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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history_22943
    작성자 : 칼세이건
    추천 : 7
    조회수 : 2630
    IP : 210.182.***.2
    댓글 : 1개
    등록시간 : 2015/09/14 11:4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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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츠 하버를 아십니까? 위대한 과학자가 국뽕이 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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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들은 그들이 이룩한 발명 혹은 발견이 “인류에게 커다란 이익을 안겨 주었다”는 평가를 받아서 그러한 명예를 갖게 된 것이다. 수 많은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는 업적을 쌓는 과정에서 비 윤리적인 행동으로 비난을 받는 이들도 있었고, 노벨상 수상 이후에 반 사회적 언행으로 비난을 받는 이들도 있다. 물론 수상자 중에는 열심히 노력한 결과가 우연한 행운과 겹쳐진 경우도 드물지 않고, 또한 수상을 못한 과학자의 업적 중에는 노벨상 수상을 하고도 남을 업적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노벨 수상자 중에서도 프리츠 하버만큼 오늘날까지 회자되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과학자도 드물 것이다. 그의 노벨상을 받은 업적은 인류에게 커다란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일이었지만, 과학자로서 전쟁 중에 그가 선택한 행위는 많은 이들에 의해서 반 인륜적인 일로 평가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과학적 업적은 위대한 인류의 유산으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며, 노벨상의 업적 말고도 많은 과학에 대한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만약에 과거에 그가 처한 시대 상황과 그의 사회 교육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 현재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는 “빌어먹을” 이라는 욕을 들을 만한 행위를 한 과학자의 한 사람이라고 평가될 수밖에 없다.

    하버는 1868년 12월 9일에 브로쵸와프(Wroclaw) 도시(폴란드)에서 아버지Siegfried Haber와 어머니 Paula Haber 사이에 태어났다. 부모들은 서로 사촌지간 이었다. 브로쵸와프는 독일이 통일을 이룬(1871년) 후에는 블레슬로(Breslau)로 지명이 변경 되었다. 하버는 죽기 전까지 거의 평생을 자랑스러운 독일인으로 살았지만 그가 태어난 곳은 폴란드였다. 하버는 태어난 지 3주 만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의 아버지는 하버로 인해서 자기 부인이 죽었다는 믿음으로 평생 동안 아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하였으며, 늘 긴장을 유지한 채로 지냈다.


    하버는 어린 시절에 책 읽기를 좋아했고 시로 자신을 표현하고 짧은 시를 쓸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었다. 처음에는 비교적 자유분방한 Johanneum School에 다녔다. 자유분방하다는 의미는 모든 종교(신교(개신교), 구교(가톨릭), 유대교)에 개방되었던 학교였다. 나중에는 개신교와 관련이 깊은 수녀원 부속학교 이었던 Elisabeth High School에서 공부를 했다. 수녀원 부설학교의 특성에 맞게 인간성에 강조를 둔 교육이 주를 이루었고, 수학과 물리를 동시에 가르쳤지만 화학실험은 교과 과정에 없었다고 한다. 물론 하버가 물리화학에 관한 연구분야에서 이룩한 업적은 고교과정에서 배운 수학과 물리가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어떤 것을 계기로 화학에 눈을 뜨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문서나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아버지가 염료 판매업에 종사를 했더라도 하버가 화학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염료가 화학물질이기 때문에 평소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고 추정은 할 수 있다. 하버는 고등학교 때부터 집에서 처음으로 화학실험을 했다고 하니 호기심이 많은 학생이었을 것이다. 화학실험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냄새, 간단한 폭음 소리로 인해서 곧 바로 가족들에게 화학실험을 한 사실이 들켜 버렸고, 가뜩이나 사이가 좋지 않은 아버지로부터 실험 금지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엄마를 잃은 조카를 불쌍하게 여긴 외삼촌이 자기 사업장의 사무실 한편을 내주어 실험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하버에게는 화학에 관심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하버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의 기록은 하버가 재능이 있고, 매우 열심히 노력을 하고, 성적이 좋은 학생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타고난 재능도 있고, 부지런함도 갖춘 모범생 이었을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라틴어 작문은 불만족(unsatisfactory) 등급을 받았지만 많은 과목에서 만족(satisfactory), 좋음(good)을 받았다. 특히 수학과 역사 과목에서는 우수(very good, Sehr gut) 등급을 받았다. 하버의 아버지(Siegfried)는 큰 아들인 하버가 자기 사업을 계속 이어가길 바랬다. 그러나 미래의 직업으로 화학자를 꿈꾸던 하버는 외삼촌과 계모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바꾸는데 성공을 했고, 1886년 겨울에 집을 떠나서 베를린에서 대학을 다닐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8.1 하버의 대학생활과 박사학위 과정

