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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차단 상태
    환상괴담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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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panic_87749
    작성자 : 환상괴담
    추천 : 14
    조회수 : 2177
    IP : 222.97.***.226
    댓글 : 4개
    등록시간 : 2016/05/10 19:06:35
    http://todayhumor.com/?panic_87749 모바일
    [환상괴담] 미지의 상쇄 (도미지 연작 1)
    '아, 긴장하지 말자! 그전부터 수십번 연습해왔던 일이야, 그냥 연습대로만 하면 문제없다고.'<br><br>자신을 독려하는 말과는 달리 상당히 얼어붙은 한 남학생의 어깨가 우물쭈물거리고 있다.<br>잠시 뒤에 있을 깜짝 고백을 위해 준비한 편지와 선물을 앞으로 들었다가, 뒤로 감췄다가,<br>조금이라도 멋진 장면을 연출해보고자 애쓰는 연출가가 되어 예비 공연에 열중하는 모습.<br>슬쩍 손목시계를 쳐다보니 약속 시간까지 10분 남짓 남았다, 시간이 모자란지, 충분한지 몰라도<br>한숨을 푹푹 쉬는 입술이 질끈 깨물었다 풀리기를 계속하며 초침처럼 째깍거린다.<br><br>'현애야, 우리 이제 친구하지 말자.. 왜? 하고 현애가 말하면.. 친구말고 애인하자.. <br>아씨, 이건 너무 오글거리는데.. 고백을 해봤어야 알지, 연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학원도 없고.'<br><br>수십번을 상상 속에서 성공시킨 고백이었겠지만 누구라도 상상 속에서 육상 세계 신기록 정도는 갈아치워 본<br>적이 있는 법, 백 번의 다짐도 소용없다는 걸 아는데는 아까운 나머지 10분의 시간이 필요했다.<br><br>'어떡하지? 그냥 저번에 빌려준 5천원이나 달라고 하고 끝낼까? 오늘은 날이 아닌가?<br>날씨도 꿀꿀하고.. 분위기 잘못 타면 완전 쪽박 차는 거 아냐?'<br><br>나무 바닥에 사뿐한 발소리가 실려온다, 토요일 방과 후 이 시간에 이 교실에 올 사람은<br>한 명 밖에 없다, 현애♡진우 커플의 1일이 되기를 바라며 진우가 떨리는 만큼 선물을 꽉 쥐었다.<br><br>... <br><br>" 아. " <br>" 어... "<br><br>놀란 눈동자가 서로 마주보며 멈춰서있다, 서로에게 뜻밖이었다는듯.<br>발걸음의 주인이 현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란 점에서 예상은 한 번 비틀어졌다.<br><br>" 박진우? 우리 같은 학년 맞지? 2학년 교실은 몇 층이야? "<br><br>살갑게 말을 걸어오지만 분명 처음 보는 남남, 진우는 이름 모를 여학생이 자신의 초록색 이름표를 보고 자신의<br>이름과 학년을 알았단 걸 짐작했다. 같은 학교를 다니면 이름이라도, 얼굴이라도 알 법 하지만 전혀 새로운 만남이었다.<br>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2학년 교실이 몇 층인지도 몰라서 토요일 방과 후에 으슥한 빈 교실까지 찾아온다니.<br><br>" 바로 윗층인데.. 잘못 왔나보네. 여긴 빈 교실이야. "<br>" 그럼 넌 여기 왜 있는데? "<br><br>짖궂게 질문한 여학생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허리를 앞으로 숙여 한 발짝씩 다가왔다.<br>진우의 허리 뒤에 숨긴 편지와 선물이라도 채갈듯이 점점.<br><br>'아, 벌써 약속시간 3분 지났는데 좀 있으면 현애가 오는데.. 얘 뭐야?'