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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80 2025-11-09 15:42:58 1
신사 근처에서 쓰러진채 발견된 너구리와 여우 [새창]
2025/11/09 06:10:46
[부연설명] 1993년 4월 28일 일본 기후현 시라카와무라에서 여우와 너구리가 술에 취해 잠든 모습이 발견되었다. 이곳에는 도보로쿠라는 사케를 바치는 지역 축제가 있는데, 신에게 바치기 위해 놓아둔 신주(神酒)를 너구리와 여우가 나눠 마시고 둘 다 뻗은 사건. 다음날 술이 깨서 비틀거리며 둘 다 숲으로 돌아갔는데, 지역주민들이 이 모습을 커플이라고 부르며 사진을 많이 찍었다.(일본 민담에 보통 여우는 여성, 너구리는 남성으로 묘사된다.) 해당 사진은 히라세의 오사카 고토코씨가 찍은 사진으로 신문에 소개되었다.

여우(키츠네)와 너구리(다누키)는 변신 능력을 가진 대표적인 요괴로 일본 전통 설화나 민간전승에 자주 등장한다. 키츠네는 변신 능력과 환술 등을 사용하며 종종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하여 인간을 홀린다. 유부를 매우 좋아해서 유부우동도 좋아한다고 한다. 인간을 홀리는 악한 존재로도 묘사되지만 이나리 신(稲荷, 오곡 풍양과 사업번성, 소원성취를 도와주는 신)의 사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너구리 요괴는 바케다누키라고 불리며 사람 외에도 솥, 금, 놋페라보(눈코입이 없는 귀신)로도 변신한다. 식성이 좋고 유머스럽고 복스러운 성격이라고 하는데 배부른 자신의 배를 통통 치는 모습을 '폼포코'라고 한다. 다누키(他抜き)'라는 단어와 발음이 같아 '다른 사람을 능가하다'는 뜻으로 여겨져 사업 번창이나 금전운을 가져다주는 길한 존재로도 여겨진다.
14679 2025-11-08 14:49:31 8
영포티가 아니라 세대혐오입니다. [새창]
2025/11/08 09:40:24
영포티가 저게 아니라 자기 젊은 줄 알고 어린 여자들이게 찝적대는 일부의 정신나간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는데

언제부턴가 40대 전체를 지칭하는 단어가 되어버렸음.
14678 2025-11-04 21:59:33 0
감옥에서 7년 동안 법 공부해 무죄 받아낸 남자 [새창]
2025/10/26 19:39:43
[부연설명] 아이작 라이트 주니어의 싸움은 무죄방면된 다음에도 끝나지 않았다. 무죄방면된 다음에 2002년에 학사 학위를 따고, 2004년에 로스쿨에 진학해서 2007년 졸업하여 2008년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그런데 2017년 뉴저지 대법원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할 때까지 뉴저지 변호사 위원회에서 무려 9년 동안 조사를 받았다. 어지간히 변호사 자격증 주기 싫었던 듯...

하여간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종신형을 선고받고 석방되어 면죄를 받은 후, 그를 유죄 판결한 바로 그 법원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게 되었다. 이후 2020년 ABC 방송국에서 그의 삶을 모티브로 한 TV시리즈 'For Life'가 상영되었다.
14677 2025-11-04 20:20:46 12
조선시대 금수저 막내아들의 생애 [새창]
2025/11/03 23:07:30
[부연설명] 권율의 집안은 조선 개국공신인 권근이 6대조이고 아버지 권철은 영의정을 역임한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다. (참고로 권철은 오성과 한음의 감나무 일화에 나오는 옆집 대감님이다. 이항복의 비범함을 어여삐 여겨 자신의 손주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권철의 막내아들이었던 권율은 나이 40이 되도록 관직에 나서지 않고 지인과 어울려 전국을 여행하거나 지리를 연구하는 등 한량처럼 지내다 아버지의 사망 이후 과거 공부를 시작, 선조 15년인 1582년 그의 나이 46세 때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사위 이항복보다 급제가 2년이나 늦었다)

