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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panic_24455
    작성자 : cogito
    추천 : 23
    조회수 : 9170
    IP : 58.235.***.164
    댓글 : 8개
    등록시간 : 2012/02/07 10:33:38
    http://todayhumor.com/?panic_24455 모바일
    악마는 있다.(XX제분 류회장 부인 살인 사주 사건)
    2003년 유명했던 여대생 청부 살인 사건인데 세상에는 정말 인간이 아닌 악마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01
    2003년 10월 28일 오전 11시경이었다. 삼십대 말쯤의 초라한 모습을 한 여자가 나의 법률사무소로 찾아왔다. 튀어나온 볼 위에 파묻힌 듯한 작은 눈에서는 만만치 않은 삶의 곡절과 강인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사건을 의뢰하러 온 게 아니라 잠시 상담만 하러 왔습니다. 되나요?”
    그녀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물었다. 뭔가 자신이 닥친 현실에 대해 정밀한 재 감정을 시도하려는 태도였다. 

    “어떻게 저를 알고 찾아오셨죠?”
    나 역시 그녀의 경로를 탐색 했다. 단순한 지식검색기계가 되기 싫었다. 

    “저도 이런 말 하는 게 어떤지 모르는데 감옥 안에 있는 다른 살인범들이 가보라고 소개를 해서 왔어요.”
    다른 살인범이란 말을 쓰는 걸 보면 그녀가 살인에 관련됐다는 얘기다. 그리고 살인범이 다른 살인범에게 변호사인 나를 소개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따져 보니까 이럭저럭 살인사건을 많이도 맡았다. 사건마다 수면 밑의 빙산 같은 내용들이 많기도 많았다. 그 여자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살인범이 소개한 게 찝찝하지만 그냥 한번 와 본 겁니다. 미안합니다.”
    그 정도면 나를 선임할 의사는 없지만 솔직한 태도였다. 

    “알겠습니다. 상담은 정확히 해 드리겠습니다. 유리하던 불리하던 제3자의 입장에서 판단 한 걸 정직하게 말씀드리죠. 아마 먼 훗날 실질적인 도움이 된 걸 아실 겁니다.”
    어느 분야건 일단 정확한 진단이 중요했다. 브로커들의 사기가 법조계에도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비로소 그 여자는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치듯 조심스럽게 앉았다. 긴장한 그녀의 얼굴에서 초조해하는 빛이 역력했다. 

    “저 혹시 지난해 재벌부인이 판사사위하고 사귄다는 여대생을 청부살인한 사건 아세요? 여대생이 공기총에 맞아 죽었는데요. 텔레비전하고 신문에 많이 났는데... 그 범인중의 한 사람이 제 남편입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간신히 입을 열었다가는 말끝을 흐렸다. 며칠 전 뉴스와 2580 시사프로에서 본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두 사내가 누런 점퍼를 푹 뒤집어 쓴 채 봉고차에서 내려 허리를 구부리고 경찰서문을 향해 다급히 가고 있었다. 수많은 카메라 플래쉬가 그들의 등짝에 가시같이 가서 박히고 있었다. 그들 두 명은 한 재벌부인으로부터 청부를 받고 여대생을 살해한 후 해외로 도주했었다. 재벌과 판사, 치정과 청부살인이란 우리사회 상부 층의 정신적 빈혈 증세를 반영한 사건이었다. 시사프로인 2580에서 재벌부인에게 전화로 묻는 장면이 나왔다. 회장부인은 침착한 어조로 담당 피디를 타이르면서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말도 안 되죠. 제가 어떻게 살인을 교사할 수 있겠어요. 저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입니다.”
    잔잔한 어조와 내세우는 논리에서 난 완전범죄를 시도한다는 냄새를 느꼈다. 음지의 세계에서 살인도 하나의 독특한 돈벌이였다. 의뢰인 중에는 악덕기업인이나 사이비교주, 부패 정치인들이 많았다. 걸리면 사후처리 방법도 일정했다. 변호사를 사고 관료들을 매수했다. 감옥 사는 값을 충분히 치르면 범인도 입을 닫았다. 그러면 사건은 영원히 미궁에 빠졌다. 앞에서 잠시 침묵하던 그 여자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저도 초등학생하고 중학생을 키우는 엄마입니다. 그 죽은 여대생 집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남편이지만 극형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이 조금만 더 절제를 했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여튼 모든 게 남편의 잘못입니다.”

    그녀는 간단히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보험회사 직원이던 그녀는 한 고객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과 선을 보고 바로 결혼했다. 남편 집안의 고모부는 재벌이라고 했다. 여러 계열회사와 호텔을 가지고 있고 제주도 등 곳곳에 땅도 많았다. IMF 외환위기의 파도는 그녀 가족을 단숨에 쓸어버렸다. 지하 셋방에서 그녀는 녹즙배달을 하고 남편은 가방공장에 나갔다. 나중에는 고모인 회장부인의 운전기사를 했다. 

    회장부인의 기사를 하는 남편의 얼굴은 항상 수심이 가득했다. 곤란한 일들만 시킨다고 했다. 언제부턴가 판사 사위를 미행하는 게 남편의 일이라고 했다. 아침에 판사 뒤를 따라 같이 출근하고 하루 종일 법원 앞에서 죽치다가 저녁에 돌아가 보고하는 게 일상이라고 했다. 회장부인은 매번 화를 벌컥 냈다고 했다. 회장부인은 한번 누구를 의심하면 그걸 푸는 법이 없었다. 회장부인은 병적으로 사위를 의심했다. 심지어 딸 내외의 방에 도청장치까지 하고 감시했다. 그럴만한 이유도 있었다. 마담뚜의 소개로 딸을 결혼시킬 때 괴 전화가 왔었다. 누군가 판사사위의 과거를 제보했다는 것이다. 

