서야 밖으로 나온다. 새 생리대를 속옷에 부착한다.
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벗어 던진다. 정리는 나중에 저녁에 하면 되고 갈아 입을 옷부터 꺼낸다. 치마를 꺼내는데 느낌이 이상하다. 다리 사이에서 비릿한 향이 올라옴을 느낀다. 그녀는 치마를 다시 제자리에 두고 바지를 꺼낸다. 바지에 맞춰 블라우스도 파란색으로 바꾼다. 그녀는 입을 옷들을 침대에 늘어놓고 화장실로 향한다. 청결제로 음부를 씻고 얼마 묻지도 않은 생리대도 새 걸로 교환한다. 향수도 정량의 두 배를 뿌린다. 그래도 그녀는 꺼림칙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오늘 기분 나쁜 일이 있을 것만 같다.
오후가 되자 과장이 출근한다. 그리고 회의가 소집된다. 그녀는 자신의 직감이 맞았음을 확신한다. 쓸데 없이 블라인드가 쳐진 회의실에서 과장이 출장에서 받은 감동에 대한 일장 연설을 듣는다. 과장의 과장이 심할 수록 회사에 묶여 있어야 할 시간이 연장될 것이다. 업무량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녀는 아침에 바지를 고른 것에 대해 새삼 자찬하고 있다. 과장은 마지막 업무지시를 끝내고 갑자기 작은 상자 하나씩을 나눠준다. 지역 특산품이라는 것 같다.
“우리 부서 홍일점 송현정 대리한테는 특별히 유니크한 걸로~ 이제 시집 갈 때도 됐잖아?”
“감사합니다.”
“지금 풀지 말고 집에 가서 풀어 봐~”
과장이 기름 낀 얼굴로 그녀에게 윙크를 날린다. 그 작은 동작 하나를 위해 얼굴 전체가 역동적으로 구겨지고 그 구겨진 주름마다 광이 번들거린다.그녀는 한 번 더 감사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간다. 상자를 한 쪽 구석에 놓고 늘어난 업무를 포스트잇에 써서 붙여 놓는다. 얄짤 없이 야근이다.
짧은 저녁 시간이 끝나고 과장은 막내에게 법인 카드를 건넨다. 막내는 헐레벌떡 달려가고 나머지는 여유롭게 엘리베이터에 탄다. 그런데 한 명이 빈다. 그녀는 남 후배가 없음을 알아차린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싶지만, 예민해진 그녀의 감이 부정한다.
자리에 앉아 다시 일을 하려는데 막내가 들어온다. 빈 손이다. 과장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막내에게 왜 손이 자유로우냐고 묻는다. 막내는 빈 손이 멋쩍은지 머리를 긁적인다. 그녀는 설마 하다가 남 선배가 올려 보냈다는 막내의 말에 확신한다. 막내와 눈이 마주치고 그녀는 다시 모니터를 쳐다본다.막내가 삐질 거리며 일을 하는 사이 남 후배가 양손 가득 들어온다.
“얌마, 막내를 시켰는데 왜 네가 갔다 와?”
“에이~ 과장님, 막내는 아직 일 배우느라 정신도 없는데 할 것도 많잖습니까? 집에는 빨리빨리 보내야죠.”
후배는 특유의 빤질거림으로 넘어간다. 과장에게 영수증과 카드를 넘기고는 부드럽게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커피 한 잔씩을 내려놓는다.
“참고로 커피는 잠들 깨시라고 아메리카노로 통일입니다.”
후배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렇게나 커피를 주더니 그녀 차례에서는 잠시 멈칫한다. 그러고는 신중히 하나를 빼내 건넨다. 컵에 작은 표시가 돼있다. 그녀가 그 표시를 미처 발견하기도 전에 후배가 작은 소리로 말한다.
“선배는 스페셜 딜리버리입니다~ 쓴 건 잘 못 드시죠?”