집안 덕을 보았는지 승진이 빨라 의주 목사까지 되었는데 베이징에 갔던 역관들의 유언비어로 해직되었다고 한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래도 이 사람이 능력이 있다'는 주변의 간언이 있어서 선조로부터 광주목사에 제수된 후, 함락된 수도 탈환을 위한 북진에 참여하여 금산군 이치 전투와 수원 독선산성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치 전투의 공으로 전라감사에 제수되었으며 수도 탈환을 위해 행주산성에 수천의 군대로 진지를 구축한 후, 끈질기게 공격해 온 3만의 왜군을 물리치고 승리했으니 이게 바로 행주대첩이었다. 이후 실질적인 도원수로 육군 총사령관 위치에서 군무를 총괄했으며, 전란 중에 기력을 소진한 탓인지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사망하였으니 그의 나이 63살이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류성룡이 이순신과 함께 천거한 사람이 권율이라고 하며, 임진왜란중에 업무상 견해차로 인한 마찰은 있었지만 서로 인정하고 협조하는 관계였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할 때 무밭을 가꾸게 하는 등 여러 면에서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반면 원균과는 매우 사이가 나빠서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하기 위해 조정을 기망하자 면전에서 욕을 하며 곤장을 친 일도 있었다. 이후 원균의 후손이 방송에 나와 칠천량 해전 패전의 책임은 원균이 아니라 권율과 조정 탓이라는 망언을 해서 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키가 8척이나 되어 풍채가 컸고 엄중한 안색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괴짜인 면모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공무를 봄에 있어 매사에 신중하고 항상 만전을 기하는 성품이었으며 공사 구분도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문신 집안 출신이지만 전투에서 상당히 대범하고 기동력 있는 병력 운용을 했다고 평가받으며 주위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는 명석함도 보여주었다. 상당히 대범한 성품으로도 유명한데 전투 중에 떨어진 지휘봉을 찾으려고 일본군 진영에 태연히 돌입해서 주워왔다는 야사도 있으며, 일본군 지휘관에게 거짓으로 '낮의 전투 중에 내 말채찍을 떨어뜨렸으니 찾아달라'라고 하여 일본군 병사들이 없는 말채찍을 찾기 위해 전장을 뒤지게 하여 일본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반면 행주대첩 이후 일본군에 대한 분노로 죽은 왜병들이 시체를 찢어서 나뭇가지에 걸어놓을 정도로 분노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사위인 이항복과는 거의 친구나 형제처럼 서로 농담따먹기를 하면서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위 이항복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자신의 공 중 3천의 병력으로 3만의 일본군을 막은 행주대첩보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진격을 막아 호남 지역을 지킬 수 있었던 교두보를 마련한 웅치와 이치 전투를 더 가치 있게 생각했다고 한다. 전투의 성과보다 전쟁 전체를 보는 관점에서 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14676 2025-11-01 09:57:22 0
즉석 복권 레전드 사건 [새창]
2025/10/30 11:29:56
전체적으로 이 글은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돌아다니는데, 좀 앞뒤 내용을 빼먹은 짜집기 글입니다.

1. 저 그림은 오기재된 복권이 아닌 그냥 샘플 이미지임

2. 2008년 제1회 스피또 2000 규칙상 4번째 게임에서 3개의 같은 숫자가 나오면 100만원이 지급되는데, 여기에 인쇄 오류로 당청금 1억이 오기재됨.

그러니까 "여기를 긁어서 같은 숫자가 세 개 나오면 백만원을 드립니다" 라는 게임에서 갑자기 당첨금 1억원을 준다는 오류 문구가 나온 것임.

3. 복권은 저기 써 있는 숫자 외에도 별도의 검증번호가 있으며, 이것이 일치해야 당첨복권으로 인정함. 당연히 문제가 된 복권은 검증번호가 틀리게 나와 있음.

4. 그밖에 복권회사에서 '이 복권이 당첨복권이 아닌' 이유들을 왕창 제출함.