<br><br>" 청소 구역이 여기라서 그래. 무슨 2학년이 2학년 교실도 모르냐? "<br>" 으응. 전학 왔거든. 이 학교 교복 입어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야, 안내를 듣긴 들었는데 정신이 없어서.<br>괜찮다면 네가 안내 좀 해줘. "<br>" 그럴 시간 없어. 지금 바빠. "<br>" 그럼 청소 도와줄게, 이 학교 와서 처음 만난 2학년이 너야, 우리 친하게 지내자. "<br>" 혼자 해도 괜찮으니까 나가, 같이 할 필요는 없어. "<br>" 청소 끝나고 잠시는 괜찮지? 첫 날이라 좀 도와줘, 그럼 기다릴게. 꼭 와줘? "<br>" 무슨 소리야, 그냥 내일 다른 여자애들한테 말해, 야! "<br><br>충분히 들릴만한 거리였는데도 의문의 전학생은 대꾸없이 교실을 나가고,<br>운명의 장난처럼 준비할 새도 없이 현애가 불쑥 들어섰다. <br>한 눈에 보기에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br><br>" 너 표정이 왜 그래? "<br>" 어? 아.. 집에 빨리 오래서.. 아빠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는데 크게 다치진 않아서 일반 병실에 계신대.<br>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 용건만 간단히 하자, 왜 불렀어? 아까 '야' 하고 소리 지른 거 너야? "<br><br>수 백 개 준비했던 오글거리는 고백 멘트는 기억 속에서 구겨져 다시 펼 수 조차 없고,<br>현애가 먼저 걸어놓은 대화의 모래시계가 빠른 속도로 모래를 쏟아내고 있었다. 용건만 간단히 하길 원하는<br>다급한 표정의 현애에게 무슨 고백을 성공시킨단 말인가? 아버지가 병원에 계시다는데!<br><br>" 그.. 그거 나 아냐, 왜 불렀냐면.. 그.. 그게.. "<br>" 빨리- 나 가봐야 한다니까.. "<br>" 앗, 그, 저번에 너한테 빌려준 오천원 있잖아, 네가 나한테 생일 선물 줬었잖아, 그냥 그거랑 퉁치자고. "<br>" 그 얘기 하려고 부른거야? 너도 참 너다. 그정도는 그냥 문자로 해도 돼, 오천원 그거 뭐라고 남자애가<br>쪼잔하게. 나 빨리 가봐야겠다, 으유 뭘 그런걸로 사람을 왔다갔다하게 만들어, 강아지 훈련 시키냐? 갈게. "<br><br>'아.. 씨, 악재가 겹치네, 분위기도 안 도와주고 날도 안 도와주네, 다음에 어떻게 또 기회를 만들어.'<br><br>편지와 선물을 가방에 쑤셔넣은 뒤 책상 밑에 쭈그려앉아 한참을 속썩이던 진우의 머릿속에 가볍게<br>들어넘겼던 누군가의 한 마디가 떠올랐다.<br><br>- 잠시는 괜찮지? 그럼 기다릴게, 꼭 와줘 - <br><br>' 성격이 털털한거야.. 아니면 철이 없는거야? 초등학생도 아니고 고등학생이나 되가지고..<br>외국에서 전학 왔나? 그럴수도 있겠다. 처음 보는 남학생한테 무슨 학교 안내야. 영어 교과서냐? '<br><br>고백의 기회를 허탈하게 날려버린 진우의 어깨가 꺼질듯 기운 채로 힘없이 계단을 올라 2학년 교실에 정말 <br>혼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전학생에게로 향했다. 골똘히 생각해보면 전학생의 얼굴이 꽤나, 아니..<br>꽤나 수준이 아니라 학교에서 손에 꼽는 '얼짱'들과 비교해봐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할 목적도 있었다.<br><br>" 진우야! "<br><br>전학생이 교실 한 편에 다소곳이 앉아있다가 진우가 들어서자 몹시 반기며 달려왔다.<br>초록색 이름표에 적힌 '도미지'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보였다.<br><br>" 야, 지금 늦었는데 무슨 학교 안내야, 월요일에 애들 다 오면 어차피 같이 다니다가 배우면 되잖아. "<br>" 그래도 와줄거라고 생각해서 기다린건데, 부탁이야. "<br><br>고백은 현애한테 하려고 한건데, 설레는 표정은 미지가 짓고 있었다.