    자기가 살던 고향에서 대학을 다니려면 아버지와 갈등이 있는 집에서 다녀야 했다. 그러므로 집을 떠나 베를린(Berlin)에 있는 대학(Friedrich Wilhelm Univ.)에 다닐 수 있는 기회를 잡은 하버는 여러 모로 신이 났었다. 1810년에 개교할 당시에는 University of Berlin 으로 시작되었으며, 1828년에 Friedrich Wilhelm Univ.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그러므로 하버가 입학할 당시인 1886년에는 Friedrich Wilhelm Univ.대학이었고, 현재는 Humboldt University of Berlin(1949년부터 학교 이름이 변경)이 하버가 입학을 한 대학이다. 하버가 베를린 대학으로 가고 싶은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베를린 대학 부설 화학연구소(Institute for Chemistry)에는 유명한 과학자가 있었다. 유명한 화학자 Hofmann(August Wilhelm von Hofmann: 본인의 이름이 붙여진 화학반응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유기화학자, Hofmann rearrangement(아마이드가 아민이 되는 유기화학 반응)와 Hofmann elimination(아민으로부터 3차 아민과 알켄이 형성하는 유기화학반응))이 있었다.

    또한 유명한 물리학자 Helmholtz(Hermann Ludwig Ferdinand von Helmholtz: 의사이며 물리학자, 에너지 보존 법칙, 전자기학, 화학 열역학 같은 분야의 위대한 물리학자로서 생리학 및 생리 광학 등에도 큰 기여를 한 인물)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1892년부터는 베를린 대학의 화학연구소 소장이 Hofmann에서 Fischer(Hermann Emil Fischer, 1852-1919, 1902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유기화학자, 비대칭 탄소를 포함한 유기화합물의 3차원 공간 배치에 투영도, Fischer projection은 현재 대학에서 배우는 유기화학 교과서에 빠짐없이 실려 있다.)로 바뀌게 된다. 그 당시 베를린 대학의 3대 연구소 중에서도 화학연구소의 명성은 대단했다. 하버가 노벨상도 받고 화학분야에서 저명인사가 되었을 때에도, 하버 자신이 베를린 대학에서 Fisher의 명성을 이어 받을 교수로 자신이 지명되었다는 것을 평생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하버는 베를린 대학의 화학연구소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하이델베르그 대학(University of Heidelberg)으로 학적을 옮겼다. 하버가 베를린 대학에 입학 당시에 Hofmann과 Helmholtz는 모두 60대 중 후반으로 접어든 노 교수들 이어서 젊고 활력이 넘치는 하버를 매료시킬 만한 강의 열정이 다소 부족했을 것이라는 점도 하버가 베를린 대학을 이적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베를린 대학에서는 Wilhelm Dilthey(1833-1911, 헤겔의 뒤를 이어 베를린 대학에서 1882년부터 강의한 철학자) 교수의 철학 강의에 빠져 들었고, 후에 다시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 크게 도움을 받았다. 한편 하버가 화학에서 관심이 멀어진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하버는 하이델베르그 대학으로 적을 옮겨서도 화학을 계속 공부했기 때문이다.

    하버가 하이델베르그 대학으로 옮겨갈 당시에 하이델베르그 대학에는 Robert Busen 교수(1811-1899)가 재직하고 있었다. 분센은 가열된 원소의 방출 스펙트럼을 분석해서 Gustav Kirchhoff(전기회로를 해석할 때 사용되는 Kirchhoff의 법칙으로 유명한 한 물리학자)와 공동으로 세슘(Cs)과 루비듐(Rb)을 발견을 한 과학자이다. 특히 화학의 한 분야로 중요하게 인식되는 광화학의 개척자이다. 그이 이름이 붙여진 분센 버너(burner)는 현재에도 실험실에서 간단하게 가열하고 태우는 목적으로 널리 이용되는 실험기구이다. 평생 특허를 내지 않아서 분센 버너의 제조 판매에 대한 권리마저 그의 조교에게 전적으로 양도했다는 것은 분센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이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과학에 대한 열정을 불살은 과학자였다. 비록 분센 교수의 나이가 70을 넘었지만, 하버는 분센 교수의 연구 실험실에서 연구자의 자세, 즉 실험의 정확성, 끈기 있게 추구하는 열정, 정밀한 측정의 중요성을 충분히 배울 수 있었다. 후에 하버 자신이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며, 엄한 훈련을 시킨 것은 모두 분센 교수로부터 전수 받은 경험과 지도력이 뒷받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격한 선생 문하에서는 제대로 훈련과 자세를 갖춘 후학들이 계속해서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하버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 카를수루에 공과대학(Karlsruhe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가르칠 때에도 분센 화염(flame)을 연구하였고, 유사한 주제를 학생들의 연구과제로 주었다. 하버가 과학자로서 필요한 태도와 접근 방법, 정신력은 분센 교수 연구실에서 기초를 닦았으며,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을 한 단계 끌어올려 세계적인 학자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하버는 화학은 물론 다른 방면에서도 열심히 대학생활을 보냈던 것 같다. 대학생 때 생긴 평생에 남을 상처를 얼굴에 남겼다. 그것은 남학생만의 사교클럽에서 명예가 걸린 문제로 결투를 벌이다가 입은 상처라는 설도 있지만, 하버의 용감한 성격으로 인해 사고로 다쳤다는 설도 있다. 1889년 여름에 하이델베르그를 떠나 의무 복무를 하기 위해서 고향인 Breslau로 갔다. 그 당시 독일에서 대학생들은 반드시 의무적인 군 복무를 마쳐야 했고, 모든 비용은 자신이 지불하는 조건이었다. 포병연대에서 1년간 근무를 하면서 근처에 있는 Breslau 대학의 철학 강의도 듣고, 저녁에는 매우 학술적인 문학 클럽에 참석했다. 하버는 약 10년 후 1901년에 결혼을 하는데 부인이 된 Clara Immerwahr을 처음으로 만난 것도 이 때였다. 하버 보다 2살 어린 부인은 아버지가 화학자인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신도 Breslau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당시 여성이 사회 차별적인 대접이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사학위를 받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으며, 그 대학에서는 여성으로 최초의 화학박사가 되었다. 특히 하버는 전문직 동료로서 Clara Immerwahr를 인정하기 보다는 자신과 가족을 돌보는 현모양처의 길을 더 원하고 강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여성의 권리가 거의 보장되지 않는 사회 혹은 시대를 살면서 엘리트 여성으로서 겪는 심정 고통도 매우 컸을 것이다. 또한 가정보다는 자기가 속한 사회와 과학 연구에 더 많은 관심과 정열을 쏟았던 하버와 자신의 일도 추구하면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기를 원했던 Clara Immerwahr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 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고 하버가 독가스를 연구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주업무 담당자가 되면서 갈등과 불만의 폭이 더욱 깊어갔다. 결국 Clara Immerwahr는 1915년 5월 1일에 하버가 보는 앞에서 자기집 정원에서 하버의 권총으로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사랑하는 아들(Hermann Haber)은 겨우 12살 이었다.

