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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55 2019-10-01 13:18:45 30
평생 대우 받는 스킬 [새창]
2019/09/30 19:11:29
저때 말고, 신부랑 드레스 맞추러 갈 때 있어.

신부는 커튼 안에서 피팅해 보고 신랑은 그 밖에 쇼파에 앉아서 기다리거든?

그러다가 커튼이 좍~ 열리면서 드레스 피팅한 신부가 나오는데

그때 신부를 보면서 놀란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전화기를 손에서 놓쳐서 떨어뜨려라.

진짜 같이 옆에서 헬퍼하던 사람이랑 실장이랑 (모두 다 여자) 다들 빵 터졌고, 신부도 좋아하고,

실장님한테 자기가 10년 넘게 드레스샵 운영했는데 최고 리액션 중 하나라면서 칭찬받았다.
12654 2019-10-01 09:44:55 95
자꾸 아랫집으로 배달시키는 여자 [새창]
2019/10/01 04:29:18
진짜.. 배달 올 때마다 들고 올라가서 벨 누르고 문 두드리면서 "안녕하세요~ 음식배달왔어요~ 음식 식을까봐 갖다드렸어요!!!" 라고 소리치면 되겠네.
12653 2019-10-01 09:42:08 0
암벽등반 결승전 [새창]
2019/10/01 08:17:20
헐... 이건 뭐 거의 걷는 속도...
12652 2019-10-01 07:33:09 0
세계 미남대회 전통의상 챌린지 [새창]
2019/09/30 17:57:59
한국은 마법 아이템이네요.

만파식적인가?
12651 2019-09-29 20:59:22 0
하지 말아야했던 장난 [새창]
2019/09/29 18:33:08
그런 짓을 하지 말아야 했는데...
12650 2019-09-29 20:00:53 5
심심풀이로 볼만한 움짤들 모음 579.GIF [새창]
2019/09/29 18:16:55
진짜 좋아하네 ㅎㅎㅎㅎㅎ
12649 2019-09-29 16:14:02 1
서양인의 조선온돌 체험기...jpg [새창]
2019/09/29 07:09:42
[부연설명]

온돌(溫突, 돌이 돌맹이를 뜻하는 한글이 아니다.) 구들이라고도 한다.

열기가 방바닥을 지나가도록 해서 방 전체를 데우는 난방방식. 열의 전도를 이용해서 화기가 방 밑을 지나게 해서 바닥을 뎁히고. 그 열을 조리에 이용한다. 현대에는 온수가 바닥을 지나게 하는 방식도 온돌이라고 쓰인다. 국가지형문화재로 선정되었기도 하다.

한국 고유의 난방법으로 열원을 직접 이용하는 대다수 문화의 난방 장치에 비해 열의 간접복사열을 난방에 이용한다. 복사 외에도 대류와 전도 등 열의 다양한 원리를 이용했다. 온돌의 장점은 이긍이에 불을 빼도 열기가 오래 남아있다는 점, 방 공기를 데우는 난로는 공기를 건조하게 하는 반면 방바닥을 고루 데워주는 온돌은 그렇지 않다는 점 등이 있다. 반면 단점은 구들이 깨질 경우 연기가 올라와서 일산화탄소 중독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 밤새 방을 덥히기 위해서 저녁에 불을 엄청 때야 한다는 점, 아랫목과 윗목의 온도차가 생기거나 웃풍이 생길 수 있다는 점 등이다.

온돌은 BC5000년의 신석기 유적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후 주요 부유층이나 병자나 노인의 방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조선 중기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에는 거의 대부분의 백성들에게 퍼졌다고 한다. 온돌의 발달로 한국사람들은 좌식과 맨발의 생활 양식이 정착되었고, 근래까지 단층 주거 건축 양식이 대부분이게 된 이유도 온돌 때문이다. 또한 푹 끓이는 국물 요리가 발달한 것도 온돌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고유한 난방방식이며, 중국과 몽골 일부 지역에 온돌과 비슷한 '캉'이라는 난방방식이 있다. 덴마크나 노르웨이의 전통가옥중에는 조리를 하는 불의 열기로 반대편 방을 덥히는 방식이 있으며, 로마의 하이포코스트, 러시아의 페치카나 독일과 북유럽의 카헬오펜 등이 온돌과 유사한 방식으로 난방을 한다.