<br>사심없이 간절하게 바라는 눈동자. 기다란 속눈썹 아래 맑은 눈이 깜빡이는 법도 잊은 채 일렁이고 있었다.<br>여자의 이런 표정엔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배운 적 없는 진우는 시선을 바로 마주하지도 못 했다.<br><br>' ... 어떡하지. '<br><br>가방 속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현애를 향한 선물과 편지가 더욱 의식되면서도,<br>'어차피 사귀는 것도 아닌데 현애 눈치를 볼 필요가 뭐 있냐'라는 마음이 피어올랐다.<br>언제 현애를 향해 사랑을 키웠냐는듯 마음 한 구석에 새로운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br><br>" 친하게 지내자니깐! "<br>" 아. 응. "<br><br>거리를 두기는 커녕 미지의 손이 이끄는대로 따라가고 있었다.<br>아직 현애와는 손 한 번 잡아본 적이 없이, 어쩌다 한 번 실수로 스쳤던 경험을,<br>그때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멋쩍어했던 찰나를 씨앗으로 삼아 싹 터온 사랑을 아까까지만 해도 품고 있었는데<br>반나절만에 새싹이 뜯겨나가고 처음 보는 나무가 땅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br>씨앗도, 새싹도 필요없이 질긴 뿌리부터 구석구석.<br><br>" 여기가.. 교무실.. 교무실은 알지? "<br>" 알아도 가르쳐줘. 전부 다. "<br><br>홍당무처럼 붉어진 자신의 손이 뜨거워서 희고 보드라운 손이 그 열기를 달래주는건지,<br>아니면 긴장해서 차게 식어버린 자신의 손을 포근한 손이 달래어 열기를 보태주는건지,<br>맞잡은 손과 손 사이에 진우를 짜릿하게 만드는 정전기가 달려들었다.<br><br>" 여긴 양호실. 별건 없어.. 그냥 대일밴드랑 빨간약 정도? "<br>" 그래? 너 더워? 땀 흘러, 기다려봐. "<br><br>물어보지도 않은 시덥잖은 이야기까지 꺼내며 어느새 큐레이터라도 된듯 아예 학교를 해설하고 있다.<br>보통은 자신의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눈치채고 체면을 차렸겠지만 옆에서 '우와' '와' 추임새를 넣으며<br>고개를 끄덕이는 사랑스러운 이성을 둔 채라면 체면이 대수는 아닌 모양이었다. 자신이 뭐라고 떠드는지도<br>모를 정도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진우의 이마를 달콤한 향기와 시원한 감촉이 순간 덮었다.<br><br>" 아. 고마워. "<br>" 더워? "<br><br>은은한 향기의 손수건이 이마를 쿡쿡 찍어대고, 눈앞을 가린 손수건이 들썩이면 그 너머로<br>안쓰러워 내려간 긴 눈썹과 삐죽이는 입술이 한 점의 조각처럼 또렷이 보였다.<br><br>" 이제 시원해? 응? "<br><br>이미 땀은 몇 번이고 닦아져 마른 손수건만 붙었다, 뗐다를 맴도는데 진우는 그 향기에 열사병이 걸린듯<br>묵묵히 손수건 너머로 보이는 미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br><br>" ...? "<br><br>길고 가느다란 다섯 손가락이 진우의 눈 앞에서 휙, 휙 오가자 그제서야 '아' 하고 바보처럼 진우가 초점을 찾았다.<br><br>" 뭐해? "<br>" 아.. 아니, 잠시 딴생각.. "<br><br>확실히 현애가 심어놓은 씨앗은 온데간데 없었다.<br>제대로 자리 잡은 나무뿌리가 그 흔적을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br><br>ㅡ<br><br>다음 주 월요일이 되자 2학년 도미지의 정식 등교일 첫 날부터 학교는 소란에 쌓였다.