5. 법원은 '게임 자체가 최대 백만원이 한계인 점', '이 게임은 최대 백만원이 나오는 게임이라는 것을 이용자가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는 점' 등을 판단하여 당첨금 지급의무가 없다고 판결을 내린 것임.
14675 2025-10-29 18:01:59 2
자연농원에 갈거야 [새창]
2025/10/28 11:14:38
저 멘트 하나면 모든게 용서됨.
14674 2025-10-28 08:06:15 2
아니 언제부터 누가 200g = 1인분 이라고 정했나요?? [새창]
2025/10/27 18:54:22
[부연설명] 1인분이라는 단위 - 특히 고기에서 - 는 판매자와 소비자의 편의에 의해 관습적으로 사용되어오던 단위임. 법적으로 1인분을 몇그램으로 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기 때문임.

그래서 소비자들의 불만이 많아지자 2013년에 식품위생법을 개정하면서 음식점에서 판매하는 고기를 100g당 가격으로 표시하도록 하면서 다만 고기의 경우 1인분 단위로 판매하는 관행을 감안하여 1인분에 해당하는 중량당 가격을 100g당 가격과 함께 표기할 수 있도록 함.

사실 이 1인분이라는 개념은 '이 고기만 먹었을 때 한명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생각하면 안되고, '고기를 반찬으로 먹었을 때 먹는 양'정도라고 생각해야 맞음. 또한 이 1인분의 가격도 고기에 따라서 다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1인분의 양도 점점 줄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음.
14673 2025-10-28 08:01:34 8
감옥에서 7년 동안 법 공부해 무죄 받아낸 남자 [새창]
2025/10/26 19:39:43
[부연설명] 아이작 라이트 주니어를 기소했던 서머싯 카운티 검사 니콜라스 L. 비셀 주니어는 저 건 뿐만 아니라 횡령, 탈세, 우편사기, 권력남용 등 30건의 연방 혐의로 기소되었다고 함. 주로 해먹은 방식이 누구를 마약 혐의로 체포한 다음에 그 사람 땅을 몰수하면 기소를 취하해주겠다고 하고, 그 토지를 감정가보다 낮은 가격에 경매에서 지인들이 사게 했음. 그밖에 자기가 공동 소유인 주유소에서 현금 횡령도 하고, 마약 혐의로 함정에 빠트리겠다고 협박도 했었음. 결국 검사 자리에서 해고되고 유죄 판결을 받아서 연방 교도소에서 최소 6~8년, 최대 10년의 형을 선고받았는데, 형 집행 전에 전자팔찌를 착용한다는 조건으로 임시석방되었다가 전자팔찌를 끊고 다른 주로 도망갔다가 추격해 온 경찰에게 포위되자 자살함.
14672 2025-10-26 16:35:39 38
아기고래가 수유하는 사진 [새창]
2025/10/26 08:52:07
[부연설명] 어미 혹등고래는 새끼 고래를 젖 먹여 키우는 6개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새끼를 보살핀다. 수영에 서툰 새끼가 행여 잘못될까 봐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며, 20분에 한 번씩 물 밖으로 밀어 올리며 키워낸다.​ 특히 수유 중에는 정지 상태로 있거나 몸을 세워 새끼가 젖을 빨기 좋도록 자세를 유지한다. 그러면 새끼는 지느러미 아래쪽 어미의 유두에 입을 대고 비스듬하게 몸을 돌려 모유를 먹는다. 거대한 혹등고래 새끼는 하루에 150갤런(1갤런 = 3.8리터) 정도의 젖을 먹는다고 한다.

