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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길 잃은 날의 지혜
큰 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작은 진실부터 살려 가십시오
큰 강물이 말라갈 때는
작은 물길부터 살펴 주십시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흙과 뿌리를 보살펴 주십시오
오늘 비록 앞이 안 보인다고
그저 손 놓고 흘러가지 마십시오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면서도
세상을 닮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마십시오
작은 일 작은 옳음 작은 차이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작은 것 속에 이미 큰 길로 나가는 빛이 있고
큰 것은 작은 것들을 비추는 방편일 뿐입니다
현실속에 생활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세상을 앞서 사는 희망이 되십시오
김정웅, 추억은 사랑처럼 눈 내리어
자정에 끓던 물
새벽에 잦아들고
빈 벌판에 거짓 사랑처럼
끝없이 흰 눈 내릴 때
잠들지 마라
그대 영혼이 깊이 잠들 때
육신만이 거지처럼
불가로 모여든다
보라
흰 눈 속에 붉게 핀
꽃들의 온도
쓰레기통 속에서
색종이꽃들 밤새 웃고
벨을 누르면 언제나
꿈처럼 울린다
돌아보지 마라
찬 눈 밑에선
찬 눈 밑에선
영하의 잘디잔 눈금들이
언 발가락을 비비고 있다
한겨울 깊은 어둠을
자신의 체온만큼 조금씩 녹이며
이루지 못한 행을 다시 이루려고
깨알처럼 박혀 있다
돌아보지 마라
돌아보지 마라
추억은 사랑처럼 눈 내리어
그대를 잠재운다
김정란, 슬픔의 끝에 가 보았니
내가 혀 깨물고 입다문 그곳에
팔팔한 짐승들 몇 마리
생매장한 그 무덤 보았니
내가 그 무덤에 술 뿌리며
오 제발 죽어라 죽어라 하고
우는 것 보았니
다시는 생을 받지 말라고
내가 이승의 목숨을 걸고
그 무덤 다지고 다지는 것 보았니
피눈물이 이슬로 새벽에 말갛게 눈뜨는 것
내가 생매장당한 슬픔의 짐승들 곁에서
슬픔의 힘으로 문득 어느날 아침 말개지는 것 보았니
새털구름 생의 도화지 가득 그려지는 것 보았니
최상고, 빗물
빈들에
단비 내리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
들녘으로 모이네
비로소
눈 뜬
풀 잎
혼자서 일어나
빗줄기 따라
하늘로 머리를 드네
나 어릴 적에도
비가 내려
갈라진 손바닥에 빗물 고이더니
부끄러운 나이 되어도
가슴에 빗물 고이네
김영천, 안개비
부옇게 안개비를 뿌린다
잡풀처럼
아무렇게나 서서
함부로 비를 맞는다
기세가 약하여도
쌓이면 큰 화가 되던 것들
그 이치를 모를까만
이 세상을 두고
비는 너무 관념적이다
우리가 소통하기에는
강물처럼 이렁이렁 하나로 흘러가기에는
지금은 참 어중간하다
작은 풀꽃들이
속마음 사알짝 내비칠까 하다가도
부끄러워 뚜벅뚜벅 제 발소리를 앞질러 간다
참 오랜만에 만끽하는 외로움인데도
어두운 구름 사이로 삐져나오는 하늘을 보며
제 뒷통수를 보듯
픽, 웃음이 나온다
나는 아무래도
이런 쓸쓸함 따위에는 도무지 신중치 못하다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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