맞는 말이다. 한 때 그녀는 자신의 이미지에 맞는 모습이라 여겨 아메리카노를 들고 다녔지만 하루 종일 반 잔을 마신 게 전부였다. 쓴 맛이 좀 덜할까 싶어 물을 타서 묽게 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맛이 없었다. 다행인 것은 뚜껑을 닫고 있으면 아무도 그녀가 무얼 마시는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런데 후배는 그녀가 전에 흘리듯이 말한 걸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밤이 늦어서야 집에 도착해 상자를 열어 본다. 나무로 깎은 남근상이 웃고 있다. 붉은 빛이 감도는 나뭇결, 그녀는 피를 뒤집어 쓴 남성기를 본다. 입 꼬리를 한껏 올리며 웃는 모습, 그녀는 처녀를 말하는 부장의 얼굴을 본다. 그녀는 기름진 윙크를 하는 과장의 얼굴을 본다. 그녀는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후배의 얼굴을 본다. 그녀는 말없이 눈으로 웃는 막내의 얼굴을 본다. 욕지기가 올라옴을 느낀다. 아래로는 피가 샌다. 그녀는 화장실로 달려가고 캐스터는 말한다.
“내일도 여전히 구름이 잔뜩 낄 전망이며, 강수 확률은 50%을 웃돌 것으로 예상됩니다.”
목요일
과장은 어제 퇴근하면서 사람들에게 회식을 약속했다. 이미 부장님 결재까지 맡아둔 것이라고 했다. 현정은 어젯밤 일을 떠올린다. 나올 듯 나오지 않아 멈추지 않던 욕지기와 멈추고 싶어도 계속 새서 바닥을 붉게 수 놓은 생리. 몇 십 분을 그러고 있은 후에야 잠에 들 수 있었다.
오늘은 회식도 있는 날이니만큼 그녀는 밝은 계열의 옷을 꺼낸다. 비록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지만 그녀의 옷은 오늘만큼은 옅은 분홍색이 감돈다. 치마에도 약간의 주름이 있다. 평소에 잘 신지 않아 하나 밖에 없는 살구색 팬티스타킹도 꺼낸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각이 선 모습은 그대로다. 이틀 전에 새로 산 구두가 부러진 구두보다 좀 더 밝은 계열인 게 그나마 다행이다. 구두가 약간의 포인트가 된다.
새로 산 구두는 급히 산 것이라 그런지 그녀 발에 썩 잘 맞지는 않는다. 특히 출근 시간대의 붐비는 지하철에서는 더욱 힘들다. 그녀는 얼른 역에 도착해 이 끈적거리는 공간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란다. 역사 바깥으로 나가는 길 또한 치열한 경주가 되겠지만 이 가느다란 관보다는 훨씬 숨이 트일 것이다. 그리고 회사에 도착하면 그 얇은 막대로 힘들게 균형을 잡아가며 하중을 버티던 그녀의 발은 드디어 약간의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회사에 도착해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구두가 영 발에 안 맞는지 조금도 움직이기가 싫은 것이다. 걷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발에 왠지 모를 통증이 전해져 온다. 그녀는 틈틈이 발을 마사지하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이다. 곧 점심 시간이고 사람들의 주의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그녀는 화장실로 가서 발의 상태를 본다. 발등 일부와 새끼 발가락이 조금 빨간 것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인다. 다시 스타킹을 신으려는 순간, 그녀는 붉은 것을 발견한다. 까져 있다. 구두가 정말 안 맞는 거였는지, 아니면 그냥 새로 산 거라 길이 안 들어서 그런 건지 발 뒤꿈치가 까져 있다. 그 곳에서 샌 약간의 피가 스타킹에도 묻어 있다. 여기저기서 피 나고 묻고, 아주 일도 아니다. 그녀는 스타킹에 얼굴을 묻는다. 그래도 화장실에 죽치고 있을 순 없으니 다시 스타킹을 신는다.