<br>빼어난 미모가 가십거리가 되어 쉬는 시간마다 미지를 보기 위한 시선들이 몰려들었다.<br><br>" 야, 진우야, 넌 관심 없냐? 전학생 보러 안 갈래? "<br>" 무슨 유난을 떨어.. 그냥 전학 올 수도 있지. "<br>" 오- 완전 일편단심이네? 니 여신은 현애냐? "<br>" 미쳤냐, 쓸데없는 소리하지마. "<br>" 너 저번 주에 고백한다더니? 했냐? "<br>" 고백은 무슨 고백이야. 전학생이나 보러 가세요 그냥. "<br><br>'병-신들,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쉬는 시간마다 아주 전교 단위로 난리냐.<br>난 벌써 손까지 잡았다고. 아무나 손 잡고 다니는게 성격인지는 모르겠지만.'<br><br>" 진우야! "<br><br>남녀합반도 아닌데 자신을 부르는 여자 목소리에 혼자 생각에 잠겨있던 진우가 화들짝 고개를 돌리자<br>밝게 웃는 예쁜 얼굴 뒤로 우글거리는 남학생들의 시선이 함께 쏟아지고 있었다.<br><br>" 어, 어.. 미지야.. 아니, 도미지. 왜..? "<br>" 몇 반인지 물어보는 걸 까먹어서 너 찾으려고 2학년 반 다 돌았어, 여기였구나? "<br><br>'저 찌질이는 뭔데 쟤랑 벌써 달라붙냐?'<br>'존나 나대네'<br>'야 저 새끼 이름 뭐야? 쟤랑 아는 사이냐?'<br>'쟤 중학교 때도 공부만 하던 놈인데'<br>'저거 그 2학년 여자 중에 김현애라는 애하고 친할건데?'<br>'새끼 아무데나 집적대는가보네'<br><br>뜻밖의 군중에게 보여지는터라 예민해진 신경이 듣지 말았으면 좋을 소리까지 제대로 포착하고 있었다.<br>평범의 오차 범위를 벗어난 적이 없는 진우가 미의 여신과 함께 있단 것만으로 신들의 성역을 탐낸 죗값을<br>치뤄야 할 상황이다. 덕분에 말을 얼버무리며 반가운 티도 못 내고 쉬는 시간이 몽땅 흘러갔다.<br><br>' 미치겠네.. 좋은건지 나쁜건지.. '<br><br>물리 교과서를 무심코 몇 장 넘기다 교과서 귀퉁이에 쓰여진 '현애'를 보곤 짐짓 놀라 줄을 벅벅 그어버린다.<br>집에 포장 그대로 놔둔 선물과 편지가 생각이 나자 마침내 머릿속도 줄을 벅벅 그어버린다.<br>생각도 하지 않았던 일들의 연속.<br>미처 잊기도 전에 몇 페이지 더 가지 않아 현애가 고백을 받아준다, 받아주지 않는다를 두고 점쳐본 <br>낙서가 쏟아진다.<br><br>ㅡ<br><br>김현애 17:51 <br>[ 진우야 이번 주 영화 같이 보러가자 ]<br><br>진우에게 현애가 먼저 영화를 보러가자고 제의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 불과 수 일 전까지의 진우였다면<br>환호를 지르며 기뻐해야 마땅했겠지만 혼란으로 가득찬 지금의 진우에겐 답하기 어려운 숙제였다.<br>현애와 남녀 사이의 친구로 지내며 조금씩 키워온 사랑을 고백하기 직전 멈추고 집에 가져다 놓은 편지와 선물,<br>그리고 좀 더 가까이 한 발 다가오는 현애, 그러나 변수로 등장한 미지.<br>현애를 생각하면 두근거렸던 가슴이 미지를 생각하면 벌컥거리니 머리보다 빠른 심장 덕분에 찾아온 혼란이<br>진우의 머릿속을 어두운 밤으로 이끌었다. 어떻게 답해야할지가 문제다. <br><br>" 문자? 누구랑? "<br><br>진우의 어깨에 미지가 턱하니 얼굴을 올리자 긴 생머리가 하늘하늘거리며 스마트폰 화면까지 닿았다.<br><br>" 아. 친구. "<br>" 그렇구나. "<br><br>현애는 야자를 하는 반면 진우와 미지는 야자를 하지 않았고, 그덕에 미지는 자주 진우에게 함께 가기를<br>제안했다. 진우로선 거절할 구실도 이유도 없었다. <br><br>" 우리 집.. 왔다갈래? "<br>" 집..? 집? 