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에 따르면, 상위 1퍼센트의 가구가 전체 주식의 5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으며, 10퍼센트의 가구가 전체 주식의 9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30쪽)
미국의 비판적 지식인 노암 촘스키(Noam Chomsky)가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바사미언(David Barsamian)과 나눈 대화를 수록한 『프로파간다와 여론: 촘스키와의 대화』(이성복 옮김, 아침이슬, 2002)에 나오는 촘스키의 말이다. 그가 늘 미국의 현실에 대해 비분강개하고 핏대를 올리는 근거라고나 할까. 미국에선 2000년에 출간된 책이라지만, 물론 지금도 그런 현실엔 변함이 없다.
촘스키는 미국보다는 한국에서 더 인기가 있다. 그는 미국에선 주류 미디어에 의해 완전히 외면되고 있지만, 한국에선 보수신문들도 촘스키를 환영한다. 아무래도 이념보다는 사대주의가 우선인가 보다. ‘미국 명문대 교수로서 세계적인 언어학자’는 타이틀을 외면하기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촘스키의 책이 워낙 많이 번역돼 나오다보니, 이젠 웬만큼 책을 읽는 독자들은 “촘스키, 뻔하지 뭐”라고 말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책엔 뻔하지 않은, 한가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그의 영국 캠브리지 대학 강연 도중에 일어난 일이다. 어떤 청중이 촘스키에게 ‘자본주의 분쇄 투쟁’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촘스키는 예전같으면 상실하게 답했을텐데 이 질문에 대해선 싸늘하게 대했던가 보다. 왜 그랬을까?
“언제나 극단적인 종파주의적 좌파 기생충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민중운동을 방해해왔지요. 강연 당시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더니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노동계급을 조직해서 자본주의를 박살내야 하며 다른 방법은 소용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그 말이 맞다고 대답한 다음, 그건 좋은 생각이지만 여기는 그럴 자리가 아니니 가까운 공장으로 가보라고, 공장까지 가는 차비는 얼마든지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전략이 아닙니다. 저는 그와 다른 전략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122쪽)
우문현답(愚問賢答)이긴 한데, ‘극단적인 종파주의적 좌파 기생충’이란 표현이 놀랍다. 그가 늘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기득권세력에 대해서도 그렇게 독한 표현을 쓴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강한 좌파 색깔을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만끽하고 자신의 인정투쟁 헤게모니의 도구로 써먹으면서 늘 증오와 분열만 조장해 사실상 좌파를 망치는 사이비 좌파들은 어느 곳에건 있기 마련이다. 그들에게 너무 시달린 나머지 분노가 극에 달한 걸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촘스키도 기질적으로 꽤 까칠한 것 같다. 하기야 그러니 그 외로운 투쟁을 계속 할 수 있겠지.
1999년 11월 30일부터 12월 3일까지 시애틀에서 열린 WTO 연례총회는 ‘시애틀 전투’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시애틀에 모인 관료 대표는 3천명, 저널리스트는 2천 명이었지만, 각자 자기 돈 내고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시위대의 수는 6만여명에 이르렀다. 이 시위는 “1960년대의 반전운동과 시민권운동 이해 가장 큰 대중시위”였다. 오죽하면 미국 역사상 최초로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고무탄환까지 발사하는 일이 벌어졌겠는가.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뉴욕타임스』 1999년 12월 1일자에 기고한 칼럼에서 시애틀의 시위대를 가리켜 “노아의 방주를 타고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라고 조롱했다. 이에 대해 노엄 촘스키는 “그가 생각하고 대변하는 1퍼센트 인구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받아친다.(187쪽)
『뉴스위크』 1999년 12월 13일자는 ‘시애틀 투쟁’이라는 표지 기사에서 반(反)세계화를 선동하는 사람들에게 ‘신(新)무정부주의’라는 딱지를 붙였다. 촘스키도 신무정부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하나로 거론되었다. 이에 대해서도 촘스키는 반론을 펴지만, 싸울 대상이 하나 둘도 아니고 정말 피곤하겠다.
최근 국내에 ‘파시즘’ 논쟁이 치열한데, 미국이 한동안 파시즘을 예찬했었다는 게 흥미롭다. 1937년 미 국무부의 유럽국은 파시즘이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인즉슨 “불만을 품은 대중이 러시아 혁명의 사례를 따라 좌경화”할 우려 때문이었다나. 또 국무부는 1930년대말 이탈리아 파시즘의 대부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에서 성공하고, 이탈리아의 대중 동원 수준을 크게 끌어올린 것 때문에 그를 환영했다고 한다. 무솔리니는 “훌륭한 이탈리아 신사”라고 묘사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9년 이탈리아 파시즘을 칭찬하면서 히틀러가 파시즘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 직전까지 미 국무부는 히틀러도 지지했었다.(219-220쪽) 적나라한 국익을 이데올로기로 포장하는 수법에 대한 고발이라고나 할까.
(하략)
출처 불명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