‘찌익’
그녀는 순간 손을 멈춘다. 아무래도 너무 급하게 신은 것 같다. 스타킹이 완전히 찢어진 건 아니지만 올이 좀 나갔다. 치마로 가려지지도 않는 종아리 부분이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그녀는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둘 다 해결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나서야 사무실을 나선다. 가까운 편의점에 들러 밴드와 팬티스타킹을 산다. 그런데 살구색이 없다. 알바생에게 재고가 있나 묻지만 없다고 한다. 그녀는 손에 들었던 밴드를 내려 놓는다. 다른 편의점으로 곧장 향하지만 거기도 마찬가지다. 오늘 하루는, 아니 이번 주는 그녀에게 악운이 쓰인 것 같다.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흰색 팬티스타킹을 사고 사무실로 돌아온다. 뒤꿈치에 밴드를 붙이고 스타킹을 투명한 비닐에서 꺼낸다. 생리대를 먼저 갈고 스타킹을 갈아 신는다. 다행히 흰색이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다.사람들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그녀에게 질문을 하겠지만, 금방 수그러들 문제다.
편의점에서 함께 산 요거트를 한 잔 마시고 쉬고 있자니 남자들이 들어온다. 앉아 있어서 그런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점심 시간이 끝날 때쯤 양 손에 커피 한 잔씩을 들고 그녀에게 온 남 후배만이 알아차린다. 어차피 업무 시간도 다 됐기에 그녀는 대충 대답한다. 사실 시시콜콜 다 이야기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럴 만한 내용도 아니고 그럴 관계도 아니니까. 무엇보다 그녀의 기분이 별로다. 이틀 전에도 그랬지만, 이런 때는 술 마실 기운도 나지 않는다. 그녀는 1 차에서도 별로 마시지 않고 일찍 집으로 들어간다. 영 아니다.
금요일
아침에 출근하니 사무실에 현정과 부장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안 온 모양이다. 그 전날 야근을 했다고 모두 진탕 마신 것 같다. 그래도 과장을 빼곤 모두 아슬하게나마 제 시간 안에 도착한다. 과장은 결국 반차를 쓰고 점심 시간이 끝날 때쯤에 들어온다. 아직 젊어서 그런지 막내가 가장 쌩쌩하고,중간에 빠졌는지 부장이 그 다음이다. 그 다음은 직급이 높아질수록 좋아진다. 물론 제일 먼저 빠진 그녀가 제일 말짱하지만.
그녀는 오늘이 금요일이라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 주의 마지막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날만큼은 일찍 퇴근하기 위해 미리미리 일을 처리해 놓는다. 그녀도 오후 4 시쯤부터 업무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늦게 온 과장도 실은 이미 할 일을 다 처리해 놓은 모양이다. 이 사무실의 모두가 무료함을 만끽하고 있다. 막내만 빼고.
그녀는 일주일 동안 풀리지 않던 기분을 풀기 위해 남은 시간을 할애하기로 한다. 뉴스를 좀 훑어보다가 인터넷 커뮤니티를 둘러본다. 어느 것 하나 그녀의 흥미를 끄는 게 없다. 충동이라도 일으킬까 싶어 쇼핑몰을 돌아다니지만 그마저도 신통치 않다. 어제까지 그녀의 발을 괴롭힌 구두가 떠올라 구두를 살까 했지만 직접 신어봐야 함을 새삼 깨달은 참에 또 실수를 할 수는 없다. 그녀는 카드까지 꺼냈지만, 기분을 풀어줄 만한 걸 찾는 걸 포기한다.
그녀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가림막 너머로 시선을 옮긴다. 모두의 얼굴에서 무료를 읽는다. 막내만이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전투적으로 타자를 두들긴다. 아직도 익혀야 할 게 많이 보인다. 물론 막내라는 것 때문에 일이 몰리는 것도 좀 있겠지만 그것도 익숙해지고 나면 별 거 아닌 게 될 거다.그녀는 옛날에 자신이 했던 실수들, 어찌어찌 수습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웃음 짓는다. 막내에게서 그녀 자신을 본다.