또 혹등고래 같은 대형고래의 젖은 바닷물에 쉽게 녹지 않도록 지방 농도가 30~35% 정도로 점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휘핑크림의 지방함량이 30% 정도인데 이보다 높으며 마치 치약처럼 점성이 높다는 얘기다. 수중에서 수유를 하기 때문에 만약 바닷물에 쉽게 녹아버린다면 새끼가 잘 먹을 수 없을 것이다. 바닷물이 닿아도 잘 녹지 않도록 진화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2006년 3월 하와이 라나이 섬 바닷속에서 녹화된 혹등고래 모유도 바로 녹지 않고 약 90초 동안 기둥 형태로 떠다닌 뒤 사라졌다고. 이런 고열량의 젖을 먹는 새끼 고래는 매 시간마다 체중이 4kg씩 증가한다고 한다.

참고로 젖의 지방함량이 가장 높은 동물은 두건물범으로 지방함량이 무려 60~65%라고 한다. 태어난지 3~5일만에 덩치가 2배가 된다고 하며 포유류 중 가장 빨리 독립하는 생물로도 알려져 있다. 태어나면 평균 4일 정도, 길게는 5일 정도만 수유를 하고 어미는 떠나버리고 이후 남겨진 새끼는 알아서 사냥하고 다닌다고 한다.
14671 2025-10-26 09:38:48 0
한글이 받는 오해 [새창]
2025/10/21 06:54:48
능력은 매우 뛰어났던 건 사실이지만 국민을 개돼지로 본다던지 사육신을 꼰지른다던지 등등 성리학자라기엔 기본 마인드가... 개인적으로는 능력과 성품이 꼭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14670 2025-10-24 17:57:14 0
해외에서 분석한 한국의 날씨 [새창]
2025/10/23 10:26:05
로버트 넬러 미 해병대사령관은 2018년 “한국에서 진행되는 훈련은 해병대의 준비 태세를 위해 필수불가결(integral)하다”고 한 적이 있다. 넬러 사령관은 “한반도는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기후뿐 아니라 가파른 지형 등 대대 수준에서 훈련 조건이 잘 갖춰진 곳”이라고 극찬했다.
14669 2025-10-24 17:45:32 5
중국인들이 뇌정지 온다는 한국 영화 [새창]
2025/10/24 12:37:39
[부연설명] 현대 중국인들은 공산당의 지침 아래 '하나의 중국'과 '중화민족주의'에 대한 교육을 받아서 명나라나 청나라 모두 중국을 이룬 나라들이라고 배우며 중국의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청을 세운 만주족들이 모두 중국어를 한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에서 만든 '남한산성' 영화를 보는 중국인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 영화에는 초반에 조선이 명나라에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하다가 나중에 청나라에게 져서 항복선언을 하게 되는데, 이 장면을 보는 중국인들 눈에는 의아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국인 입장에선 명나라도 중국이고 청나라도 중국인데, 조선이 명나라 편을 들다 청나라랑 싸우다 항복을 하니까 '왜 조선은 중국 편을 들고 중국과 싸우다 중국에 져서 항복한 거지?' 라며 인지부조화가 온 것.

심지어 영화에 나오는 청나라 사람들이 생전 듣도보도 못한 나라 말을 한다고 혼란스러워하기도 했다는데, 당시는 명말청초 시대라 청나라 사람들이 만주어를 쓰는 게 당연했지만 중국인들은 그런 개념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때문에 영화를 본 일부 사람들은 '한국은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라고 반발하거나 오히려 '조선이 중국 편을 들어 싸우다가 야만족에게 패했구나. 안타깝다'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영화를 본 사람들의 세대에 따라서도 다른 반응이 나왔다고 하는데 젊은 세대들은 위에 언급한대로 청나라도 중국이라고 배웠지만 나이 든 사람들은 청나라가 한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청나라는 중국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세대 간 댓글로 싸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4668 2025-10-22 22:45:51 2
영국이 또 해냄 [새창]
2025/10/22 12:13:13
[부연설명] 영국요리에 대한 악명은 최소 300년 이전부터 나왔다고 하며 같은 유럽 여러 나라들의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되었고 영국인 스스로도 자학개그의 대상이 되어 왔음.

영국의 요리가 맛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일단 16세기부터 발생된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음식을 통한 향락과 사치를 지양하고 많은 조리기법을 사용한 조리 방식을 멀리했으며 심플하고 간결한 조리법과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기는 특성이 생겼음.