    1890년 가을에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온 하버는 Carlottenburg Institute of Technology(현재는 Berlin Institute of Technology이며, 독일에서 가장 큰 공과대학 중 하나이다.)에 등록을 하고 학업을 계속했다. 그곳에서 지도교수인 Carl Liebermann교수(그 역시 하버와 마찬가지로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해서 베를린 대학에서 Adolf von Baeyer 교수(1905년도 노벨상을 수상한 유기화학자, 염료 인디고(indigo)를 합성)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은 화학자)의 지도로 공부와 연구를 계속했다. 드디어 1891년 5월에 Friedrich Wilhelm 대학(현재는 Humboldt University of Berlin)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를 가르친 Liebermann 교수는 Carlottenburg Institute of Technology과 베를린 대학 교수직을 동시에 겸하고 있었다. 그런데 Carlottenburg Institute of Technology는 1899년까지는 박사학위를 인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서 하버는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심사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대학, Carlottenburg Institute of Technology(현재: Berlin Institute of Technology), 베를린 대학(현재: Humboldt University of Berlin)에서 학교를 빛낸 뛰어난 졸업생 명단에 하버가 모두 포함된 것도 하버가 각 대학에서 공부와 학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하버는 1886년 겨울 베를린 대학을 시작으로 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해서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본격적인 훈련을 받았고, 결국에 다시 베를린 대학에서 1891년 5월에 22세의 나이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현재의 학위 제도와는 그때의 제도가 많이 다른 것을 감안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약 5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머리도 매우 뛰어났고,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버는 유기화합물의 반응에 대한 연구를 했고,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했다. 하버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친구에게 자신이 학위논문 내용에 대해서 얼마나 실망하고 있는지, 심지어 학술 잡지에 발표도 못할 수준이라고 자책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특히 심사위원의 한 사람인 물리학자의 질문, “전해질 용액의 저항을 어떻게 측정하는가?”에 대한 답변을 제대로 못해서 학위 논문의 성적이 깎였다. 그러나 철학 지식을 파악하는 질문에 답변을 매우 잘했고, 그 성적을 바탕으로 전체성적은 우등(Cum Laude)등급을 받았다. 오늘날 박사학위 심사과정과는 매우 다른 풍경임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박사(Ph. D., Doctor of Philosophy)학위 논문 심사를 받으려면 학위과정에서 실험한 내용, 심사위원의 마음대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학의 모든 주제는 물론, 심지어 철학에 관한 질문도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피 심사자인 학생들은 박사 학위 심사 과정이 현재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힘들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하버가 자신이 처음 베를린 대학 신입생으로 강의에 심취했던 Wilhelm Dilthey 교수의 철학 강의가 박사학위를 자격 심사를 받는데 커다란 도움이 된 것이었다. 하버는 그런 것을 예상하고 철학 강의를 열심히 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8.2 박사 학위 이후 전문가의 길, Karlsruhe 공과대학에서 지낸 17년