부장이 잠시 컴퓨터를 두들기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모두들 뭔가를 알아채고 몸을 숙인다. 그녀도 다시 시선을 내리고 이미 검토를 끝낸 보고서를 다시 켠다. 부장이 사무실을 한 번 훑는다. 불쌍한 막내는 아직도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하다.
“다음 주 거래처 미팅에 쓸 계약서와 PT 자료, 상부 보고서를 복사해야 하는데 누구 한가로운 사람 있나?”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는다. 그녀도 쓸 데 없이 빨간 밑줄을 찾아 두 번 세 번 다시 읽는다.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던 막내가 고개를 든다.
“네?”
“역시 신입이라 그런지 여유롭군. 그럼 신입이 하는 걸로 하지. 다음 주 월요일 아침에 내 책상 위에 올려 두게.”
“아,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시계를 확인한다. 이제 막 5 시를 넘겼으니 7 시쯤이면 끝날 거다. 그나마 얼마 안 하는 일이라서 다행이다. 방금 전까지 막내를 보며 감정이입을 하던 그녀였는데, 막내가 고생하는 걸 보고도 편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래도 그녀 스스로 하는 건 원치 않으니까.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되고 사람들이 지상과 맞닿은 구멍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녀도 그 중 한 명으로서 밖을 향해 분출된다. 어제의 숙취가 엄청난 탓인지 모두들 일찍 집으로 돌아가고 영 기분이 안 좋은 그녀도 역으로 내려간다. 사람이 너무 많아 나중에 탈까 싶기도 하지만, 그녀의 기분은 그걸 견딜 만큼 안정적이지 않다. 그녀는 손에 잡히지 않는 지갑을 찾기 위해 백을 휘적거린다. 하지만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다. 두 손으로 백의 입구를 벌리고 안을 들여다봐도 보이지 않는다.
“아, 아까 구두.”
마지막까지 짜증나는 일의 연속이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선다. 붉은 노을은 보이지 않는다. 벌써 5 일째 짙은 구름만이 그녀의 눈 앞을 가리고 있다. 대신 회사 건물의 몇몇 구간만이 빛을 발하고 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그녀는 시계를 본다. 6 시 30 분. 무려 30 분이나 허비했다.귀중한 휴일의 30 분이 이렇게 허망하게 날아가고 있다. 그녀는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사무실로 들어선다. 막내가 한참 복사기와 씨름하고 있다.
“어? 왜 다시 돌아오셨어요?”
“지갑을 두고 가서. 넌, 아직도 하고 있니?”
“이제 거의 다 했습니다. 앞으로 5 분? 10 분? 그 정도면 끝날 것 같아요.”
그녀는 지갑을 챙기고 다시 사무실을 나선다. 막내는 묵묵히 복사만 하고 있다. 바보 같이 순진한 면이 있다.
“막내야, 뭐라도 좀 마실래?”
“선배님께서 사시는 건가요?”
“그래.”
그녀는 편의점에서 맥주와 안주거리를 좀 사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간다. 오늘만 회사를 몇 번이나 오르내린다. 그런데 마지막이 버겁다. 안주는 얼마 안 되지만 맥주가 상당히 무겁다. 너무 많이 샀나 싶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것 좀 도와줄래?”
어느새 서류 정리를 마친 막내가 달려와 그녀에게서 봉투를 건네 받는다.
“엄청 많이 사오셨네요. 오늘 안에 다 마실 수나 있을까요?”
“어차피 내일부터 휴일인 걸.”
