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한 여자가 누워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마치 살아있는 듯 한 그녀. 그러나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여배우 김선희를 본따 만든 인형이었다.
그는 황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옷을 벗고 나신을 그 인형에 조심스레 겹쳤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대고 사랑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살아다오. 나는 피그말리온. 너에게 생명을 주는. 나를 위해. 나는 너밖에 없다. 너 또한 너밖에 없다. 나의 여신."
마치 신성한 의식처럼. 그는 매일 하던 것 처럼 기묘한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한시간여를 보내던 그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영화에 쓰이는 더미(가짜 인체 인형)를 만드는 직업을 갖고 있다. 여전히 공포영화계에서는 비싼 그래픽으로 승부하기보다는 자연스럽고 촬영하기 좋은, 그리고 그래픽보다 저렴한 인체모형을 쓰고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이 일을 시작해 경력을 쌓았기 때문에 서른 중반의 나이에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몇가지 재료만으로도 진짜같은 더미를 만들 수 있었다.
그의 집은 진짜같이 생긴 가짜 손과 가짜 발, 절단된 반신, 눈이 없는 얼굴 등 기괴한 모형들이 잔뜩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김작가님. 이번에는 이런 디자인으로 세 구 정도 만들어주세요."
전화를 건 것은 좀비가 나오는 공포영화를 새로 찍는다는 영화제작사의 피디였다. 그가 부탁한 것은 반쯤 썩은 좀비의 전신 세 구였다.
"아. 이건 시간이 꽤 걸릴거 같은데. 이가격으로는 도저히 안돼고 말이야."
"저희 사정좀 봐주세요. 업계 사정 아시잖아요. 배우 캐스팅하고 나니 다른쪽에 예산들이 다 팍 깎였어요."
"그래도 그건 다른 문제지. 시나리오좀 줘봐."
돈을 적게 주더라도 그는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내용이 마음에 들면 흔쾌히 일을 해주기도 했다. 프로듀서는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내용은 대충 좀비가 살아나서 한 여자랑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에요. 어찌보면 흔하죠?"
"흔한게 아니라 어떤 영화랑 판박이인걸."
"하지만 분위기라거나 그 사이의 에피소드같은건 달라요. 전체적으로 무겁고 슬프고 결말도..."
주절주절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시나리오를 계속 넘겼다. 그리고 그냥 넘겨버렸던 캐스팅 목록을 펼쳤다.
"아아. 주연 여배우 캐스팅하느라 돈 다썼어요. 소속사에서 돈은 엄청 부르더라구요. 연기도 별론데. 요즘 성형 너무 많이해서 얼굴도 개성 없어져서. 참. 전 반대했는데 투자사가 원하면야 어쩔수 없으니..."
"이 일 해주겠네."
"네?"
"일 하겠다고. 자네가 부른 금액으로. 오케이?"
"네...네. 감사합니다."
프로듀서는 문밖을 나가면서 연신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마치고 들어온 그는 작업장으로 달려갔다. 작업장의 책꽂이 한 켠을 누르자 비밀의 공간이 열렸다. 그는 환희에 찬 얼굴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김작가님 계세요?"
석달 정도가 지나고 영화 스텝들이 그의 작업장을 찾았다. 집은 고요했다. 문을 살며시 열자 마치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 쪽지가 문사이에서 툭 떨어졌다. 열쇠는 우편함에 있으니 문단속 잘 하고 더미는 작업장에 펼쳐놨으니 잘 가져가라는 내용이었다. 이미 입금도 해 놨겠다. 연락도 미리 해 놨겠다. 시간에 쫓겼던 그들은 얼른 들어가 더미 세 구를 가지고 나갔다. 평소보다 조금 무거운 듯 한 느낌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촬영은 순조로웠다. 이번에 촬영할 장면은 좀비 사냥꾼인 여주인공이 무덤가에서 시체들이 좀비가 되지 않도록 특수한 창으로 찔러 땅에 고정시키는 장면이었다. 여배우 김선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열연을 펼쳤다. 김작가가 만든 세 구의 시체가 긴히 쓰이고 있었다. 네 번째 자리에는 남자 주인공이 좀비분장을 하고 누워있었다. 촬영내용은 이렇다. 여주인공이 시체들을 확인하고 창으로 찌른다. 네번째 자리에 있던 남자주인공 좀비는 그녀가 공격하는 것을 막고 그녀를 껴안고 쓰러뜨린다. 그 장면부터 좀비와 여배우의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배우의 동작에 자칫하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긴장했다.
첫번째, 두번째 시체를 확인하고 김선희는 그들의 가슴에 깊게 창을 찔러 다시는 땅에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문제는 없었다. 세번째 시체도 확인하고 가슴을 창으로 찌르려 했다. 그런데
시체가 창을 잡고 일어나 다른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꺄악."
촬영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두컴컴한 무덤가에서 반쯤 썩은 시체가, 아니 일단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었던 그것이 움직여 여배우를 잡은 것이다. 멀찍이서 모니터로 지켜보던 감독도 눈을 의심했다. 혹시나 세번째와 네번째의 위치가 바뀐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네번째에 대기하고 있던 남자 배우도 놀라 튀어나갔으므로 그럴 가능성은 사라졌다. 여자 스텝들의 비명이 시작되었다.