    1894-96 teacher, 1896-1906 lecturer, 1906-1911 professor

    1891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스위스 Zurich(Swiss Federal Institute of Technology)와 독일의 Jena 대학(University of Jena)에서 무보수로 연구조수로서 경험을 쌓았다. 그 후에 Leipzig 대학에서 물리화학 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Wilhelm Ostwald 교수(1909년 노벨상 수상자, 촉매, 평형, 반응속도를 연구했으며, 물리화학 분야를 개척한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 받고 있다. 암모니아를 원료로 하여 질산을 만드는 화학 공정를 Ostwald 공정이라 한다.)의 연구 조수로 일하기를 바랬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버는 모두 3번이나 Ostwald의 연구실험실에 합류하기를 바랬고 문을 두드렸지만, Ostwald 교수는 끝내 하버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버는 이 때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종교를 변경하였다. 왜 종교를 변경하였는지 하버의 생각은 기록으로 남은 것은 없다. 여러가지 정황은 짐작해 볼 수 있다. 유대교로서 상류사회에 진입을 위한 걸림돌을 제거한 행동일 수도 있고, 아버지에 대한 오랜 반감을 행동으로 옮긴 것일 수도 있고, 통일 독일에서 문화적 유행을 따른 행동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군복무에서 장교로 진급을 하지 못했던 점, 하버 아버지가 아들의 개종사실에 분개했다는 점, 그 당시 많은 유대교들도 개신교로 종교를 변경하였던 점은 앞선 짐작들이 타당하지 않나 생각된다.

    1894년도에 하버는 Karlsruhe 공과대학(Karlsruhe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Hans Bunte 교수의 연구조수로서 본격적으로 전문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Bunte 교수가 처음 하버에게 준 연구과제는 ‘탄화수소의 열분해’ 대한 것이었다. 하버로서는 그 동안 전혀 경험하지 못한 연구분야였다. 탄화수소에 열을 가해서 분해가 되면 분해 생성물로 무엇이 있고, 그 생성물의 양은 얼마나 되는지를 분석하는 일이었다. Bunte 교수 실험실을 거쳐간 여러 연구자들이 도전해서 실패한 연구를 과제로 던져 주었지만, 그는 분석방법을 면밀히 검토하고 개선한 결과 연구에 상당한 진전을 이룩하였다. 그 당시 열악한 연구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방향족 탄화수소의 탄소-탄소 결합은 탄소-수소 결합보다 더 열 안정성이 높다는 것과 지방족 탄화수소의 탄소-탄소 결합은 오히려 탄소-수소 결합보다 열 안정성이 낮다는 것을 밝혀냈다. 교수 자격을 얻기 위한 논문(habilitation thesis)의 주제도 열 분해(pyrolysis)에 관한 것으로 처음 독립적인 연구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열분해에 관한 연구분야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연구분야에 속하였다. 그렇지만 하버의 열 분해 연구에 대한 그 당시 업적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서도 고전에 속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라고 평가가 되고 있다.

    객원강사로 계속 Karlsruhe 공과대학에 재직하면서 하버는 물리화학 분야에 커다란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전기화학(electrochemistry)에 많은 관심을 갖고 그 분야에 뛰어 든다. 전기화학은 영국에서 John Daniell(Daniell 전지를 개발한 과학자), Humphry Davy(Fardaday 스승이며, 본인도 알칼리 금속을 발견하는 등 전기화학 분야에서 아주 중요한 업적을 남긴 영국의 과학자), Michael Faraday(패러데이 법칙으로 유명한 화학자 겸 물리학자)로 이미 시작이 되었다. 독일에서는 Svante Arrhenius, Wilhelm Ostwald, Walther Nernst등과 같이 근대 전기화학의 기초를 세운 유명한 과학자들이 전기화학의 기본원리와 실험방법 등과 같은 뼈대를 다듬어 가는 중 이었다. 3번이나 Ostwald 연구 조수로 지원했지만 거절 당한 하버는 이제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 되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매우 다행스럽게도 그런 하버에게 Karlsruhe 공과대학에 전통 전기화학을 섭렵한 화학자가 왔다. 1896년에 하버의 전기화학에 대한 욕구를 채워줄 스승이자 친구인 Hans Luggin(1863-1899: Luggin Capillary 혹은 Luggin-Haber Capillary라는 전기화학 실험에서 중요한 도구 중 하나)이 강사로 부임을 한 것이다. Karlsruhe에 오기 전에 Luggin은 Stockholm에 있는 Arrhenius의 실험실에서 2년 동안 편극 현상에 대한 이론과 실험으로 훈련을 잘 받았으며, 이론 전기화학분야에서 실력이 탄탄한 신진학자였다. 하버는 자신이 펼쳐 나가길 원하는 화학분야(전기화학, 물리화학)에서 이미 대가들로부터 탄탄한 교육을 받은 Luggin이 온 것을 누구보다 기뻐했을 것이다. 하버가 연구자로서 그토록 연구지도와 수련을 받고 싶어했던 Ostwald의 연구내용도, 유명한 Nernst의 연구도 잘 파악하고 있고, 전기화학 이론으로 잘 무장이 된 Luggin은 하버에게는 더 없은 좋은 동반자이자 스승였던 것이다. 학교 내에서 수많은 토론과 질문이 둘 사이에 계속 이어졌으며, Luggin이 부임한지 2년 만인 1898년에 하버는 전기화학에 관한 책(Outline of technical electrochemistry based on theoretical foundations: Grundriss der technischen Elecktrochemie auf theoretischer Grundlage)을 발표했다. 그 책은 전기화학의 연구를 소개하고, 특히 하버 자신의 연구결과도 담겨 있었다. 그 중에 하버 자신이 수행한 연구에 Nitrobenzene의 환원 연구는 전기화학자는 물론 유기화학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다. 화학물질을 환원시키는 데 시약을 사용하지 않고 전위(potential)를 조절하여 환원제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된 것이었다.

