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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차단 상태
    치노르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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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문 : 364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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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readers_23063
    작성자 : 꼬망꼬망
    추천 : 8
    조회수 : 1137
    IP : 112.214.***.47
    댓글 : 1개
    등록시간 : 2015/12/07 02:45:34
    http://todayhumor.com/?readers_23063 모바일
    [소설]에스트로겐의 도시
    옵션
    • 창작글
    • 외부펌금지
    A4 용지 11 쪽(약 원고지 85매) 분량입니다.
    요일 별로 나눠 올릴까 하다가 흐름이 끊길 것 같아 한 번에 올려요.
    비루한 글이지만 재미있게 읽으신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원료약품 및 그 분량 : 이 약 1정(90mg) 중 성상 : 흰색의 원형 당의정
     
     게스토덴(별규) 0.075mg                           효능효과 : 피임

     에치닐에스트라디올(USP) 0.030mg


      용법용량 : 자세한 내용은 첨부 문서를 참조.
    월경이 시작되는 1일째부터 1 1정 씩 21일 간 표시된 순서에 따라 복용하고 7일 간 복용을 중지함.
    매일 같은 시간에 복용하는 것이 바람직함.



    월요일

    현정은 마지막 알약 하나를 차가운 물과 함께 삼킨다차가운 것이 자신의 구멍 뚫린 식도를 흘러내려가는 걸 느낀다. 3 주 전만 해도 가득 차 있던 공간이 지금은 텅 비어있다한 때 알약을 안전하게 외부로부터 차단하던 은박은 찢어져서 제 기능을 잃었다그녀는 그 빈 공간과 터진 은박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21 개의 구멍달력에 표시된 21 개의 앞으로 7 일 간의 지겹고 고통스러운 생리가 시작될 것이다그녀는 얼굴을 한 번 찡그리고 주방을 나선다.

    화장실에서 실크 잠옷을 벗는다부드럽게 미끄러지는 감촉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유두를 인지한다만으로 내리고 내려 20 대라고 우길 수 있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지만아직은 탄탄한 몸이다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따뜻한 물을 뿌린다샤워 부스에서 뿜어져 나온 물이 그녀의 정수리를 때리고 몸의 굴곡을 따라 아래로 흐른다마침내 바닥에 닿은 물줄기는 검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녀는 옷장에서 지난 밤에 미리 준비해 놓은 옷들을 꺼낸다수수한 흰 색 속옷 세트와 검은색 팬티스타킹다려놓은 하얀 블라우스몸에 딱 달라붙는 블랙 숏재킷옆트임이 들어간 네이비 H라인 스커트머리는 올려 묶어 망으로 고정하고화장은 옅게 눈썹은 조금 가늘고 짙게 입술은 강조인칸토 참을 뿌리고 작은 귀걸이와 시계로 마무리백에 생리대를 챙겨 넣고 검정 하이힐을 신는다불을 끄고 문을 잠근다.

    층으로 내려오고 길쭉한 건물의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그렇게 사람들은 흩어지는 듯 보였지만 이내 또 한 곳으로 몰려든다그녀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지하철역으로 간다지하철이 도착하고다시금 기다란 것에 몸을 맡긴다길쭉한 금속 덩어리는 좌우로 몸을 비틀어가며 앞으로 미끄러져간다그녀가 창 밖 풍경을 감상할 틈도 없이 지하철은 도시의 깊은 어둠 속으로 파고든다이제야 이름에 걸맞은 곳으로 움직인다.

    2~3 분 마다의 짧은 여정이 끊어질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간다그리고 다시 꾸역꾸역 들어온다그녀는 지하철이 종점에 이르기 한참 전에 내린다그녀가 내린 후에도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종점까지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대부분은 중간에 나올 수 밖에 없는 사정을 갖고 있다그녀도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내려야만 하는도시의 피부 아래에서 다시 위로 올라와야만 하는 사정이 있다지상에는 콘크리트들이 우뚝 서 있다.모두가 지면으로부터 꼿꼿이 서 있다그녀는 아파트에서 나왔던 것처럼아니 그와는 반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터로 올라간다.

    좋은 아침.”

    송대리님은 언제나 일찍 오시네요.”

    이제 갓 주임을 단 후배 녀석이 알랑거린다.

    내가 너 땐 1 시간 전부터 와 있었어.”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업무 일지를 확인한다원래대로라면 내일 있을 회의가 오늘 오후로 앞당겨졌음을 알아차린다과장이 내일 출장을 가게 된 것이다하루치 업무만을 빨리 끝내고 가려 했던 그녀의 계획이 월요일 첫 날부터 엎어진다휴대폰이 울린다부장의 메시지모든 일은 언제나 연달아 닥친다그녀는 오늘 퇴근길에 피임약과 함께 두통약도 살 것을 계획한다.