해외에서는 최근들어 친환경 난방법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난로를 방 안에 두는 대류식 난방은 공기를 매질로 하기 때문에 열기가 금방 사라지지만 온돌은 오랫동안 따듯하다는 점이 어필해서 이산화탄소 배출 저감이나 친환경 인증 목적의 대형 건물에 들어간다고 한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때는 온돌 특유의 따뜻함과 아늑함 때문에 경기에 지친 선수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았다고도 한다. 일본에도 집 신축시 유카단보라는 온돌 방식의 시스템을 추가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12648 2019-09-27 18:56:56 1
천리마마트 빠야족 근황.jpg [새창]
2019/09/27 13:09:47
저 노래 은근 중독됨.
12647 2019-09-27 16:17:23 0
격파왕 경호원 [새창]
2019/09/27 11:12:42
기어 3?
12646 2019-09-27 14:23:21 0
영화 '기생충' 폴란드 개봉 근황.jpg [새창]
2019/09/27 01:33:01
나이드신 분이랑 같이 가서 보려면 차라리 엑시트가...
12645 2019-09-27 12:07:17 12
일생을 걸고, 인류를 괴롭피던 질병을 종식시킨 분 [새창]
2019/09/27 02:59:25
[부연설명]

인간 vs 소아마비. 소크 vs 세이빈

프랭크 루즈벨트 대통령은 39세의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려 위기를 겪었으나 이후 피나는 재활로 공식석상에 서 있을 만큼 마비를 이겨냈고,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경우에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으며, 소아마비의 고통은 평생을 루즈벨트 대통령을 괴롭혔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 국립소아마비재단을 설립하고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실시했다. 재단은 모금과 대통령의 지원을 바탕으로 미국 전역에 지부를 절립, 소아마비 환자들의 치료비 및 재활비를 부담하고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투자를 이어나갔다. 당시 재단에서 진행했던 후원 프로그램은 '십 센트의 행진' 이었는데, "우리 모두 10센트씩만 보내서 소아마비와 싸우는 대통령을 돕자" 라는 운동이 큰 반향을 일으켜 전국에서 후원이 쇄도했다. (사람들이 실제 10센트만 후원하기도 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보다 더 많은 돈을 후원했다.) 결국 후원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어 후원으로만 750만불(현재 가치로 6,630만불에 해당)을 모금했다고 한다. 이후 이 '십센트의 행진'은 풀뿌리 운동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남았다.

당시 소크 박사는 소아마비 백신을 연구하는 중이었는데, 소크 박사의 백신은 사백신, 즉 병원체를 비활성처리 후 접종하는 방식으로 병원성이 없어 안전하고 면역력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투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주사를 통해 놓아야 하는 번거로움과 관리의 문제, 그리고 병원성이 약하기 때문에 여러 번 추가적인 접종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반면 소크 박사 외에도 소아마비 바이러스를 연구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중 대표적인 사람이 알버트 세이빈 박사였다. 세이빈 박사는 이미 뎅기열과 일본 뇌염 백신을 개발한 경험이 있어서 당시 의학계에서 큰 명망이 있었는데, 세이빈 박사는 소크 박사의 사백신 방식 대신 생백신 방식으로 백신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백신은 병원성을 줄인 살아 있는 병균을 직접 환자에게 투여하는 방식으로, 주사를 맡지 않고 입으로 먹으면 되는데, 이는 주사의 투여 및 관리가 쉽지 않은 경우 좋은 장점이었다. 또한 여러번 주사를 맞을 필요 없이 단 한번만 먹으면 된다는 엄청나게 큰 장점도 있었다. 다만 생백신은 면역력이 약한 사람이 먹을 경우 실제 그 질병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단점도 있었다.