    하버는 유기화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전극을 이용해서 유기화합물을 환원시키는 연구는 하버 자신에게도 흥미가 있었을 것이며, 동시에 새로운 길에 대한 도전이라고 느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하버는 유기화합물의 전기화학적 연구 결과를 제 5회 독일 전기화학회 학술발표장에서 발표했다. 흥미로운 것은 독일 전기화학회가 Leipzig에서 열렸고, 하버가 그토록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했던 Wilhelm Ostwald(그 당시에는 Leipzig 대학에 재직)가 하버의 발표장에서 좌장(chairman)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많은 관심을 끈 발표와 상당한 분량의 연구결과로 인해서 하버는 대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점점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하버의 연구 결과는 Svante Arrhenius, Wilhelm Ostwald, Walther Nernst의 연구실에서 배출된 제자들의 관심을 크게 끌기 시작했다. Karlsruhe 대학에서는 하버의 능력을 알아 차리고, 원로 교수들이 하버를 동료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많은 후원과 지원이 뒤 따랐으며, 1898년 부교수로 승진을 하고, 종신직으로 지위가 변경된다. 하버가 Karlsruhe에서 일을 시작한지 4년 만에, 그것도 자신이 스스로 개척한 전기화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었다.

    하버는 1901년 8월 3일 Clara Immerwahr(1870-1915)과 결혼을 했다. 그녀는 Breslau에서 교육도 받고 교사 자격을 갖추었다. 그렇지만 화학을 계속해서 공부를 했고, 결국에는 Breslau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전통적인 유대교 가문에서 교육을 잘 받았다. 유대교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 여성으로서 드러내 놓고 받는 차별은 물론 열악한 실험실 환경에서도 연구에 매진하여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보아서 끈기와 용기를 갖춘 매우 다부진 여성이었을 것이다. 하버는 연구 실험실 밖에서도 사교 활동이 활발했다. 집으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초대해서 과학, 철학, 사회 등 매우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도 했다. 하버의 외향적인 성격과는 달리 Clara Immerwahr는 차분하고 내성적이 성격이었다. 하버가 1915년 Ypres에서 독가스 공격을 지휘하고 나서 잠시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 그녀는 하버의 권총으로 자살을 했다. 아마도 그녀 자신이 화학자로서 하버가 연구소에서 전쟁 중에 하는 일의 내용을 훤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 일의 결과가 어떨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예측했을 것이다. 더구나 남편에게 그 일을 중단할 것을 간청도 했고, 노력을 기울여 보았지만, 가정보다는 일과 조국에 더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는 남편이 악마처럼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 역시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독성 물질의 개발에 따른 사고로 인해서 가까운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도 했었고, 그것으로 인해서 심적 고통도 매우 심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두 번째 결혼마저도 이혼으로 끝이 났고, 많은 돈을 위자료로 지불하였으니 하버의 가정 생활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1901년에 있었던 결혼의 기쁨도 잠시였고, 하버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그것은 Karlsruhe 대학에서 같은 해에 물리화학과 전기화학에 대한 강좌를 개설하려고 교수를 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좌의 대표 교수로, 물리화학 연구소 소장으로 하버 대신에 Max Le Blanc(Max Julius Louis Le Blanc, 1865-1943, Max Le Blanc 역시 유기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유기화학에 대한 흥미보다 전기화학에 관심이 있어서 Wilhelm Ostwald의 연구실에서 연구 조수로 연구를 하던 과학자)가 임명이 된 것이었다. 하버는 지도교수인 Bunte교수의 도움으로 물리화학 연구소에서 산업에 필요한 기술과 연관이 된 전기화학과 가스 화학에 대해서 계속해서 가르치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졌다. 그러나 그 실망감은 아마도 굉장히 컸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미국의 전기화학(미국 전기화학회는 1902년 4월 3일 Philadelphia에서 처음 개최되었고, 9월 14-21일 Niagara Falls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의 진보된 기술을 경험하고 돌아볼 기회가 하버에게 주어졌다. 약 4개월 간 미국으로 파견하는 과학자 선발과정에서 하버가 선정이 된 것이었다. 선발이 된 것은 하버의 전기화학 실력을 독일 학회에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비록 Karlsruhe 대학의 물리화학 강좌의 대표교수직과 연구소장 직을 맡지 못해서 우울했지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토대가 주어진 것이었다. 19세기 말에 미국과 독일은 전기화학 분야에서 활발한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전기화학을 산업에 적용할 수 있었던 것은 전력 생산이 대량으로 실현되기 시작했던 1880년대 였다.