이렇게 청교도적 금욕주의로 손이 많이 가는 요리법을 사치라고 생각하는 문화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데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대부분의 국민들이 하층 노동자로 전락했을 때에는 음식이 맛을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에너지 섭취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맛있는 요리가 없었음. 영어권에 '맛있게 드세요'나 '잘먹겠습니다'에 해당하는 고유 표현이 없는 것도 이것이 이유라는 이야기가 있음.

또한 왕실이나 귀족이 먹었던 귀족 요리나 누구나 간단하게 해서 먹을 수 있는 요리는 있지만 '가정식'이라고 내세울 만한 요리가 없다는 점도 영국요리의 빈약한 풀의 원인이 되었음.

그밖에 영국요리가 맛이 없는 이유에 대하여 지리학적, 정치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1) 서안 해양성 기후인데다 토질이 좋지 않아서 다양한 채소를 키울 수 없다보니 채소 활용력이 떨어지는 점.
2) 바다가 거칠고 자연재해가 잦아서 바다를 죽음의 공간으로 간주한 앵글로색슨족과 노르만족의 후예라서 섬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해산물을 잘 먹지 않는 점
3) 향신료를 잘 사용하지 않다보니 원자재의 맛에 음식의 맛이 크게 좌우되는 점
4) 마가렛 대처 정부시절 무상급식 재정지원이 철폐되면서 급식이 민영화되고 민영사업자들이 패스트푸드와 간편조리식 위주로 학생들에게 급식을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맛있는 음식을 접할 기회가 줄어들었다는 점
5) 가정식이 없다보니 할머니-엄마-딸로 이어지는 음식 조리와 맛이 전승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남자가 요리를 배우면 게이 취급을 하는 사회 분위기 등으로 국민들의 요리 기술이 떨어지는 점
등이 있음.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영국요리에 대한 악명도 줄어들고 있는데 최근에는 요리 추세가 가볍고 담백하며 재료 본연의 맛을 중시하는 퀴진이 대세이기 때문임.
14667 2025-10-21 13:42:40 19
한글이 받는 오해 [새창]
2025/10/21 06:54:48
[부연설명] 정창손. 조선 전기에 대제학,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집현전 응교로 재임하던 시기에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사실 당시 세종이 '불만 있으면 기탄없이 반대의견을 올리라'라고 해서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등이 반대 상소를 올렸었는데 세종은 이들 모두를 하루 동안 의금부에 하옥시켰다가 다음날 풀어주었으나 정창손만은 유일하게 파직시켰다.

세종이 극대노하여 정창손을 파직한 이유는 그가 성리학자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했기 때문이다. 정창손은 한글 창제를 반대하며 '삼강행실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해서 백성들에게 읽게 하고 가르쳐 봐야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다.' 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누구나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으므로 평생 수양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라는 조선의 건국이념인 성리학의 기본원칙을 정면에서 부정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유교를 창시한 공자도 논어에서 유교무류(有敎無類)라 하여 '가르침이 있을 뿐 차별은 없다. 사람에게는 귀천이 존재하지만 똑같이 재주에 따라 가르쳐야지 부류가 비천하다고 해서 가르치지 않아서는 안된다'라고 했었으니 여기에 대놓고 태클을 걸어버린 격.

세종이 매우 진노하여 "용속한 선비"라고 발언했으니 세종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실록에 저렇게 남았다는 말은 실제 현장에서는 훨씬 더 심한 말이 쏟아졌을 것이고 사관이 이를 그나마 축약하여 당시 말로 이보다 더 한 욕을 찾기 힘든 '용속한 선비'라고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현대말로 따지면 진짜 말 그대로 공무원이 대놓고 "국민은 개와 돼지와 같다. 가르쳐 봐야 아무 소용없다."라고 발언했고, 이 말을 들은 세종이 대로하여 "저 씹선비 새X"라고 욕한 거라고 보면 된다.