둘은 사무실 의자에 마주보고 앉아 캔을 딴다. ‘딱’하는 소리와 함께 거품이 올라온다. 오다가 좀 흔들렸는지 넘치려고 한다. 다행히도 둘 다 바닥에 흘리기 전에 들이켰다. 막내가 먼저 팔을 뻗어 건배 제의를 하고 그녀가 받아 친다. 부장과 과장을 씹다 보니 어느새 한 캔을 다 비웠다. 둘은 새 캔을 딴다. 이번 건 넘치지 않는다. 이번엔 업무 이야기를 한다. 오늘 막내의 순진한 행동들, 능률을 올리는 팁이나 부러웠던 점 등등. 한 캔은 이야기를 나누기엔 너무 작다.
세 번째 캔을 딴다.
“그래서, 넌 여친은 없어?”
“졸업하고선 2 년 간 유학 간다고 하는 바람에 헤어졌어요. 소원해지기도 했었고요. 선배는요?”
“마지막이 3 년 전인가 그래.”
“그럼 그 사이에 아무 것도 없던 거예요? 대쉬 받은 적도?”
그녀는 두 명이 떠올랐지만, 말할 수는 없는 관계다. 한 명은 있어선 안 되는 거고, 한 명은 그냥 낌새일 뿐이니까. 아니, 정확히는 혼자만 그러는 거니까.
“한 명도. 그냥 일하느라 바빴어.”
“그러다 시기 놓쳐요~”
“야. 얘가 못하는 말이 없어.”
그녀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킨다. 그 사이에 막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걸 느낀다.
“선배 정도면 충분히 예쁘고 능력도 있는데 왜 남자가 없을까요?”
“그러게 말이다.”
“레즈는 아니죠?”
“푸하하!”
그녀는 크게 웃다가 눈을 감고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문다. 그리고 막내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레즈 할까?”
“그러지 말아요. 경쟁자 늘잖아요.”
“얘는~! 내가 경쟁이나 되니?”
그녀는 벌써 세 번째 캔을 비워간다. 봉투에서 새 캔을 꺼내려는데 막내가 손을 잡는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선배가 레즈면 전 어떡해요.”
그냥 푸념이나 늘어놓으며 기분이나 풀려던 그녀의 계획이 틀어진다. 이제까지 막내를 마냥 어리버리하고 귀여운 신입으로만 여기던 그녀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뭔가 자신도 모르는 게 움직이는 걸 느낀다. 분명 술 때문일 것이다. 그래, 술. 그녀는 다시 손을 뻗어 마지막 캔을 딴다. 막내도 어느새 그녀를 따라 마지막 캔을 따고 있다.
“제가 이러는 거 술 취해서도 아니고, 물론 술기운을 빌려 말하는 건 맞지만, 술김에 하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술만 마신다. 천장을 보다가 캔을 보다가 책상을 보고 다시 천장을 본다. 그리고 다시 막내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그녀가 자신을 볼 때까지 막내는 계속 그녀를 보고 있던 모양이다. 그녀는 막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키스… 해줄래?”
막내는 엷은 미소를 띠고 일어선다. 그녀의 의자 손잡이를 잡고 가까이 다가선다. 한 손을 떼어 그녀의 볼을 감싸고 나머지 손마저 떼어 머리를 감싼다. 처음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싼다. 그리고 부드럽게 일으켜 세운다. 점점 자신 쪽으로 당기다가 자기 의자에 앉는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웃는다. 서로의 어깨에 기대 간지럽힌다. 그리고 다시 입을 맞추며 서로의 단추를 푼다. 그녀는 그의 단단한 가슴에 손을 얹고 그는 커다란 두 손으로 그녀의 등을 어루만진다. 옷과 살결 사이의 공간에서 서로의 손이 오간다. 둘 모두 하의는 벗어 던지고 다시 한 의자에 앉는다. 책상을 뒤로 하여 의자를 뒤로 최대한 젖힌다. 그녀는 더 이상 신음을 참지 못하고 얕게 뱉는다. 천둥 소리가 들려온다. 셔츠와 블라우스가 점점 젖어간다. 비는 점점 거세지고 바로 선 사옥도 흠뻑 젖는다.