    전력생산에서 독일보다 앞서 있었던 미국은 전기화학과 관련된 화학산업 분야 및 대량의 전기를 이용할 수 있는 산업기술에서 앞서가고 있었다. 독일 학자로서 미국 전기화학회(Niagara Fall 회의)에 참석한 하버는 Charles Martin Hall(1863-1914, 알루미늄을 전기화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처음으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열은 미국 발명가 및 화학자)과 같은 유명한 산업계를 이끌고 있는 선구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미국을 돌아본 하버는 독일과 미국 대학의 차이점, 산업화에 대한 전망등을 독일 전기화학회지(Zeitschrift fur Elektrochemie)에 발표했다. 이 기록은 미국 측에서는 하버를 산업 스파이라고 힐난 할 정도 자세하고 구체적이었다. 미국 과학자나 사장들이 개인적이라고 알려준 내용까지 담고 있었다. 하버의 세심한 관찰력과 지적 호기심에 찬 도전 정신이라면 충분히 그런 비난을 들을 만한 중요한 기록도 빠트리지 않고 챙겼을 것이라 여겨진다.

    하버는 계속해서 Karlsruhe에서 화학 기술(염료, 프린팅)에 관한 강의를 하면서 전기화학의 연구를 계속했다. 전기화학적 비가역적 환원(니트로 벤젠의 환원)과 가역적 환원(quinine과 hydroquinone 의 산화 환원 반응)에 대한 일반 이론과 개념도 하버가 처음으로 발표하였다. 또한 철의 부동화(passivity)에 대한 문제도 연구 대상이었다. 산업체에 적용할 수 있는 화학 기술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자연스레 산업체 자문(consulting)을 맡게 되었다. 암모니아의 합성을 포함하여 하버의 연구 결과는 산업에 적용되는 것이 많았고, 독일의 산업 발달과 더불어 다른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화학회사의 자문을 맡았다.

    전기화학을 스스로 공부하여 지식을 쌓고 연구한 하버는 그것을 화학 공정에 어떻게 적용할지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가스 반응을 물리화학적 관점에서 연구한 경험을 바탕으로 화학열역학 분야에도 깊은 관심가지고 연구도 계속했다. 하버는 어떤 주제에 빠져들어서 해결해야 된다고 마음을 먹으면, 그것을 해결할 때까지는 매일 새벽 2시까지 책과 논문을 읽고 생각에 빠졌다고 한다. 하버는 머리도 좋았을 것이라고 판단이 된다. 그러나 본인의 노력과 정신력은 일반인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난 것으로도 짐작이 된다.

    훗날 암모니아의 합성에 대한 연구도 열역학을 바탕으로 화학반응을 생각하고 연구한 결과였다. 그 당시 많은 과학자들이 도전했던 암모니아의 합성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도 우연한 발견이라기 보다는 하버가 과학자로서 뛰어난 역량을 미리 갖추고, 노력하고 준비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화학산업이 발달해 가면서 화학반응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예측하는 일이 중요해 졌다. 당연히 화학반응에 따른 에너지의 방출과 흡수의 문제를 다루는 데서 출발한 열역학은 매우 중요한 화학의 한 분야로 등장을 했다. 화학 반응에서 평형을 다룰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Le Chatelier(Henry Louis Le Chatelier, 1850-1936, 평형상태에 있는 화학반응이 압력, 온도, 반응물과 생성물의 양 등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예측할 수 있는 원리(르 샤틀리에 원리)를 고안한 프랑스 과학자)의 원리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아차린 하버는 결국 이 원리를 암모니아 합성 반응에 잘 적용을 시킨 것이다. 1901년에 Le Chatelier도 암모니아 합성에 도전을 했지만 실험실에서 기구가 폭발을 하는 바람에 암모니아 합성 연구를 포기하였다.

