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은 이야기, 저녁에야 일어나는 남자입니다.
다음편은 새벽에 깨어있는 남자 입니다. :-)
누군가에게는 공감, 누군가에게는 몰랐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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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야 일어나는 남자>
그는 흠칫, 놀라며 일어났다. 하지만 막상, 일어나서는 자신의 놀람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집안은 아직 조용한 것으로 보아 아무도 안 온 모양이다. 방음이 좋은 아파트라, 아무도 없는 집안에선 어디 큰 소리 날 구석이 없다. 아마도 악몽을 꾼 탓인 것 같은데... 그마저도 흐릿하여, 확실치 않았다. 대개 이런 식이다. 낮에 자는 잠의 특성인지 그의 특성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침에 잠들고 나서 깨어날 때까지 그는 꿈이란 것을 전혀 꾸지 못했다. 아니, 가끔 이렇게 소스라치게 놀란 채 깨어나 가슴을 진정시키곤 했으니 아마도 악몽정도는 아주 가끔 꾸긴 꾸는 모양새인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뭔가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단 1초의 순간도 떠오르지 않는다. 왜 그런 걸까. 개의치 않게 여기고 넘어가고 싶지만, 가끔씩 이렇게 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잠이 깨올 때마다 그는 뭔가가 매우 답답하다. 답답하고 답답하지만, 머릿속은 텅 빈 채, 오히려 명료하다. 아무 글씨도 쓰지 않은 백지의 원고지 마냥 하얗다. 그것 때문에 더욱 궁금하지만 결국엔 포기하는 수밖엔 없다. 그저 찝찝함으로, 새로운 저녁을 시작할 따름이다. 어떻게든 이 찝찝함이 빨리 떨어지길 바라듯 몸서리치면서, 그렇게.
이불을 걷어낸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방안을 둘러본다. 잠시 고개를 젓는다. 그리곤 하품을 억지로 해본다. 별 뜻이 있는 행동들은 아니다. 그냥, 잠이 깨기까지 마치 패턴처럼 하는 행동이다. 걸어간다. 의자를 끌어당겨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고 항상 하듯 컴퓨터를 켠다. 귓가로 잠시 삥- 하는 이명이 들리고, 이윽고 컴퓨터 안 쿨러 소리가 부담스럽기 시작할 즈음 윈도우 화면이 나온다. 그렇게 평소와 같은 일상이,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그는 이 익숙한 현실이 왜일까, 갑자기 조금 기묘하게 느껴지는 기분이지만, 조금 전 느낀 찝찝함과 함께 억지로 털어냈다. 그리고는 마우스를 잡고 이리저리 휘저으며 인터넷으로 금세 빠져들었다.
휘황찬란한 광고창과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과 선정적인 포즈들의 사진들 몇 장이 휘익, 그의 눈을 스쳐간다. 그는 때로 웃고, 때론 인상 찌푸리기도 하며 눈으로 들어온 정보를 조금씩 머릿속에서 풀어나간다. 오, 얘가 그렇고 그랬어? 별꼴이네. 아,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지? 캬, 세상 참 말세네, 말세. 아, 미친, 진짜 웃기네, 하, 하하하, 하하, 하, 하하하하하... 혼잣말이, 때로 머리에서 입으로 툭 튀어나오며, 그는 받아들인 정보들을 그와 내보낸다. 그리고 금세, 내보낸 모두를 잊어버린다. 다시 마우스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클릭, 클릭. 그러나 사실 인터넷의 모든 이야기들은 그의 변함없는 일상만큼, 몇 글자 다르고 사람만 다르고 구도만 다를 뿐, 그 내용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는 일희일비하며 읽어 내려간다. 그 모두 부질없는 듯하면서도, 그만큼 소중한 것이 없는 듯도 싶다. 그러면서도, 그가 일어날 때 하는 행동처럼 별 뜻 없는, 어쩌면 의식과도 같은 일 - 그런 기분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마우스는 분주히 움직일 뿐 쉴 줄을 모른다. 그 움직임은, 한편으론 성스럽기까지 하다.
순간, 방 바깥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분주하던 그의 손이 잠시 멈칫, 굳어갔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가족 중 누군가 온 것이리라.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오늘따라 늦게 깨버린 자신과 조금 일찍 들어온 가족 누군가에 대한 작은 원망을 해버렸다. 상당히 부질없지만, 그에겐 그나마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에게는 말이다, 그에게는.
그러다 그는 혹시 아버지이시기라도 할까 무서워, 문 열고 소리라도 치기 전에 방문을 조금 열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두리번거리는 그와 막 들어오고 있는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어머니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상황에서, 나름의 안도인지 알싸한 어떤 것이 그의 마음에 들어찼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물으셨다.
"이제 일어났니, 아들? 밥은 먹었고?"
그는 단지 고개만 저었고, 그의 어머니는 밥 금방 차려줄 테니 먹으라며 옷도 채 벗지 않은 그대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 마음 씀씀이에 미안해져버린 건지, 조용히 방문을 닫고 돌아서고야 말았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자, 푸근한 밥 내음이 그의 방문 결로도 스며들었다. 거기에는, 닫아버렸던 문을 다시 열게 만드는 힘이 가득했다. 그를 꾀어내듯 코 주위를 맴돌고, 어느새 파고들어와 버리는 마력과도 같은 그런 - 그리고 정신 차리고 보면, 그를 벌써 식탁 앞에 앉아있게 만드는, 그런 불가사의였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어."