부모님 안 계셔? "<br>" 늦게 오셔. "<br><br>초등학생 때 반 친구 생일파티를 제외하곤 여학생의 집에 가본 적 없는 진우였기에 크게 당황스러웠지만<br>잠시야 뭐 어떻겠냐고 여기며 못 이기는 척 그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br>영화 보러가자는 현애의 문자엔 답변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있는 집에 가자는 미지의 요구엔 응하는 자신이 <br>어딘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은 확실했다. <br><br>ㅡ<br><br>" 열쇠도 안 걸어놓고 다녀? "<br>" 깜빡하고 안 잠궜나봐. "<br>" 바보야, 요즘 얼마나 사건사고가 많은데. 문단속 잘 해. "<br>" 걱정해주는거야? 후후. 조금만 기다려, 나 땀을 너무 흘려서 샤워부터 해야겠다. "<br><br>'샤.. 샤워?' <br><br>무슨 망상을 하는건지 속으로 자신을 타이르며 진우는 책가방을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br>소파 외엔 특별한 가구가 없다.. 식기대에 설거지한 그릇 정도는 말려지고 있을 법도 한데<br>주방부터 거실까지 텅텅 빈 것이 사람 셋이 사는 집이라고 믿기엔 너무도 허전했다.<br><br>' 무슨 집에 텔레비전도 없냐.. 수도승인가 무슨. '<br><br>그 와중에 쏴아, 하고 들리는 물소리가 야릇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br>물줄기가 곡선을 타고 내려가는 상상을 하자 집안의 살림살이는 속세의 이야기일뿐,<br>여자와 단둘이 있는 집에서 그녀의 샤워 소리를 듣는 지금 상황이야말로 궁리할만한 주제가 아니겠냐며..<br><br>눈을 꼭 감고 살색 상상 속을 헤매던 진우가 수건소리에 감은 눈을 번쩍 뜨자,<br>상상하던 살색이 눈 앞에 천연색으로 펼쳐지고 있었다.<br><br>" 으앗! "<br><br>자신의 앞에 다소곳이 선 채 머리를 한 쪽으로 늘어뜨리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있는 미지.<br>어깨에서 허리, 허리에서 종아리로 이어지는 휘어지는 곡선을 채 다 훑기도 전에 진우는 바짝 엎드렸다.<br><br>" 이러면 안 돼? "<br>" 무.. 무슨 말이야? "<br>" 내가 이러는게 싫어? "<br>" 싫, 싫다는 것보다, 왜 벗고 있는거야? "<br>" 빨래가 덜 말라서 입고 있을 옷이 없는걸. 속옷은 입었어, 눈 떠도 괜찮아. "<br><br>그 말에 '야호!'하고 눈을 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br>'이러면 안 돼?'라는 말이 몇 번이고 다시 들려왔다.<br><br>'이러면 안 돼냐고? 그럼 자기가 그러고 있는 줄 알면서도 일부러? 이게 무슨..'<br><br>" 진우야. 나 쳐다봐. "<br>" 옷.. 입었지? " <br><br>설마 속옷 차림이겠냐며 진우가 눈을 뜨자, <br>브래지어와 팬티만 입은 채로 자신을 향해 두 팔을 살짝 벌린 미지가 눈 앞에 서있었다.<br><br>" 히익! "<br>" 내가 이러는게.. 싫어? "<br><br>충격에 익숙해진 탓인지 진우는 점점 미지를 똑바로 마주하는 게 쉬워졌다.<br>대담하게도 미지의 얼굴부터 목선을 따라 전신을 똑똑히 쳐다봤다.<br><br>" 진우야. 나.. 너 좋아해. "<br><br>진우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br><br>'이제 겨우 한 달 된 사이에, 사귄 것도 아닌데, 이래도 되는거야?'<br><br>" 나는 이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이야. 안아줘. "<br><br>몇 년을 덤덤하게 지내다 손끝 한 번 스치면서 겨우 서로를 이성으로 인식했던 현애와의 일이 바보 천치로<br>느껴질만큼 과감한 고백이었다. <br><br>" 미, 미지야, 우린 아직 어려. "<br>" 후후후. "<br><br>진우가 앉은 자리 옆에 다리를 기울인 채 나란히 앉은 미지가 진우의 어깨에 늘 해왔듯 얼굴을 올렸다.