    하버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던 Max Le Blanc는 Ostwald 교수(University of Leipzig)의 후임자리를 맡기 위해서 1906년 7월에 Karlsruhe 공과대학을 떠났다. Max Le Blanc 교수의 후임으로 지명된 여러 후보자 중에서 마침내 하버가 선택이 되었다. 연구 능력을 놓고 보면 최종 후보자 2명에 들었지만, Max Le Blanc 교수의 허점을 공격하고 비난했던 하버를 곱게 보지 않았던 심사에 참여했던 동료들의 투표에서는 패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정교수로 승진이 되었고, 물리화학 및 전기화학 연구소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하버는 연구소의 책임을 맡으면서 다른 연구소의 과학자는 물론 같은 대학에 있는 교수들과 연구에 관해서는 누구도 마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뛰어난 젊은 과학자들이 하버의 연구진에 합류한다. 그 중에 암모니아 합성에 크게 기여한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Max Le Blanc 교수와 같이 Leipzig 대학으로 동행하지 않고 Karlsruhe 공과대학에 남았던 기술자(technician)인 Friedrich Kirchenbauer(암모니아 합성에 필요한 고압 장비 제작에 기여한 인물) 였다. 또 다른 한 사람은 William Ramsay교수(1852-1916, 비활성기체(네온(Ne), 크립톤(Kr), 크세논(Xe))를 발견했으며 1904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영국 화학자)와 이미 암모니아에 대한 연구를 경험했던 영국 과학자 Robert Le Rossignol (1884-1976, 그는 하버 공정의 특허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암모니아의 합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며, 산업화 과정에 까지 그의 기여도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07년에 Karlsruhe 대학에 하버 연구팀에 합류하여 커다란 공헌을 했다.)이었다.

    8.3 베를린 대학교수 그리고 세계 1차 대전

    하버가 베를린 대학으로 이동할 1911년에는 베를린 대학의 화학 연구소는 Emil Fisher 교수가 소장이었으며, 물리 연구소는 Walther Nernst 교수가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이 베를린 대학의 중요한 연구소 소장을 맡고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베를린 대학 교수직 제의를 하버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을 것이다. 또한 하버는 암모니아 합성으로 큰 업적을 이루었고, 이제는 세계에서 알아주는 물리화학의 거두로 거듭나고 있었다. 베를린 대학으로 이직을 하고, 황제의 고문(Geheimrat)으로 위촉이 되었으니, 하버는 그야말로 통일 독일에서 과학계의 선두주자로 나서게 된 것이었다.

    1914년 7월 28일 세계 1차 대전(1914년 7월—1918년 11월)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나자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하버는 하사관(noncommissioned officer)으로 지원을 했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하버의 나이가 이미 40대 중반을 넘었으니 힘으로 조국을 위해 봉사하기에는 늦었다. 그렇지만 훨씬 중요한 임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실제로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던 예측과는 달리 전쟁으로 인해서 많은 생활필수품 혹은 군수물자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의 수입이 금지되었다. 그러므로 국내에서 원자재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합성 물질을 찾아내야만 되었고, 그것을 연구하고 개발해 내는 일이 독일 과학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시대적 상황과 절실함이 새로운 발명을 이끌어 낸 것이다. 전쟁에 필수품인 폭약 제조를 위한 질산염(Nitrate)은 6개월 분도 안 남은 상황에서 질산염 수입을 차단당했으니 그야말로 절박한 상황이었다. 탄약이 없이 어떻게 전쟁을 치를 수 있단 말인가? 질산염의 국내 생산은 물론, 전쟁 수행에 필요한 각종 군수품까지도 독일 내에서 생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버를 비롯한 수 많은 독일 과학자들이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 혹은 강제적으로 전쟁에 동원되는 운명을 겪게 되었다.

    폭약 제조 및 비료에 사용되는 질산소듐(NaNO3) 혹은 질산(HNO3)을 전쟁 수행에 필요한 만큼 생산하는 일이었다. 암모니아를 원료로 질산을 생산하는 공정은 이미 오래 전에 Ostwald에 의해 개발이 되었고, 특허까지 얻은 기술이었다. 그러나 Ostwald 공정에 촉매로 백금을 사용하였기에 전쟁 중에는 적대국인 러시아로부터 백금을 수입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BASF에 근무하고 있는 화학자, Alwin Mittasch는 암모니아 합성에 필요한 촉매를 개발한 경험을 바탕으로 암모니아를 질산소듐으로 전환할 수 있는 실험과 연구를 완성하였다. 그것도 비싸고 구하기 힘든 백금 대신에 철 산화물을 촉매로 사용한 공법까지 개발하였다. 전쟁 수행에 필요한 질산소듐의 양이 20,000톤/년 이었는데, BASF 혼자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5,000톤이나 되었다. 독일은 그 후에 연합군의 포격을 피할 수 있는 지역에 Haber-Bosch 공정으로 암모니아 생산 공장을 더 확충하고, 곧 바로 더 많은 질산 혹은 질산소듐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독일에는 여전히 독가스가 저장이 되었고, 협정에 따라서 파괴를 해야만 되었다. 연합군이 감독하는 가운데 독가스인 화학물질을 불태워 버리거나 혹은 다른 물질로 변환을 하는 것이다. 하버는 그런 작업을 Hugo Stoltzenberg(Hugo의 아들인 Dietrich Stoltzenberg가 하버의 전기를 저술하여 책으로 발간했다.)와 함께 실제로 실행하기도 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는 겨자 가스 생산에 관여했던 사람들을 전쟁 후에는 그것을 처리하는 일을 사업으로 지원을 했으니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 않은 일이었다.