     



    화요일

    현정은 오늘도 어제와 같은 시간에 눈을 뜬다채널을 맞춰둔 TV에서는 뉴스가 한창이다아침부터 곱게 차려 입은 캐스터가 나와 하루의 날씨를 설명해준다현정은 녹즙을 마시며 캐스터를 관찰한다파스텔 톤의 화사한 복장과 생기발랄한 화장크게 화려하지 않은 귀고리와 눈에 잘 띄지는 않는 네일 아트만면한 미소로 오늘의 강수 확률이 40%라고 말한다창 밖을 보니 벌써부터 검은 구름이 짙게 깔려있다밖은 어두운데 TV 만이 밝게 빛을 발한다.

    그녀는 옷을 꺼낸다강렬하지만 무거운 색들의 옷들이다검은색 무늬가 있는 붉은 속옷밴드스타킹에 가터벨트작은 프릴이 달린 바이올렛 블라우스와인 색 스커트네이비 재킷액세서리는 그대로향수는 인칸토에 손을 뻗었다가 다른 걸 뿌린다좀 더 가벼운 걸로그리고 백 안에 작은 우산을 챙겨 넣는다생리대도 확인한다바로 옆에 어제 산 두통약이 보인다검붉은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선다.

    좁고 긴 지하철에서 해방된 그녀는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다우뚝 솟은 건물들로 가려진 하늘은 여전히 어둡다잿빛 구름들이 꾸륵거린다그녀는 배를 움켜쥔다이내 시선을 내리고 걸어간다.

    어머!”

    다행히도 넘어지진 않았다뒷굽이 나갔다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간다고 해도 그녀가 가진 붉은 구두는 지금 신고 있는 것 하나 밖에 없다.물론 분홍색이나 이제는 잘 안 신는 주황색 등이 있긴 하지만현재 코디에는 어울리지 않는다시계를 본다남은 시간 동안 수리가 될 것 같지도 않다.그리고 수리는 그녀 스타일이 아니다수리해봤자 한 번 망가진 건 계속 말썽을 부리기 마련이다고쳐서 새 것인 척을 해도 다 티가 나고 금방 다시 떨어진다이미 대학생 때 깨달은 것이다그녀는 최대한 조신하게 걸으면서 가까운 매장으로 들어간다최대한 색감이 비슷한 구두를 사고망가진 건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일단은 맡겨둔다.

    오늘은 웬 일로 직전에 오시네요.”

    어제의 후배가 고개만 내밀며 인사한다.

    어이 남씨니 정강이도 내 구두처럼 부러지고 싶니?”

    와우오늘은 민감하신 날인가 보네.”

    종 친다모니터나 봐.”

    네이 네이~”

    그녀는 자리에 털썩 앉는다뭐가 일진이 사납다아침에 본 기상캐스터의 얼굴이 떠오른다그 미소가 지금 생각하니 기분 나쁘다이질감이 느껴지는 구두를 한 번 만지고 컴퓨터를 켠다부팅을 기다리고 있는데 기분이 이상하다구두 때문이 아니라 진짜로 몸이 이상하다.

    하아~”

    그녀는 백에서 생리대를 챙겨 일어난다사무실을 나서는데 후배 녀석이 다시 참견한다.

    설마 저 때문은 아니죠?”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바로 화장실로 간다코너를 돌아서 첫 번째 입구는 남자화장실어리버리하던 입사 초기에 몇 번 실수하고선 이젠 습관이 된 듯 하다순백의 남자소변기를 확인하고서야 그녀는 남자화장실을 나온다여자 화장실비릿한 향이 그녀의 코를 자극한다그 하얗던 생리대가 붉게 물들어 있다그녀는 재빨리 생리대를 갈고 자리로 돌아온다암호 입력 창이 떠 있다암호를 입력하고 기다린다모든 게 별로다.

    부장은 그녀에게 먼저 간단히 저녁을 먹자고 제안한다아직은 아니지만곧 비가 올 텐데 회를 먹자고 한다어차피 그녀가 계산하는 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는다그렇다고 해도 참 구린 센스다.

    여기 회는 마지막까지 살아서 팔딱거리지참 싱싱해.”

    그러면서 도미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연분홍 살결 가득 붉은 초고추장이 흘러내린다축축한 그것은 부장의 마른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부장의 입술에 초고추장이 묻는다정말로 구린 센스다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려 돔을 간장에 찍는다그렇게 싸구려는 아니다.

    차에 이어 2 차도 간단히 한 후 모텔에 들어간다부장이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간다붉은 카펫하얀 화장대와 의자붉은 스탠드하얀 이불그녀의 시선이 점점 멀어지다가

    저 먼저 씻을게요.”

    너무 오래 씻지는 마.”