<br>그리곤 속삭였다.<br><br>" 나 샤워할 때, 무슨 생각 했어? "<br><br>'니 벗은 몸!'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기에 진우는 필사적으로 다른 주제를 떠올리려 애썼다.<br><br>" 그.., 이 집 왜 소파 밖에 없어? 다른 가구는 안 보이는데.. 큰방에 있는거야? "<br><br>그러자 미지의 표정이 성난 살쾡이처럼 일그러졌다.<br><br>" 내 전부를 앞에 두고 그런 헛소리 하기야? "<br><br>미지의 갑작스러운 분노에 넋을 잃은 진우가 그녀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흠모하는 마음이 뒤죽박죽 섞인 채로<br>쳐다보았다. 양처럼 고분고분, 더우면 차게, 졸리면 눕게 해주던 그녀의 여태까지 모습에선 볼 수 없었던 반전이었다.<br><br>미지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점점 다가왔다. <br>두 손가락으론 지도 위의 컴퍼스를 놀리듯 쿡, 쿡, 찍어가며 점점 허벅지로부터 진우의 가슴팍을 향해갔다.<br>공포와 환희, 절규와 환호, 손가락의 남북극이 좌표를 찍을 때마다 희노애락이 피부를 뚫고 전해졌다.<br>진우의 머리가 아찔해지며 어떻게 되든 될대로 되라고 여길 무렵,<br><br>- 띵동 ! <br><br>" ...? "<br><br>카카오톡 소리, 진우도 미지도 그 소리에 교복 주머니를 쳐다보았다.<br>진우가 살며시 핸드폰을 꺼내 비밀번호를 풀고 문자를 열자 잽싸게 미지가 낚아챘다.<br><br>김현애 19:35 <br>[ 꼭 영화 아니라도 좋아.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br><br>" 얘.. 너랑 소문이 좋게 나고 있더라..? "<br>" 내 핸드폰 돌려줘! "<br>" 좋아, 줄게. 대신 얘하고 만나지 마. 문자로 보내. 들을 말 없다고. "<br>" 그건 안 돼, 억지잖아. "<br>" 날 옆에 끼고서.. 다른 여자도 마음 속에 품고 있단거야? "<br>" 너랑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너 제정신이냐? 나 갈게. "<br><br>진우가 거세게 밀어붙이자 그래봤자 여학생에 불과한 미지가 힘없이 핸드폰을 빼앗겨버렸다.<br><br>" 진우야. 진우야- "<br><br>진우가 다급히 집을 나서버리고, 속옷 차림의 미지만이 집안에 덩그러니 남겨졌다.<br><br>" 호호호. "<br><br>아무 일도 없었지만 모든 일에 만족한 것처럼 미지가 웃음을 감추질 못 했다.<br>소파 밖에 없는 집안에 높은 웃음소리가 공기를 연주하고 있었다.<br><br><br>ㅡ<br><br>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br>구미호가 아홉꼬리를 살랑이듯 거리의 네온사인이 휘둥그레,<br>도깨비불이 되어 세상을 적시러오듯 진우에게로 달려든다.<br><br>" 헉, 헉, "<br><br>고개를 세차게 저어대자 겨우 빛무리가 '24시간 찜질방'이니, '궁전모텔'이니 하는 <br>활자가 되어 모든 게 허상이었다고 고백한다.<br><br>" 우웩. "<br><br>' 모든 게 비틀어졌어, 몇 년간의 짝사랑이 틀어지더니, 두 보름에 걸친 사랑도 불장난이야,<br>도미지, 뭐하는 애지? 첫 만남부터가 의문투성이였어. '<br><br>세상이 다시 일그러진다.<br>지나다니는 짧은 치마 입은 여자들 골반에 아홉 개의 꼬리가 돋아난다.<br>눈 밑에 시뻘건 화장을 귀까지 늘어뜨린 채로 진우를 향해 입맛을 쩍쩍 다신다.<br><br>' 내가 왜 이러지, 여우에 홀린다는 게 이런건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br><br>밤거리의 네온사인은 도깨비불이 되어, 여자들은 구미호가 되어,<br>그 아홉꼬리에 도깨비불이 묶여 사방팔방으로 쥐불놀이가 시작된다.