    전쟁 후 독일은 극심한 인플레로 인해 1923년 경제가 완전히 주저앉았다. 아직도 자랑스런 독일인 하버는 바다에서 금을 추출하여 국제 경제에 도움을 줄 계획을 하였다. 그런 엉뚱한 생각의 배경은 약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닷물에는 물 1톤당 약 6 밀리그램의 금이 포함되어 있다고 Arrhenius가 주장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금을 포함하는 인공 바닷물을 실험실에서 만들고, 그것을 추출하는 방법까지 연구를 하였으며, 실제로도 배를 띄워서 계획을 실행하였다. 연합군의 감시 때문에 배의 승무원으로 위장을 하여 남극 북극은 물론 세계 곳곳의 바다를 훑어서 몰래 실험하고 확인을 해 보았지만, 실제 금 농도는 Arrhenius가 추측한 것의 천분의 일도 안 되는 양으로 전혀 경제성이 없는 것을 확인하였다.

    하버 개인적으로도 어려움을 겪는다. BASF에서 받는 암모니아 특허에 대한 로열티를 한꺼번에 받아서 매년 수입이 예전만 못했다. 더구나 두 번째 결혼마저 1927년에 이혼을 하게 되어 정신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1929년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대 공항(Great Depression)도 하버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련의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건강도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중반 무렵부터는 국가 사회당(national socialism, 흔히 말하는 나찌(Nazi))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반유대주의가 본격적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대학에서는 이미 유대인을 들어내놓고 차별하면서 교수직마저 자의로 혹은 타의에 의해 쫓겨나는 일도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1933년에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나찌당의 당수였으며, 12년 동안 독일 수상으로 재직하면서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인물)가 독일의 수상(chancellor)이 되면서 유대인으로 자랑스런 독일인으로 자부했던 하버의 일생은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1933년 독일에서 쫓겨난 하버는 이스라엘 Sieff 연구소(현재 Weizmann Institute)의 소장 직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수락했다. 1934년 이스라엘로 가다가 스위스 Basel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을 했다. 그이 나이 65세였다.




    요약

    1918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1. 질소 고정법의 개발로 1900년대에 16억에 불과하던 인류가 100년이 지난 지금 70억을 넘기게 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과학자

    2. 정신 나간 애국심으로 각종 폭탄 및 심지어 독가스의 사용을 군부에 부추겨 수백만의 인명을 죽게 만든 과학자

    3. 자신이 유대인이었는데 결국 나치정권에 의해 쫓겨나고 히틀러가 이 독가스를 이용해서 동족 600만을 죽이게 만든 과학자.


    국뽕이 이렇게 해롭습니다 여러분.

    출처 http://www.nobel.or.kr/nobel-story/chemistry-story/1970.htm


    긴 글 죄송. 맨 아래 요약 있어요.
    칼세이건의 꼬릿말입니다
    애국심은 불한당의 마지막 피난처다.
    -새뮤얼 존슨
    애국심은 미덕의 한 부분이지만 애국심을 강요하는 건 추악함 그 자체다.
    - 다나카 요시키
    애국자들은 항상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을 떠벌리지만, 조국을 위해 죽이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 버트란트 러셀
    애국자: 자신이 무슨 소릴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가장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
    - 마크 트웨인
    국민을 항상 지도자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할 수 있다. 그것은 쉽다. 국민에게 공격받고 있다고 선전하고, 평화론자들은 애국심이 부족하다고 맹비난하고, 또, 국가를 위험에 빠뜨리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어느 국가에서나 작동한다.
    - 헤르만 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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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이나라에 탈민족주의는 시기 상조인 듯.. [10] 칼세이건 15/09/09 13:50 3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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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사는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니다" [10] 펌글 칼세이건 15/09/03 16:52 13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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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말입니다. [9] 펌글 칼세이건 15/09/02 09:47 37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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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계 중심의 역사관에 대한 뻘글 [2] 창작글본인삭제금지 칼세이건 15/08/30 22:37 3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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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뢰즈의 리좀 개념으로 역사를 생각해 봤습니다. [9] 창작글 칼세이건 15/08/28 10:41 4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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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역사왜곡 [5] 펌글 칼세이건 15/08/22 10:21 6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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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세포가 면역세포 코스프레 (조X일보 주의) [2] 칼세이건 15/08/17 12:39 16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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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뻘글) 민중 혹은 시민에 대하여 질문합니다. [6] 본인삭제금지 칼세이건 15/08/13 14:16 2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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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배우는 이유 [2] 펌글 칼세이건 15/08/12 15:47 4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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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원숭이 실험. 원숭이에게 화폐를 가르치기 [46] 펌글 칼세이건 15/08/06 17:05 8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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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산 김창숙 선생께서 지은 여동생 성산이씨 부인에 대한 제문 펌글 칼세이건 15/08/06 10:30 2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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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왜 순니파가 시아파보다 다수가 되었을까요? [7] 본인삭제금지 칼세이건 15/08/05 11:56 5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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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이 뭔가요? [7] 펌글 칼세이건 15/08/04 15:04 7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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