당시 미국 의학계에서는 세이빈 박사의 생백신을 지지했고, 대조적으로 소코 박사의 사백신을 배척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세이빈 박사는 소크 박사의 연구에 대해 '그정도면 아무나 부엌에 들어가서 할 수 있다.' 라고 비아냥대었고, 소크 박사가 백신에 대한 특허를 받지 않겠다고 했을 때 소크 박사를 비난하던 사람들은 '어차피 그 기술 자체가 너무 평이하기 때문에 특허를 받을 수도 없었을 거다.' 라고 했었다. 세이빈 박사는 "I developed THE vaccine, not A vaccine."라는 말도 했다. (이건 번역하기가 영....) (그러나 세이빈 박사 역시 자신이 만든 생백신에 대해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이빈 박사가 생백신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당시 소크 박사의 사백신은 이미 개발이 상당히 진척되어서 거의 상품화 할 수 있는 단계까지 진행되어 있었고, 사백신의 특성상 백신을 맞은 후 소아마비가 발병될 우려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소아마비재단에서는 소크 박사에게 연구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루즈벨트 대통령의 서거 10주기인 1955년 4월 12일, 소아마비 백신의 완성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게 되었다.

그럼 세이빈 박사의 생백신은 어떻게 되었나? 세계 최초로 소아마비 백신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지만 세이빈 박사는 연구를 계속했고, 1956년 백신에 대한 임상실험을 마쳤으나 이미 소크 박사의 사백신이 성공적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 사용을 허가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의외의 곳에서 세이빈 박사의 백신이 사용되게 되었으니, 바로 소련이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소련 역시 냉전의 당사자인 미국에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큰 문제였다. 세이빈 박사는 소련에서 1956년부터 1961년까지 소련과 동유럽 등 동구권을 주축으로 대규모 실험을 했고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 내었다. 특히 세이빈 박사의 생백신의 '주사를 놓지 않고 먹으면 된다.', '보관 및 관리가 용이하다.', '한번만 먹으면 된다.' 라는 장점이 당시 낙후되었던 소련과 동구권의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또한 공산주의 독재진영의 특성상 백신을 먹고 백신으로 인해 병이 발생할 수도 있다라는 문제는 정부에서 관리가 가능한 상황이었고, 경구 투여된 생백신이 인간의 분변을 통해 체내로 배출된 후 상하수도를 통해 사회로 퍼지게 되어 모든 사람들이 소아마비 항체를 가지게 되는 근분적인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장점도 있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소아마비는 사백신보다는 생백신이 더 인정을 받게 되고 이후 세계적인 표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소아마비가 거의 근절되었고, 우려했던 대로 생백신에 의한 소아마비 감염이 실제로 발생하면서 미국에서는 다시 사백신을 사용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생백신 역시 사용을 제한하지는 않고 급성 소아마비가 발생하거나 주사를 맞지 못하는 경우에는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하여간 이러한 소크 박사와 세이빈 박사의 선의의 경쟁은 세계 의학계에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고, 소크의 사백신과 세이빈의 생백신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전세계의 수많은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현대에 와서 백신 맞지 말자는 정신나간 엄마들이 생겨나고 있어서 큰 문제다. 이들의 문제는 자신의 생명이 아닌 자신의 아이의 생명을 담보로 한다는 점, 그리고 사회가 기껏 이루어 놓은 면역 안전망의 구멍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세이빈 박사는 이후 미주연합과 세계보건기구에 의해 운영되는 전세계 예방접종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지만, 당시 의학계에서 배척받던 소크 박사는 끝내 의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소크 박사는 세이빈 박사와는 다르게 미국 과학학술원 회원에도 선정되지 못했고, 의학계에서 주는 상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정부와 대중으로부터 큰 지지와 성원을 받았으며 소크 생물학 연구소를 설립, 암과 다발성 경화장, 자가면역질환 등을 연구하였고 소크 박사는 1995년 에이즈를 위한 백신 개발 중 심장마비로 81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당시 의학계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가 기억하는 소아마비 정복의 대명사는 소크 백신과 소크 박사이다.