토요일
현정은 언제나 주말은 편안히 지내려고 노력한다. 특히 3 년 전부터는 웬만해선 주말에 약속을 잡지 않는다. 마침 날씨도 안 좋고 하니 그녀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 동안 소홀했던 집안일을 한다. 일주일 간 쌓인 먼지를 턴다. 청소기를 돌린다. 걸레질을 한다. 주방을 정리한다. 화장실 청소를 한다. 타일 사이 사이에 핏기가 보인다. 물에 다 씻긴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그녀는 솔로 타일 사이 사이를 벅벅 닦는다. 몇 번을 해도 깔끔해지지가 않는다.청소하는 틈에 몸에 달라 붙는 옷을 세탁기에 넣고 돌린다. 샤워를 하고 나니 끈적거리는 열기가 조금 가신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율무차 한 잔을 탄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TV를 튼다. 화면은 계속 움직이고 소리도 울린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집중하지 않고 있다. 어젯밤 일만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생리중인 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기분 나쁘지도, 이상한 증세가 보이지도 않았다. 최근 경험한 섹스 중 최고라 할만 했고, 오랜만에 절정까지 도달한 섹스였다. 그걸 떠올리니 그녀의 몸에 다시 느낌이 오는 것 같다. 그녀는 눈을 감고 달콤함을 음미한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바람에 일렁이는 나무들을 본다. 간 밤에 비가 오고도 하늘은 여전히 답답하고 이따금씩 바람이 분다. 뉴스에서는 주말에 한 번 더 비가 올 거라고 한다. 그녀는 아직 따뜻한 머그컵을 감싸 쥔다. 마지막 비가 남아서인지 그녀는 약간의 한기를 느낀다. 그리고 충전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다.
‘부우우우웅 부우우우웅’
갑작스러운 진동에 그녀는 눈을 뜬다. ‘남○○’ 어두운 방 안에 휴대전화만이 울린다. 1 시.
“이 시간에 뭐야?”
“어떠케 그얼 수 있어요?”
잔뜩 취한 혀다.
“술 마시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어떠케… 어케 그딴 여서기랑…….”
그녀는 막내가 말했다고 추측한다. 후배의 이런 반응이라면, 그리고 막내가 적어도 그녀에게만은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던, 그래서 그녀에게 접근했던 목적대로라면 이리 말했으리라. ‘내가 한 번 따먹음.’ 그녀는 그런 거에 신경 쓰지 않는다. 섹스는 완전 별개의 것이니까.
“그래서?”
“그래서라구요? 아시자나여. 제가 선밸 어케 생카는지 알자나여!”
그녀는 슬슬 짜증을 느낀다.
“알고 있어. 다 티나.”
“근데도 그래여? 근데도?”
순간 울컥한다.
“그래서 뭐? 난 내가 섹스하고 싶을 때 섹스도 못하니? 좋아하고 사귀는 사람이랑만 해야 해? 섹스가 그렇게 중요해? 너흰 대체 뭐가 문제야? 뭘 더 바라는데?”
휴대전화를 집어 던진다. 배터리가 분리된다. 그녀는 침대 위에 쭈그리고 앉는다. 소매가 젖는다.
일요일
현정은 스포츠브라를 하고 트레이닝복을 입는다. 머리를 묶고 조깅화를 갖추고 집을 나선다. 비록 금방이라도 퍼부을 날씨이지만 이대로 집안에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대로는 너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을 거다. 그녀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해방이 필요하다. 그 해방을 위해 그녀는 신발끈을 꽉 동여맨다. 그리고 공원을 달린다. 한 바퀴를 돌고 다시 한 바퀴를 돌고 무릎이 말을 안 들을 때까지 달린다. 바로 그 지점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벤치 앉아서 휴식을 취한다.