<br>시선을 둘 곳조차 없고 멀미는 더욱 심해진다.<br>속을 몇 번이고 게워내도 마찬가지..<br>마침내 의식이 없다.<br><br>김현애 20:49 <br>[ 예, 아니오라도 답해줘 ]<br><br>ㅡ<br><br>진우가 거리에서 의식을 잃고 병원에 급히 실려간 뒤 퇴원까지 했지만 학교는 나갈 수 없었다.<br>원인 불명의 고열과 두통이 몸을 지배하는 탓에 학교에 차마 갈 수 없었다.<br>물론 현애의 문자도 확인하지 않은 채로, 진우는 여전히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환영에 시달리고 있었다.<br><br>긴 생머리, 순진한 미소로 웃으며 천천히 손을 흔드는 한 여자,<br>바람이 불어오고, 긴 생머리가 한 번 얼굴을 덮었다가 드러낼 즈음이면<br>두 눈은 시뻘건 적빛으로 번져 광채가 양옆을 지나 솟아나온다.<br><br>' 나를 사랑하게 한 건 너 자신이야, 네가 사랑했던만큼 나도 널 사랑해줘야하고,<br>네 사랑에 갚아주는만큼 너도 날 사랑해야해, 그때만큼은 날 아낌없이 베어물어가,<br>너의 사랑만큼 난 생존할 수 있고 나는 다시 그 사랑만큼의 사랑을 주는거야,<br>상쇄, 상쇄란 말이야! 어느 한쪽이 벗어나려거든 용서 못 해, <br>내게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은 단 하나야.. 사랑없이 생존할 수 없는 나에게,<br>네 생존을 줘.. '<br><br>' 마지막 기회야, 지금 당장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날 사랑해주지 않으면 상쇄하지 못 해,<br>그럼 내가 가져갈 건 하나 밖에 안 남았겠지? '<br><br>네, 사랑을 드려야죠, 당연히 드려야죠!<br>사랑한다구요, 사랑한다구요!<br><br>" 으아악-! "<br>" 진우야, 열이 아직 끓어, 진정하렴! "<br>" 만나야 해, 만나야 해, 아직 있을거야, 상쇄, 상쇄해야해! "<br>" 제발 그 놈의 상쇄 소리 좀 그만해, 그게 대체 뭔데! "<br>" 제기랄, 비키라고! "<br><br>앓아누웠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완력으로 어머니를 내팽개친 진우가 집밖으로 뛰쳐나왔다.<br><br>" 진, 진우야! "<br><br>진우의 충혈된 동공이 씰룩거렸다. 눈 앞에 서있는 건 현애였다.<br><br>" 학교를 통 안 나와서, 전화해보니까 어머니께서 너 아프다고 하시길래.. 병문안 왔어. 몸은 좀 어때? "<br>" 비켜. "<br>" 얘기 좀 해.. 너 지금 괜찮은거야? 눈이 빨개, 열은 왜 이렇게 많이 나? "<br>" 비키라고! 비켜! "<br>" 아얏, "<br><br>현애 역시도 진우의 완력에 그 자리에 넘어졌으나 현애의 손이 진우의 발목을 붙잡았다.<br>균형을 잃고 진우가 제자리에 쓰러졌다.<br><br>" 어디 간다는거야, 너 아프잖아, 내 말 좀 들어! "<br>" 상쇄해야해, 상쇄해야해! "<br>" 혹시 미지한테 가는거니? 미지라면 학교 안 나온지 오래 됐어, 너 학교 안 온 뒤로 줄곧!<br>혹시 너희 그동안에도 만난거야? 그러지마, 미지가 온 뒤로 너 정말 이상해졌어! "<br>" 미, 미지가 없어? 그럴리가 없어! 상쇄하지 못 하면! 씨발, 이거 놔! "<br><br>발목을 꼭 붙잡은 현애의 팔뚝을 진우의 이빨이 물어뜯었다.<br><br>" 아흑! "<br>" 놔, 상쇄해야해! 시간이 없단 말이야! "<br>" 절대 안 보내, 나 사실 너 많이 좋아해, 사랑해, 그래서 더 못 보내! "<br>" 집어치워, 난 가야한다고! "<br><br>진우의 주먹이 현애의 얼굴을 때릴 때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가녀린 목이 춤을 추었다.