    그녀는 겉 옷을 모두 벗어 옷걸이 걸고 속옷만 입은 채로 욕실로 향한다그 사이에 부장은 침대 위에 앉아 TV를 틀고 연신 채널을 돌리고 있다그녀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보인다붉게 물든 생리대를 휴지통에 버린다그녀는 한동안 물을 맞으며 서 있다가 대충 마무리를 하고 나왔다하얀 가운을 걸치고 붉은 카펫 위를 걸어간다화장대의 의자를 빼서 앉는다그녀와 부장 사이에 붉은 스탠드가 있다.

    전 다 씻었어요.”

    이대로 하지?”

    ?”

    어차피 또 씻을 텐데 말이야굳이 물 낭비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아무래도 이 남자피곤한가 보다그런데도 그건 하고 싶고이전에는 조금이나마 분위기 잡는 척이라도 하더니 이제는 매우 노골적이다남자는 그녀의 몸 밖에 원하는 것이 없어 보인다사실 그녀도 진짜 연애 감정으로 만나는 건 아니니까 상관은 없다저런 늙은이를 만나기엔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아깝다고 생각하니까그저 서로 원하는 것을 바꾸는그런 관계인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스스로도 종 잡을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자신이 주려 하는 것의 상태를 말한다.

    지금 생리 중인데괜찮겠어요?”

    내 몸도 아니고 네 몸인데난 상관 없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남자는 허리띠를 푼다그를 옥죄이던 단추들을 풀어버리고 어정쩡한 반나체로 침대 위에 앉아 있다바보 같은 남자생리 중의 성관계가 얼마나 안 좋은지도 모르고 콘돔도 꺼내지 않는다그녀는 집에 청결제가 얼마나 남았나를 떠올리며 침대 위로 올라 간다.

    비릿할지도 몰라요.”

    남자는 붉게 물든 자신의 성기를 슬쩍 본다.

    처녀랑 하는 것 같구만.”

    안개 같은 빗방울이 떨어지다가 만다.

     



    수요일

    평소보다 한 시간 이른 알람이 울리고 현정은 하얀 이불 속에서 눈을 뜬다구름만 아니었다면 해가 막 뜨기 시작할 참이다아직도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부장을 뒤로 하고 그녀는 욕실에 들어선다하얀 거품과 함께 붉은 덩어리들이 씻겨져 내려간다어지러울 정도로 향이 강한 바디워시로도 비릿한 냄새가 안 지워지는 것 같음을 느낀다그녀는 두 번이나 거품을 씻어내고 나서야 밖으로 나온다새 생리대를 속옷에 부착한다.

    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벗어 던진다정리는 나중에 저녁에 하면 되고 갈아 입을 옷부터 꺼낸다치마를 꺼내는데 느낌이 이상하다다리 사이에서 비릿한 향이 올라옴을 느낀다그녀는 치마를 다시 제자리에 두고 바지를 꺼낸다바지에 맞춰 블라우스도 파란색으로 바꾼다그녀는 입을 옷들을 침대에 늘어놓고 화장실로 향한다청결제로 음부를 씻고 얼마 묻지도 않은 생리대도 새 걸로 교환한다향수도 정량의 두 배를 뿌린다그래도 그녀는 꺼림칙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오늘 기분 나쁜 일이 있을 것만 같다.

    오후가 되자 과장이 출근한다그리고 회의가 소집된다그녀는 자신의 직감이 맞았음을 확신한다쓸데 없이 블라인드가 쳐진 회의실에서 과장이 출장에서 받은 감동에 대한 일장 연설을 듣는다과장의 과장이 심할 수록 회사에 묶여 있어야 할 시간이 연장될 것이다업무량은 말할 필요도 없다그녀는 아침에 바지를 고른 것에 대해 새삼 자찬하고 있다과장은 마지막 업무지시를 끝내고 갑자기 작은 상자 하나씩을 나눠준다지역 특산품이라는 것 같다.

    우리 부서 홍일점 송현정 대리한테는 특별히 유니크한 걸로이제 시집 갈 때도 됐잖아?”

    감사합니다.”

    지금 풀지 말고 집에 가서 풀어 봐~”

    과장이 기름 낀 얼굴로 그녀에게 윙크를 날린다그 작은 동작 하나를 위해 얼굴 전체가 역동적으로 구겨지고 그 구겨진 주름마다 광이 번들거린다.그녀는 한 번 더 감사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간다상자를 한 쪽 구석에 놓고 늘어난 업무를 포스트잇에 써서 붙여 놓는다얄짤 없이 야근이다.

    짧은 저녁 시간이 끝나고 과장은 막내에게 법인 카드를 건넨다막내는 헐레벌떡 달려가고 나머지는 여유롭게 엘리베이터에 탄다그런데 한 명이 빈다그녀는 남 후배가 없음을 알아차린다화장실이라도 갔나 싶지만예민해진 그녀의 감이 부정한다.