여담으로 소크 박사는 소아마비 백신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말고 피츠버그 백신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영웅을 만들어 내길 원했던 언론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다르게 계속해서 '소크 백신' 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여담 하나 더 소크 박사는 그 업적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받지 못했는데(세이빈 박사도 마찬가지), 이에는 여러 가설이 있다. 하나는 이미 소아마비의 원인인 폴리오바이러스의 배양법의 발견으로 노벨상이 이미 수여되었기 때문에 주지 않았다는 설, 또 하나는 소크 박사와 세이빈 박사, 그리고 그 지지자들간의 싸움이 워낙 심해서 아예 둘한테 다 상을 주지 않기로 했다는 설 등이다.

출처 : https://vitaminjun.tistory.com/90?category=566181,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bs4547&logNo=220822864538&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12644 2019-09-27 12:03:50 1
일생을 걸고, 인류를 괴롭피던 질병을 종식시킨 분 [새창]
2019/09/27 02:59:25
소코가 아니라 소크입니다. -_-;;; 또 오타 발견..
12642 2019-09-27 09:15:31 7
일생을 걸고, 인류를 괴롭피던 질병을 종식시킨 분 [새창]
2019/09/27 02:59:25
댓글 달아주셔서 틀린 부분 수정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2641 2019-09-27 09:07:00 62
일생을 걸고, 인류를 괴롭피던 질병을 종식시킨 분 [새창]
2019/09/27 02:59:25
[부연설명]

조너스 소크(Jonas Edward Salk)

미국의 의학자이자 바이러스학자, 역학자.

사실 본인은 변호사를 하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의사로 진로를 잡고 뉴욕시립대 졸업 후 뉴욕의과대학에 진학했다. 뉴욕의과대학 시절 의사가 되기보다는 의학연구에 뜻을 두어서 졸업 후 피츠버그의과대학 연구실에 들어가서 거기서 소아마비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소아마비는 전세계적으로 큰 문제였다. 특히 1950년대에 미국에서는 어린아이들에게서 한해 6만여건의 소아마비 환자가 나왔으며, 이중 3천여명은 사망, 2만여명은 마비 휴유증이 남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소아마비(poliomyelitis)는 폴리오 바이러스에 의해 유발되는 질병으로, 바이러스가 신경계를 침범하여 발병한다. 심하면 사망할 수도 있고, 살아나더라도 척수마비로 인한 마비가 남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에게 많이 걸리기 때문에 소아마비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성인이 되어서 걸리는 경우도 있다.

당시 미국의 전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역시 소아마비로 인해서 몸이 불편했었고, 소아마비를 앓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였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 소아마비 예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백신을 만들기 위한 기금이 조성되고 의학자들에 의해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소코는 피츠버그 의과대학에서 약 7년간 휴일 없이 하루 16시간씩 연구에 매진한 끝에 효과적이고 안전한 소아마비 백신을 만들었다. 이는 20,000여명의 내과의와 공중보건 공무원, 64,000명의 학교직원, 220,000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한 초거대 프로젝트였다.

특히 소코 박사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연구 결과에 대한 특허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데 그의 유명한 "태양에도 특허를 낼 껀가요?(Could you patent the sun?)" 는 그때 나온 말이다. 이게 얼마나 대인배적인 행보인가 하면, 만일 소코박사가 그 특허권을 행사했다면 얼마나 벌었을까를 계산한 적이 있었는데, 약 70억 달러, 한화로 약 8조원을 벌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왔다고 한다. 실제로도 그의 백신 개발 소식이 발표되자 수많은 제약회사들이 특허를 양도하라는 제안을 보냈었다고 하는데 소코 박사는 '내가 일해서 버는 돈으로 사는데 지장 없다.' 라며 소아마비 백신의 특허를 풀어버렸다.

소코 박사가 특허권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보건기구(WHO)는 소아마비 백신을 단돈 100원도 안되는 가격에 공급할 수 있었으며, 이후 소아마비 환자는 백신 출시 이전의 1%대로 떨어졌다. WHO는 1994년 서유럽, 2000년에는 한국을 포함한 서태평양 지역에서 소아마비가 박멸되었다고 선언했으며 현재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일부 사례만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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