그가 숟가락을 들자,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혼자 먹는 밥상이 쓸쓸하기도 했으나, 이미 이렇게나 늦은 시간, 이미 밥을 드시고 왔을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해 밥까지 해주시고, 늦게 일어나 컴퓨터나 하고 있는 그에게 아무 잔소리도 안하고 자릴 피해주신 것부터가 이미 큰 배려라는 것 쯤,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나마 장남이라고, 제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고, 어머니는 언제나 그렇게 그를 생각하고 위해주셨다. 같은 가족이어도 그를 무시하는 다른 가족들이나 친척들과는 달리, 유일한 그의 편이라 할 분이셨다. 하지만, 그래서 고맙고 미안하지만 그는 그것에 어떻게 보답해야할지 가늠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지금 능력과 처지에 더 민폐 끼치지 않는 것 말고 더 뭘 할 수 있을까? 마음을 알고도 함부로 아는 척 할 수 없는 것이 그의 처지였다. 아주, 아주 한심한 처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냥, 지어주신 밥이나 맛있게 잘 먹고 뒤처리 잘하는 것이라도 하는 수밖에는, 더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가슴이 또 먹먹해져왔다. 그는 하릴없이 애꿎은 밥그릇만 수저로 푹푹 뒤적거렸다.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끝내고나자, 그의 저녁은 어느새 조금씩 밤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곧, 그의 아버지가 들어올 시간이었다. 그는 괜한 분란을 일으키기 싫어 잽싸게 방으로 들어섰다. 들어선 방에는 밥 먹기 전 끄는 것을 깜빡했던 컴퓨터가 아직 켜져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 마우스를 휘젓자 꺼진 화면이 다시금 불을 밝힌다. 껌뻑, 하고 불이 들어오는데, 불빛 따라 밥 먹는 내내 그의 마음속 어딘가 쌓였던 죄스러움이 바스라 드는 소리가, 슬쩍, 그리고는 다시 불빛 따라 껌뻑, 사라져갔다. 마음이 한결 편해져왔다. 그것이 일시적인 도피처임을, 물론 그도 자각은 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를 짓누르던 무게는 마우스의 움직임에 치여 멀어진다. 분주한 손놀림,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던 그 손놀림이 다시 펼쳐진다.
그러다가 바깥 문 여닫는 소리라던가, 텔레비전이 켜지고 꺼지는 소리가 나면, 잠시 그의 손도 멈칫멈칫한다. 도피의 순간에도, 그의 정신은 바깥의 소리에 예민하다. 당연할 수밖에 없지만, 그 멈칫거림이 그는 자꾸 신경 쓰였다. 자연 그의 게임도 순탄치 않게 흘러간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손을 최종적으로 막을 방문의 열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그도 자연 바깥의 소음에 조금 익숙해지며 마우스가 재차 빨라져간다. 휙휙, 훅훅. 그의 화면 속 캐릭터는 화면 밖에서 손 외엔 움직일 줄 모르는 그와 달리 너무나도 잽싸다. 힘차다. 그의 마우스보다도 활기차다. 그의 게임은, 그렇게 좋게 좋게 흘러만 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 바깥이 조용해지자, 그도 왠지 흥이 식는다. 그의 방 바깥에서는 이미 다들 잠들 시간이 되었다. 그에게는 한창 때지만, 주변은 이제 휴식의 시간이다. 그에게는 익숙한 이 시간이,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기묘해지고 낯설게 다가왔다. 밤이 됐음을 알리려는지 차가운 공기가, 보일러가 빵빵히 틀어져 그럴 리가 없는데, 그의 주변을 휘돌아 감싼다.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고도 여전히 시리다. 어디 창문이라도 열렸는지, 바람이 온몸을 친다. 그러나 방문이고 창문이고 다 닫혀져 있어서 그럴 리가 없는데, 여전히 그렇다. 그 때문인지 흥이 더더욱 식는다. 그의 마우스가 마침내 멈춰간다. 흥이 평정심이 되고, 마우스는 멈춘다. 컴퓨터의 전원을 끄자 쿨러 소리도 멈춘다. 화면을 뛰놀던 캐릭터도 멈춘채 사라지고, 그는 여전히 멈춰있는 채다. 그대로다.
그 모든 것이 참을 수가 없는데 -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서, 그는 당황해버린다. 이런 적이 많지가 않은데, 아니, 그렇지가 않나? 갑자기 그는 혼란스럽다. 어지러워짐을 느끼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당황해서? 아님 저녁에 먹었던 게 뭔가 문제였었나? 잠이 부족했나? 게임을 너무 했나? 알 수가 없다. 그냥 그는 의자에 앉아서 어지러움을 다스리려 노력한다. 그러다 그마저 잘 되지 않아서, 잠도 오지 않는데 침대로 가서 누웠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한결 나아지는 듯도 했다. 그의 기분을, 그 자신도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눕고 나니 조금씩 알 듯도 하고, 어쨌든 풀려갔다. 훅, 한방에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조금, 조금씩 나아져갔다. 그렇게 회복을 위해 누웠더니, 배도 부르고 등도 따뜻해 잠이 조금 오기 시작했다. 그는 졸리지도 않은데, 왜 이러지, 고개를 저으며 수마를 이겨내려 노력했지만, 몸은 발끝부터 조금씩 짓눌려오다가, 마침내 눈꺼풀마저 천근만근의 추가 달린 듯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정신이 멀어져갔다. 오랜만에 일찍 잠들겠네, 자신을 위로하며 그는 잠들어갔다.
그리고, 검던 밤이 검푸른 새벽으로 변모할 쯤의 짧은 시간이 지나고, 곧 그는 깨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