"저 인형 잡아!"
"살려주세요."
"이거 뭐야! 경찰불러요. 빨리."
인형에게 끌려가는 여배우. 우왕좌왕하는 스텝들. 그 혼란을 멈춘 것은 감독이었다.
"저거 누군지 알 것 같으니까. 겁내지 말고. 우리가 아는 사람이야. 빨리."
감독의 지시에 의해 연출부와 조명팀 장정들이 장비를 내려놓고 여배우 김선희를 잡고 끌고가던 인형을 잡았다. 여배우는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잡힌 손목과 팔에 손자국이 깊게 나 있었다. 인형은 네 명의 남자에게 팔이 포박된 채 몸을 비틀고 있었다.
"저거 더미 만드는 김작가가 틀림없어. 집을 비웠다고 했을 때 눈치챘지. 시체로 변장해서까지 여배우를 만나고 싶었나?"
감독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치고는 더미에게 다가갔다. 피로 얼룩지고 눈알이 반쯤 흐르고 있는 징그러운 얼굴 피부에 손을 갖다댔다. 사람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 장면을 지켜봤다.
와그작 -
으아악.
그 좀비가 손을 물었다. 감독의 손은 그 좀비의 입안에서 이미 절단되어 있었다. 다시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 좀비는 자신을 잡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발버둥쳤다. 몸의 껍질이 벗겨지고 있었다. 마치 매미의 허물처럼 갈라진 틈에서 흰 피부를 가진 나신의 여자가 나왔다.
김선희의 얼굴을 쏙 빼닮은.
그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여전히 시체의 껍질을 잡고 있는 남자 스텝의 옆구리를 물어뜯었다. 또한 벌벌 떨며 주저앉아버린 여배우 김선희의 눈을 손가락으로 쑤셨다. 카메라. 조명기기. 붐 마이크를 든 남자 몇명이 장비를 들고 그 인형에게 덤볐다. 하지만 순식간에 네명정도가 그 여자에게 처참하게 물려 뜯겼다. 남은 사람들은 영화 장비를 버려두고 도망쳤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그 인형은 입에 김선희의 살점을 문 채 도망치는 사람들을 초점없이 바라보았다.
다음날 낮에 경찰들이 수사를 하러 문제의 장소로 모였다. 폴리스라인 안에는 세구의 시체가 있었다.
하나는 여배우 김선희. 또 하나는 심하게 목를 물려 그자리에서 죽은 스텝 한 명. 그리고 또 한명은 심장에 말뚝이 박힌 채 죽은 더미 제작의 대가 김작가였다.
"김작가님은 평소에도 김선희씨를 좋아했었던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말도 안되는 가격에 일을 해준다고 한 것도 그렇고. 집에 김선희씨 사진도 붙어있던 것 같아요."
깁스를 한 피디가 말했다.
"감시가 소흘한 틈을 타 좀비분장을 지우고 김선희씨를 납치하고, 그 사이 자기가 숨겨온 가짜 김선희 인형을 방치한다. 사람들이 당황한 사이 그는 김선희씨를 데리고 유유히 빠져나갈 생각이었겠죠."
박형사가 말했다.
"좀비분장을 한 상태로 오랫동안 참기는 어려울테니 수면제같은걸 먹었을수도 있겠네요. 그렇지 않고서야 말뚝을 박기 전에 깨지 않을리가 없으니."
피디가 말했다.
"그럼 그 여자는 어떻게 된 걸까요?"
"글쎄요. 악령이라도 씌인게 아닐까요? 아니면 실제 사람을 공격한 건 짐승인데 당신들이 공포에 휩쌓여 착각했다거나."
"하지만 그 여자 더미가 없다는건 스스로 이동했다는 뜻이잖아요."
"그렇겠...군요."
막내 형사인 윤 형사가 어렵싸리 운을 띄웠다.
"이런 생각은 어떤가요? 그는 김선희를 납치하려고 한게 아니라 단지 그 인형을 김선희와 만나게 하려고 한 짓이라면..."
"그건 왜?"
"뭐 상식적인 일로는 알 수 없죠. 인형을 조종하거나. 혹은 종교적인 이유로 그랬다면요?"
"그럼 뭐 처키의 탄생이지. 어쨌든 이번 건은 아무리 애를 써도 미해결 사건이 되겠군."
박형사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파지직. 지직-
흰 피부의 여자. 하지만 인간이 아닌 여자가 하염없이 산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나무와 가시에 찔리지만 피 한방울 나지 않는다.
한 여자가 밤길을 걷는다. 꽤나 예쁜 얼굴이 다. 웬지 여배우 김선희와 닮았다.
여자는 흰 여자와 마주친다. 벌거벗은 피투성이의 여자를 보고 여자는 소리지른다. 그러나 그 비명은 이내 어둔 밤 속에 묻혀버렸다.
fin
by. 쿠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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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처키인형이야기처럼 연작으로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다음 이야기를 쓸 수 없어서 단편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공포와 함께 열악한 영화제작현장에 대한 고발도...할겸 써봤습니다
그전에 쓴 글에 달린 덧글들 다 잘 보았습니다. 미숙한 실력으로 쓴 글에
여러 좋은 이야기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