    자리에 앉아 다시 일을 하려는데 막내가 들어온다빈 손이다과장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막내에게 왜 손이 자유로우냐고 묻는다막내는 빈 손이 멋쩍은지 머리를 긁적인다그녀는 설마 하다가 남 선배가 올려 보냈다는 막내의 말에 확신한다막내와 눈이 마주치고 그녀는 다시 모니터를 쳐다본다.막내가 삐질 거리며 일을 하는 사이 남 후배가 양손 가득 들어온다.

    얌마막내를 시켰는데 왜 네가 갔다 와?”

    에이과장님막내는 아직 일 배우느라 정신도 없는데 할 것도 많잖습니까집에는 빨리빨리 보내야죠.”

    후배는 특유의 빤질거림으로 넘어간다과장에게 영수증과 카드를 넘기고는 부드럽게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커피 한 잔씩을 내려놓는다.

    참고로 커피는 잠들 깨시라고 아메리카노로 통일입니다.”

    후배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렇게나 커피를 주더니 그녀 차례에서는 잠시 멈칫한다그러고는 신중히 하나를 빼내 건넨다컵에 작은 표시가 돼있다그녀가 그 표시를 미처 발견하기도 전에 후배가 작은 소리로 말한다.

    선배는 스페셜 딜리버리입니다쓴 건 잘 못 드시죠?”

    맞는 말이다한 때 그녀는 자신의 이미지에 맞는 모습이라 여겨 아메리카노를 들고 다녔지만 하루 종일 반 잔을 마신 게 전부였다쓴 맛이 좀 덜할까 싶어 물을 타서 묽게 했지만그건 그것대로 맛이 없었다다행인 것은 뚜껑을 닫고 있으면 아무도 그녀가 무얼 마시는지 알 수 없다는 것그런데 후배는 그녀가 전에 흘리듯이 말한 걸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밤이 늦어서야 집에 도착해 상자를 열어 본다나무로 깎은 남근상이 웃고 있다붉은 빛이 감도는 나뭇결그녀는 피를 뒤집어 쓴 남성기를 본다입 꼬리를 한껏 올리며 웃는 모습그녀는 처녀를 말하는 부장의 얼굴을 본다그녀는 기름진 윙크를 하는 과장의 얼굴을 본다그녀는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후배의 얼굴을 본다그녀는 말없이 눈으로 웃는 막내의 얼굴을 본다욕지기가 올라옴을 느낀다아래로는 피가 샌다그녀는 화장실로 달려가고 캐스터는 말한다.

    내일도 여전히 구름이 잔뜩 낄 전망이며강수 확률은 50%을 웃돌 것으로 예상됩니다.”

     



    목요일

    과장은 어제 퇴근하면서 사람들에게 회식을 약속했다이미 부장님 결재까지 맡아둔 것이라고 했다현정은 어젯밤 일을 떠올린다나올 듯 나오지 않아 멈추지 않던 욕지기와 멈추고 싶어도 계속 새서 바닥을 붉게 수 놓은 생리몇 십 분을 그러고 있은 후에야 잠에 들 수 있었다.

    오늘은 회식도 있는 날이니만큼 그녀는 밝은 계열의 옷을 꺼낸다비록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지만 그녀의 옷은 오늘만큼은 옅은 분홍색이 감돈다치마에도 약간의 주름이 있다평소에 잘 신지 않아 하나 밖에 없는 살구색 팬티스타킹도 꺼낸다그래도 전체적으로 각이 선 모습은 그대로다이틀 전에 새로 산 구두가 부러진 구두보다 좀 더 밝은 계열인 게 그나마 다행이다구두가 약간의 포인트가 된다.

    새로 산 구두는 급히 산 것이라 그런지 그녀 발에 썩 잘 맞지는 않는다특히 출근 시간대의 붐비는 지하철에서는 더욱 힘들다그녀는 얼른 역에 도착해 이 끈적거리는 공간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란다역사 바깥으로 나가는 길 또한 치열한 경주가 되겠지만 이 가느다란 관보다는 훨씬 숨이 트일 것이다그리고 회사에 도착하면 그 얇은 막대로 힘들게 균형을 잡아가며 하중을 버티던 그녀의 발은 드디어 약간의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회사에 도착해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구두가 영 발에 안 맞는지 조금도 움직이기가 싫은 것이다걷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발에 왠지 모를 통증이 전해져 온다그녀는 틈틈이 발을 마사지하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이다곧 점심 시간이고 사람들의 주의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그녀는 화장실로 가서 발의 상태를 본다발등 일부와 새끼 발가락이 조금 빨간 것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인다다시 스타킹을 신으려는 순간그녀는 붉은 것을 발견한다까져 있다구두가 정말 안 맞는 거였는지아니면 그냥 새로 산 거라 길이 안 들어서 그런 건지 발 뒤꿈치가 까져 있다그 곳에서 샌 약간의 피가 스타킹에도 묻어 있다여기저기서 피 나고 묻고아주 일도 아니다그녀는 스타킹에 얼굴을 묻는다그래도 화장실에 죽치고 있을 순 없으니 다시 스타킹을 신는다.