<br><br>" 진우야, 정신 좀 차려, 응? 우리 예전처럼 돌아가자, 내가 먼저 말할게, 내가 더 사랑한다고! "<br>" 정신 나간 년. 꼴깝 떨고 있네! 잡아뜯어버리기전에 비켜어어어 "<br><br>현애의 머리카락을 부여잡은 진우가 자신이 환영 속에서 본 쥐불놀이처럼 <br>현애의 머리를 사방팔방으로 흔들어댔다. 현애는 비명과 함께 구미호가 추던 춤을 춘다,<br>현애를 사랑하던 애틋한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편지에 써내려가던 그 손이,<br>현애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고백을 연습했던 그 입이,<br>그녀를 헐뜯으며, 그녀를 쥐어뜯고 있는 별천지.<br><br>결국 현애가 제자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진우는 다시 몸이 기억하는대로 미지의 집을 향해갔다.<br>의식과 무의식의 교차, 구미호와 쥐불놀이의 환상 속에서 더듬더듬거리며.<br><br>짤깍짤깍, 처음 왔던 날처럼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br><br>" 왔어, 왔다고, 사랑해, 진짜 사랑한다고! 상쇄하자, 응? "<br><br>... 아무 것도 없었다.<br>딱 하나, 소파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건 여전했다.<br><br>" 도미지! 어딨어? 사랑해, 진짜야! "<br><br>없을게 뻔한 소파 밑부터 시작해서 아무 것도 없는 방을 미친듯이 뒤져봐도 마찬가지였다.<br><br>" 사, 사사,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니까! 왜 안 보여! 왜! 으아악!<br>나 죽을거야. 나 이대로 죽는거라고! 상쇄하지 못 한다면.. 내 목숨이.. 갸아아아아아! "<br><br>닥쳐올 죽음에 대한 공포로 진우의 세상에 다시 어둠이 내렸다.<br><br><br><br><br>ㅡ ...<br><br><br>평범한 교실의 아침. <br>아침 조회를 위해 들어서는 담임 선생 옆에 퀭한 눈을 한 누군가 함께 들어온다.<br><br>" 진우야! "<br>" 어 박진우! "<br>" 야, 몸은 괜찮아? "<br><br>영문을 모르겠어. <br>어째서 내가 살아있는거지.<br>그 모든 건 꿈이었던걸까?<br><br>" 조용히 해, 음.. 진우가 많이 아파서 학교를 빠졌었는데 오늘부터 다시 나오게 됐다.<br>진우야, 자리에 들어가 앉아라. 그리고 너희들 수업시간에 떠들지 마라. 지금 학교 분위기 엉망이야.<br>그 전학생 실종부터 시작해서.. 어제 2학년 여학생 중에 현애라는 친구가 자살했다.<br>원인은 불명인데, 책상에서 유서가 발견됐고 내용은 아직 파악 중이라는구나. <br>하여간 그런 관계로 웃고 떠들 분위기가 아니니까 조심해라. 그 반 담임 선생님이 우리 반 1교시지?<br>1교시에 내가 들어올거니까 그렇게 알고 입 다물고 자습 준비나 하고 있어. "<br><br>ㅡ<br><br>저기 어딘가, 생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이 생기 넘치는 얼굴로 싱긋 웃고 있다.<br><br>"목숨값은 대신 받았으니 상쇄는 이룬 셈 칠게. 목숨과 맞바꿀 정도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은..<br>그 사랑을 주는 사람의 목숨값을 대신 받기도 하거든.. 아아, 이 생명력.. 이 감칠 맛..!" <br><br><br><br><br><br><br>ㅡ 미지의 상쇄 끝.
    환상괴담의 꼬릿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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