‘부우우우웅 부우우우웅’
다시 휴대전화가 울린다. 남 후배다. 어젯밤 일의 사과이리라고 그녀는 예상한다. 진동이 두어 번 더 울리고 나서 그녀는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대리님?”
벌써부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다.
“저,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잘못한 건 아나 보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렸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너무 늦은 시간에 연락 드린 건 알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기억을 못하는 게 그녀에게도, 후배에게도 좋은 일일지 모르겠다. 괜히 같은 회사에서 어색하게 있는 것보다는 한 쪽만 애써 모르는 척 하면 되는 거니까. 그리고 어제 통화를 떠올려 보면 후배보다는 그녀 스스로가 더 쿨한 것 같으니 진짜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그녀는 숨을 좀 고르고 입을 연다.
“별 거 아니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냥 오늘 하루 푹 쉬기나 해.”
“감사합니다. 그럼 대리님도 편히 쉬세요.”
그녀는 전화를 끊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여전히 어둡다. 어제의 대화를 떠올린다. 후배는 그렇다 치고 그녀 자신까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곱씹어 본다. 사실 그녀도 궁금하긴 하다. 대체 그녀에게 진정 바라는 건 무엇일까? 그녀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 걸까?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다. 남들이 해달라는 대로 수동적으로 살아온 것도 아니고, 그냥 그녀 스스로 원하는 걸 한 것 밖에 없는데. 점점 그녀의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그녀는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진다. 방금 전까지 적게나마 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던 사람들도 몸을 피하고 무리 지어 다니던 사람들도 급히 집으로 돌아간다. 그녀만이 빗줄기가 지상을 때리는 곳에서 비를 맞으며 달린다. 달리다 보니 주변엔 아무도 없고 그녀 혼자 뿐이다. 심지어는 우산을 쓴 이마저 없다. 그녀는 속도를 서서히 줄이더니 이내 자리에 멈춰 선다. 속옷은 물론 생리대까지 다 축 젖은 느낌이다. 그녀는 얼굴을 닦는다. 흘러내리는 빗줄기인지 다른 것인지를 연신 닦다가 양 손에 얼굴을 파묻는다.
“그래, 비는 떨어지는 거지.”
월요일
현정은 밝게 빛나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눈을 뜬다. 그 어느 때보다 산뜻한 아침이다. TV를 끄고 기지개를 켠다. 오늘은 날씨를 볼 필요도 없다. 현정은 물만 한 컵 마시고 피임약을 들고 화장실로 간다. 아직 구멍이 뚫리지 않은 은박과 21 개의 공간, 그 공간에 들어찬 21 개의 덩어리들. 전부 변기에 털어 넣고 물을 내린다.
샤워를 마치고 옷장에서 옷을 꺼낸다. 수수하면서도 아예 밋밋하진 않은 속옷, 연한 민트색 스타킹에 연한 하늘색 원피스, 흰 재킷과 베이지색 숄더 백, 길게 늘어지는 귀고리. 어느 한 곳만을 강조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생기 넘치는 화장, 플라워바이겐조, 연분홍과 민트가 적절히 섞인 단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미용실에 가서 로즈브라운 색으로 염색과 글램 펌을 한다. 그 사이에 네일 케어를 받는다. 그 동안 그냥 혼자서 큐티클오일과 영양제 등만 바르던 손톱에 색이 하나 둘 입혀진다.
현정은 이미 월차를 냈지만 택시를 타고 회사 앞으로 간다. 하늘을 올려다 본다. 조각 구름 둘 셋만이 파란 하늘에 떠 있다. 현정은 백에서 작은 우산 하나를 꺼낸다. 비가 내린다. 해도 반짝이고 구름도 없지만 지상은 젖어 간다. 건물도 땅도 모든 것이 젖어간다. 붉게.
붉은 여우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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