    찌익

    그녀는 순간 손을 멈춘다아무래도 너무 급하게 신은 것 같다스타킹이 완전히 찢어진 건 아니지만 올이 좀 나갔다치마로 가려지지도 않는 종아리 부분이다.

    가지가지 한다진짜.”

    그녀는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둘 다 해결하고자 한다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나서야 사무실을 나선다가까운 편의점에 들러 밴드와 팬티스타킹을 산다그런데 살구색이 없다알바생에게 재고가 있나 묻지만 없다고 한다그녀는 손에 들었던 밴드를 내려 놓는다다른 편의점으로 곧장 향하지만 거기도 마찬가지다오늘 하루는아니 이번 주는 그녀에게 악운이 쓰인 것 같다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결국 그녀는 흰색 팬티스타킹을 사고 사무실로 돌아온다뒤꿈치에 밴드를 붙이고 스타킹을 투명한 비닐에서 꺼낸다생리대를 먼저 갈고 스타킹을 갈아 신는다다행히 흰색이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다.사람들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그녀에게 질문을 하겠지만금방 수그러들 문제다.

    편의점에서 함께 산 요거트를 한 잔 마시고 쉬고 있자니 남자들이 들어온다앉아 있어서 그런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점심 시간이 끝날 때쯤 양 손에 커피 한 잔씩을 들고 그녀에게 온 남 후배만이 알아차린다어차피 업무 시간도 다 됐기에 그녀는 대충 대답한다사실 시시콜콜 다 이야기하는 것도 이상하다그럴 만한 내용도 아니고 그럴 관계도 아니니까무엇보다 그녀의 기분이 별로다이틀 전에도 그랬지만이런 때는 술 마실 기운도 나지 않는다그녀는 1 차에서도 별로 마시지 않고 일찍 집으로 들어간다영 아니다.

     



    금요일

    아침에 출근하니 사무실에 현정과 부장뿐이다다른 사람들은 아직 안 온 모양이다그 전날 야근을 했다고 모두 진탕 마신 것 같다그래도 과장을 빼곤 모두 아슬하게나마 제 시간 안에 도착한다과장은 결국 반차를 쓰고 점심 시간이 끝날 때쯤에 들어온다아직 젊어서 그런지 막내가 가장 쌩쌩하고,중간에 빠졌는지 부장이 그 다음이다그 다음은 직급이 높아질수록 좋아진다물론 제일 먼저 빠진 그녀가 제일 말짱하지만.

    그녀는 오늘이 금요일이라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한 주의 마지막이니까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날만큼은 일찍 퇴근하기 위해 미리미리 일을 처리해 놓는다그녀도 오후 4 시쯤부터 업무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한참이나 늦게 온 과장도 실은 이미 할 일을 다 처리해 놓은 모양이다이 사무실의 모두가 무료함을 만끽하고 있다막내만 빼고.

    그녀는 일주일 동안 풀리지 않던 기분을 풀기 위해 남은 시간을 할애하기로 한다뉴스를 좀 훑어보다가 인터넷 커뮤니티를 둘러본다어느 것 하나 그녀의 흥미를 끄는 게 없다충동이라도 일으킬까 싶어 쇼핑몰을 돌아다니지만 그마저도 신통치 않다어제까지 그녀의 발을 괴롭힌 구두가 떠올라 구두를 살까 했지만 직접 신어봐야 함을 새삼 깨달은 참에 또 실수를 할 수는 없다그녀는 카드까지 꺼냈지만기분을 풀어줄 만한 걸 찾는 걸 포기한다.

    그녀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가림막 너머로 시선을 옮긴다모두의 얼굴에서 무료를 읽는다막내만이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전투적으로 타자를 두들긴다아직도 익혀야 할 게 많이 보인다물론 막내라는 것 때문에 일이 몰리는 것도 좀 있겠지만 그것도 익숙해지고 나면 별 거 아닌 게 될 거다.그녀는 옛날에 자신이 했던 실수들어찌어찌 수습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웃음 짓는다막내에게서 그녀 자신을 본다.

    부장이 잠시 컴퓨터를 두들기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모두들 뭔가를 알아채고 몸을 숙인다그녀도 다시 시선을 내리고 이미 검토를 끝낸 보고서를 다시 켠다부장이 사무실을 한 번 훑는다불쌍한 막내는 아직도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하다.