파직된 정창손은 이후 세종의 용서를 받아 다시 집현전에 들어오게 되었다. 사람을 함부로 해하지 않는 세종의 성정과 조선 초기 조정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의 업무처리능력이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근데 그 이후에도 세종이 불경 간행을 추진하자 '성리학의 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면 안된다' 라며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물론 이때도 세종에 의해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복직했다. 이때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해서 집현전 부제학의 자리까지 올랐고, 이후에도 불경을 간행하는 세종에 반하여 꾸준히 상소를 올렸지만 세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 재미있는 건 그런 와중에도 출중한 능력이 인정받아 고려사, 세종실록, 지평요람 등을 편찬하는데 참여했다.

세종 사후 이후에는 우부승지를 거쳐서 대사헌까지 올랐는데 남달리 깨끗하여 절조를 잘 지키면서 자신의 산업을 일삼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 대제학, 병조판서 등을 지내면서 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단종 1년에는 이조판서까지 올랐다. 이후 단종이 물러나고 세조가 왕권을 잡은 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모의를 세조에게 신고하여 세조의 신임을 얻고 우의정 자리까지 올랐다. (생육신 중 하나인 김시습으로부터는 매우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 이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 자리에까지 올랐다.

1462년 세조에게 '세자에게 양위하고 자리에서 내려오시라' 라고 직언했다가 삭탈관직당했다. 하지만 이후 정계에 복귀해 예종 즉위 이후에는 익대공신 3등에 올랐다. 성종 즉위 이후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품되고 원상이 되었다. 나이가 70이 되어 은퇴를 요청하였으나 성종은 이를 허하지 않고 궤장을 주며 계속 일을 하게 시켰고 1475년 다시 한번 영의정 자리에 올랐다. 이후 1485년에 다시 한번 영의정으로 재임되었으며 1년 후 사직하고 2년 후인 1487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당시 국왕이 청빈재상이라 하여 많은 물품을 부의로 하사했다고 한다. 사망 후 1504년 연산군 시절 갑자사화때 연산군의 생모를 폐출하는 논의에 참여된 죄로 부관참시당했으나 중종 1년에 복원되었다.

​정리하자면 영의정을 세 차례나 역임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행정가였다. 풍채가 준수하고 수염이 배까지 내려왔다고 하며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사사로이 재물을 탐하지 않는 청밸리로 사망 후에도 인정받았다. 다만 훈민정음 반포시 '국민은 개돼지'라며 반대한 것과 사육신을 세조에게 찌른 일 등으로 인하여 "능력과 인간성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집에 유령이 나타난다"라고 하여 예조판서가 "한번 화포로 집을 날려버려 볼까요?"라고 건의했다가 성종이 반려한 집이 죽기 1년 전의 정창손의 집이었다.
14666 2025-10-20 16:18:17 0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 [새창]
2025/10/18 20:06:20
[부연설명] 남근상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종교적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하나 실제 여성의 자we용도로 사용된 경우도 매우 많다. 현재 발견된 가장 오래된 여성용 자we기구는 B.C 28,000년대 독일에서 발견된 돌로 만든 기구로 구석기시대이다. 이후 단단한 과일, 가죽, 도자기, 나무, 동물의 뿔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졌다. 클레오파트라는 호롱박을 말려 벌을 집어넣고 파피루스로 봉해 벌의 진동을 즐겼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각좆이라고 불렸는데 삼국시대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나 월지, 인용사 등에서도 출토되었는데 피부주름과 요도구까지 정교하게 재현되어 있으며 성감을 자극하는 돌기가 나있고 틈을 연구한 결과 실제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10~13세기 고려-송나라 시대에는 여성동성애자들을 위한 양방향 자we기구도 유통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봇짐장수가 다양한 크기의 각좆들을 들고 다니면서 팔았다고 하며 홍화문 근처에 동상전(혼수용품 및 잡화점) 근처에서 판매했다고 한다. 주 고객층은 궁녀들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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