    다음 주 거래처 미팅에 쓸 계약서와 PT 자료상부 보고서를 복사해야 하는데 누구 한가로운 사람 있나?”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는다그녀도 쓸 데 없이 빨간 밑줄을 찾아 두 번 세 번 다시 읽는다자신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던 막내가 고개를 든다.

    ?”

    역시 신입이라 그런지 여유롭군그럼 신입이 하는 걸로 하지다음 주 월요일 아침에 내 책상 위에 올려 두게.”

    알겠습니다.”

    그녀는 시계를 확인한다이제 막 5 시를 넘겼으니 7 시쯤이면 끝날 거다그나마 얼마 안 하는 일이라서 다행이다방금 전까지 막내를 보며 감정이입을 하던 그녀였는데막내가 고생하는 걸 보고도 편할 수 있을 리 없다그래도 그녀 스스로 하는 건 원치 않으니까.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되고 사람들이 지상과 맞닿은 구멍에서 쏟아져 나온다그녀도 그 중 한 명으로서 밖을 향해 분출된다어제의 숙취가 엄청난 탓인지 모두들 일찍 집으로 돌아가고 영 기분이 안 좋은 그녀도 역으로 내려간다사람이 너무 많아 나중에 탈까 싶기도 하지만그녀의 기분은 그걸 견딜 만큼 안정적이지 않다그녀는 손에 잡히지 않는 지갑을 찾기 위해 백을 휘적거린다하지만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다두 손으로 백의 입구를 벌리고 안을 들여다봐도 보이지 않는다.

    아까 구두.”

    마지막까지 짜증나는 일의 연속이다그녀는 한숨을 쉬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선다붉은 노을은 보이지 않는다벌써 5 일째 짙은 구름만이 그녀의 눈 앞을 가리고 있다대신 회사 건물의 몇몇 구간만이 빛을 발하고 있다엘리베이터가 멈추고 그녀는 시계를 본다. 6  30 무려 30 분이나 허비했다.귀중한 휴일의 30 분이 이렇게 허망하게 날아가고 있다그녀는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사무실로 들어선다막내가 한참 복사기와 씨름하고 있다.

    왜 다시 돌아오셨어요?”

    지갑을 두고 가서아직도 하고 있니?”

    이제 거의 다 했습니다앞으로 5 ? 10 그 정도면 끝날 것 같아요.”

    그녀는 지갑을 챙기고 다시 사무실을 나선다막내는 묵묵히 복사만 하고 있다바보 같이 순진한 면이 있다.

    막내야뭐라도 좀 마실래?”

    선배님께서 사시는 건가요?”

    그래.”

    그녀는 편의점에서 맥주와 안주거리를 좀 사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간다오늘만 회사를 몇 번이나 오르내린다그런데 마지막이 버겁다안주는 얼마 안 되지만 맥주가 상당히 무겁다너무 많이 샀나 싶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것 좀 도와줄래?”

    어느새 서류 정리를 마친 막내가 달려와 그녀에게서 봉투를 건네 받는다.

    엄청 많이 사오셨네요오늘 안에 다 마실 수나 있을까요?”

    어차피 내일부터 휴일인 걸.”

    둘은 사무실 의자에 마주보고 앉아 캔을 딴다. ‘하는 소리와 함께 거품이 올라온다오다가 좀 흔들렸는지 넘치려고 한다다행히도 둘 다 바닥에 흘리기 전에 들이켰다막내가 먼저 팔을 뻗어 건배 제의를 하고 그녀가 받아 친다부장과 과장을 씹다 보니 어느새 한 캔을 다 비웠다둘은 새 캔을 딴다이번 건 넘치지 않는다이번엔 업무 이야기를 한다오늘 막내의 순진한 행동들능률을 올리는 팁이나 부러웠던 점 등등한 캔은 이야기를 나누기엔 너무 작다.

    세 번째 캔을 딴다.

    그래서넌 여친은 없어?”

    졸업하고선 2 년 간 유학 간다고 하는 바람에 헤어졌어요소원해지기도 했었고요선배는요?”

    마지막이 3 년 전인가 그래.”

    그럼 그 사이에 아무 것도 없던 거예요대쉬 받은 적도?”

    그녀는 두 명이 떠올랐지만말할 수는 없는 관계다한 명은 있어선 안 되는 거고한 명은 그냥 낌새일 뿐이니까아니정확히는 혼자만 그러는 거니까.

    한 명도그냥 일하느라 바빴어.”

    그러다 시기 놓쳐요~”

    얘가 못하는 말이 없어.”

    그녀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킨다그 사이에 막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걸 느낀다.

    선배 정도면 충분히 예쁘고 능력도 있는데 왜 남자가 없을까요?”

    그러게 말이다.”

    레즈는 아니죠?”

    푸하하!”

    그녀는 크게 웃다가 눈을 감고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문다그리고 막내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레즈 할까?”

    그러지 말아요경쟁자 늘잖아요.”

    얘는~! 내가 경쟁이나 되니?”

    그녀는 벌써 세 번째 캔을 비워간다봉투에서 새 캔을 꺼내려는데 막내가 손을 잡는다.

    농담이 아니라진짜로선배가 레즈면 전 어떡해요.”

    그냥 푸념이나 늘어놓으며 기분이나 풀려던 그녀의 계획이 틀어진다이제까지 막내를 마냥 어리버리하고 귀여운 신입으로만 여기던 그녀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뭔가 자신도 모르는 게 움직이는 걸 느낀다분명 술 때문일 것이다그래그녀는 다시 손을 뻗어 마지막 캔을 딴다막내도 어느새 그녀를 따라 마지막 캔을 따고 있다.

    제가 이러는 거 술 취해서도 아니고물론 술기운을 빌려 말하는 건 맞지만술김에 하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술만 마신다천장을 보다가 캔을 보다가 책상을 보고 다시 천장을 본다그리고 다시 막내에게로 고개를 돌린다그녀가 자신을 볼 때까지 막내는 계속 그녀를 보고 있던 모양이다그녀는 막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키스… 해줄래?”

    막내는 엷은 미소를 띠고 일어선다그녀의 의자 손잡이를 잡고 가까이 다가선다한 손을 떼어 그녀의 볼을 감싸고 나머지 손마저 떼어 머리를 감싼다처음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싼다그리고 부드럽게 일으켜 세운다점점 자신 쪽으로 당기다가 자기 의자에 앉는다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웃는다서로의 어깨에 기대 간지럽힌다그리고 다시 입을 맞추며 서로의 단추를 푼다그녀는 그의 단단한 가슴에 손을 얹고 그는 커다란 두 손으로 그녀의 등을 어루만진다옷과 살결 사이의 공간에서 서로의 손이 오간다둘 모두 하의는 벗어 던지고 다시 한 의자에 앉는다책상을 뒤로 하여 의자를 뒤로 최대한 젖힌다그녀는 더 이상 신음을 참지 못하고 얕게 뱉는다천둥 소리가 들려온다셔츠와 블라우스가 점점 젖어간다비는 점점 거세지고 바로 선 사옥도 흠뻑 젖는다.

     



    토요일

    현정은 언제나 주말은 편안히 지내려고 노력한다특히 3 년 전부터는 웬만해선 주말에 약속을 잡지 않는다마침 날씨도 안 좋고 하니 그녀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 동안 소홀했던 집안일을 한다일주일 간 쌓인 먼지를 턴다청소기를 돌린다걸레질을 한다주방을 정리한다화장실 청소를 한다타일 사이 사이에 핏기가 보인다물에 다 씻긴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그녀는 솔로 타일 사이 사이를 벅벅 닦는다몇 번을 해도 깔끔해지지가 않는다.청소하는 틈에 몸에 달라 붙는 옷을 세탁기에 넣고 돌린다샤워를 하고 나니 끈적거리는 열기가 조금 가신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율무차 한 잔을 탄다그리고 소파에 앉아 TV를 튼다화면은 계속 움직이고 소리도 울린다하지만 그녀는 전혀 집중하지 않고 있다어젯밤 일만이 머릿속에 가득하다생리중인 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기분 나쁘지도이상한 증세가 보이지도 않았다최근 경험한 섹스 중 최고라 할만 했고오랜만에 절정까지 도달한 섹스였다그걸 떠올리니 그녀의 몸에 다시 느낌이 오는 것 같다그녀는 눈을 감고 달콤함을 음미한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바람에 일렁이는 나무들을 본다간 밤에 비가 오고도 하늘은 여전히 답답하고 이따금씩 바람이 분다뉴스에서는 주말에 한 번 더 비가 올 거라고 한다그녀는 아직 따뜻한 머그컵을 감싸 쥔다마지막 비가 남아서인지 그녀는 약간의 한기를 느낀다그리고 충전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다.

    부우우우웅 부우우우웅

    갑작스러운 진동에 그녀는 눈을 뜬다. ‘남○○’ 어두운 방 안에 휴대전화만이 울린다. 1 .

    이 시간에 뭐야?”

    어떠케 그얼 수 있어요?”

    잔뜩 취한 혀다.

    술 마시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어떠케… 어케 그딴 여서기랑…….”

    그녀는 막내가 말했다고 추측한다후배의 이런 반응이라면그리고 막내가 적어도 그녀에게만은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던그래서 그녀에게 접근했던 목적대로라면 이리 말했으리라. ‘내가 한 번 따먹음.’ 그녀는 그런 거에 신경 쓰지 않는다섹스는 완전 별개의 것이니까.

    그래서?”

    그래서라구요아시자나여제가 선밸 어케 생카는지 알자나여!”

    그녀는 슬슬 짜증을 느낀다.

    알고 있어다 티나.”

    근데도 그래여근데도?”

    순간 울컥한다.

    그래서 뭐난 내가 섹스하고 싶을 때 섹스도 못하니좋아하고 사귀는 사람이랑만 해야 해섹스가 그렇게 중요해너흰 대체 뭐가 문제야뭘 더 바라는데?”

    휴대전화를 집어 던진다배터리가 분리된다그녀는 침대 위에 쭈그리고 앉는다소매가 젖는다.

     



    일요일

    현정은 스포츠브라를 하고 트레이닝복을 입는다머리를 묶고 조깅화를 갖추고 집을 나선다비록 금방이라도 퍼부을 날씨이지만 이대로 집안에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대로는 너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을 거다그녀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해방이 필요하다그 해방을 위해 그녀는 신발끈을 꽉 동여맨다그리고 공원을 달린다한 바퀴를 돌고 다시 한 바퀴를 돌고 무릎이 말을 안 들을 때까지 달린다바로 그 지점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벤치 앉아서 휴식을 취한다.

    부우우우웅 부우우우웅

    다시 휴대전화가 울린다남 후배다어젯밤 일의 사과이리라고 그녀는 예상한다진동이 두어 번 더 울리고 나서 그녀는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대리님?”

    벌써부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잘못한 건 아나 보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렸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너무 늦은 시간에 연락 드린 건 알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기억을 못하는 게 그녀에게도후배에게도 좋은 일일지 모르겠다괜히 같은 회사에서 어색하게 있는 것보다는 한 쪽만 애써 모르는 척 하면 되는 거니까그리고 어제 통화를 떠올려 보면 후배보다는 그녀 스스로가 더 쿨한 것 같으니 진짜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그녀는 숨을 좀 고르고 입을 연다.

    별 거 아니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그냥 오늘 하루 푹 쉬기나 해.”

    감사합니다그럼 대리님도 편히 쉬세요.”

    그녀는 전화를 끊고 하늘을 올려다본다여전히 어둡다어제의 대화를 떠올린다후배는 그렇다 치고 그녀 자신까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곱씹어 본다사실 그녀도 궁금하긴 하다대체 그녀에게 진정 바라는 건 무엇일까그녀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 걸까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다남들이 해달라는 대로 수동적으로 살아온 것도 아니고그냥 그녀 스스로 원하는 걸 한 것 밖에 없는데점점 그녀의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그녀는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진다방금 전까지 적게나마 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던 사람들도 몸을 피하고 무리 지어 다니던 사람들도 급히 집으로 돌아간다그녀만이 빗줄기가 지상을 때리는 곳에서 비를 맞으며 달린다달리다 보니 주변엔 아무도 없고 그녀 혼자 뿐이다심지어는 우산을 쓴 이마저 없다그녀는 속도를 서서히 줄이더니 이내 자리에 멈춰 선다속옷은 물론 생리대까지 다 축 젖은 느낌이다그녀는 얼굴을 닦는다흘러내리는 빗줄기인지 다른 것인지를 연신 닦다가 양 손에 얼굴을 파묻는다.

    그래비는 떨어지는 거지.”

     



    월요일

    현정은 밝게 빛나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눈을 뜬다그 어느 때보다 산뜻한 아침이다. TV를 끄고 기지개를 켠다오늘은 날씨를 볼 필요도 없다현정은 물만 한 컵 마시고 피임약을 들고 화장실로 간다아직 구멍이 뚫리지 않은 은박과 21 개의 공간그 공간에 들어찬 21 개의 덩어리들전부 변기에 털어 넣고 물을 내린다.

    샤워를 마치고 옷장에서 옷을 꺼낸다수수하면서도 아예 밋밋하진 않은 속옷연한 민트색 스타킹에 연한 하늘색 원피스흰 재킷과 베이지색 숄더 백길게 늘어지는 귀고리어느 한 곳만을 강조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생기 넘치는 화장플라워바이겐조연분홍과 민트가 적절히 섞인 단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미용실에 가서 로즈브라운 색으로 염색과 글램 펌을 한다그 사이에 네일 케어를 받는다그 동안 그냥 혼자서 큐티클오일과 영양제 등만 바르던 손톱에 색이 하나 둘 입혀진다.

    현정은 이미 월차를 냈지만 택시를 타고 회사 앞으로 간다하늘을 올려다 본다조각 구름 둘 셋만이 파란 하늘에 떠 있다현정은 백에서 작은 우산 하나를 꺼낸다비가 내린다해도 반짝이고 구름도 없지만 지상은 젖어 간다건물도 땅도 모든 것이 젖어간다붉게.

    붉은 여우비가 내린다.

    꼬망꼬망의 꼬릿말입니다
    읽으시는 분이 계시려나...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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