    회장부인은 현직형사, 심부름 센터 등 수십 명을 고용하고 다시 그들을 감시하는 역할로 그녀의 남편을 부렸다. 그리고 회장부인은 다시 종종 현장에 나타나 남편을 감시하는 이중, 삼중의 망을 구축했다. 어느 날부터 남편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잠도 못 잤다. 회장부인한테서 수시로 지시전화가 걸려왔다. 남편은 아내에게까지 비밀로 전화를 받곤 했다. 그녀가 마당에서 김장을 하던 어느 날 오후 남편은 통장 하나를 그녀에게 던져 주고는 황급하게 출국했다. 그 직후 검단산 기슭에 묻혀있는 여대생 시체를 한 등산객이 발견했다는 뉴스가 터졌다. 

    2003년 11월 25일. 서울고등법원 303호 법정. 회장부인과 주눅 든 두 명의 남자가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다. 부인은 오십대 말의 나이인데도 아직 아름다움이 남아있었다. 계란형의 얼굴에 검은 눈동자였다. 그녀는 베이지색의 고급 쟈켓을 입고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청석에는 회장 측의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대형 로펌에서 나온 거물급 변호사들이 회장부인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그 옆에 곱슬머리의 남자가 안경 뒤로 눈을 질끈 감은 채 뭔가 계산하는 표정이었다. 그 옆은 살인청부를 맡았던 킬러였다. 짧은 머리에 우람한 체격을 가진 삼십대 말의 남자였다. 그의 눈에서 알지 못할 섬뜩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진공상태 같은 법정분위기였다. 돋보기를 코에 걸친 재판장이 기록을 읽다가 킬러를 내려다보면서 담담하게 물었다. 

    “여기 기록을 보니까 총알이 네발이나 귀밑의 같은 곳을 관통했네?”
    프로급 살인인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재판장이 말을 계속했다. 

    “이 정도면 총구를 머리통에 들이대고 계속 갈겨 확인사살을 한 것 같은데어떻게 생각하나?”
    재판장이 킬러를 쏘아봤다.

    “아, 아닙니다. 일 미터 이상 물러서서 고개를 돌리고 쐈습니다.”
    킬러도 뭔가 감지한 듯 완연히 당황해 하고 있었다. 아마추어라는 것이다. 

    “안보고 쐈는데도 그렇게 잘 쏘나?”
    재판장이 다시 물었다. 그 어조에는 빈정거림이 묻어 있었다. 

    “처음에 그 여대생 얼굴을 보고 한번은 총구를 겨냥했었습니다. 그렇지만 두발 째부터는 보지 않고 쐈습니다.”
    첫발은 이마를 관통해서 총알이 뇌에 박혀 있었다. 그 말을 듣던 방청석 구석의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는 얼굴이 백짓장 같이 창백해 있었다. 죽은 딸의 복수를 위해 그는 직장까지 팽개치고 혼자 범인들을 집요하게 추적해 왔다고 했다. 그 앞으로는 만약에 대비해 교도관들로 벽이 쳐져 있었다. 

    “죽은 여대생의 팔뼈가 세 동강이 나 있던데 왜 그랬지?”
    재판장이 물었다. 여대생은 죽기 직전에 극도의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잘 모르겠습니다.”
    킬러가 고개를 흔들며 부인했다. 

    “둘러메고 산으로 올라가다가 집어 던졌나? 그래서 팔뼈가 부러졌나?”
    재판장이 다그쳤다. 

    “아닙니다. 죽이기 전 땅에 내려놓을 때조차 안 듯이 내려놨습니다요.”
    킬러가 안절부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안 듯이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그때 움직였어? 이미 죽어있었어?”
    재판장은 짐승몰이를 하듯 킬러를 여유 있게 쫓고 있었다. 

    “그 여대생을 푸대 자루 속에 넣어 산으로 메고 올라가는데 힘이 들어 잠시 내려놓고 쉬었습니다. 그때 발이 꼼지락거리는 걸 봤습니다요.”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습디까?”
    재판장이 물었다. 

    “입에 청 테이프를 붙여 놔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죽여주는데 얼마를 받기로 했지?”
    “저는 2억원을 달라고 하고 사모님은 1억5천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그 중간금액인 1억7천5백만 원에 낙찰이 됐습니다요.”
    “살인을 청부받은 게 그거 하난가?”
    “아닙니다. 그 전에 두 건을 더 청부 받았었는데 실패해서 사례비를 못 받았습니다.”
    회장부인의 섬뜩한 다른 살인청부가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잠깐만요 재판장님 먼저 이쪽에서 모두진술을 해야겠습니다.”
    그때 회장 부인의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모두진술은 국민의 권리였다. 그런데 변호사를 이십년 해오면서 전두환, 노태우 전직대통령 재판 때 보고 거의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법정에서 그 절차는 생략됐다. 

    “하시죠.”
    재판장이 허락했다. 경력을 나타내는 듯 점잖은 은발의 변호사가 준비해 온 글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는 회장부인의 법정변호사중 대표였다. 

    “이 사건에서 명백한 건 여대생이 살해됐다는 사실 뿐입니다. 회장부인은 살인을 해 달라고 교사를 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있고 또 잃을 것이 많은 대기업 회장의 부인이 그런 상식에 어긋나는 일을 부탁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변호사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여유 있게 계속했다. 

    “회장부인이 했다는 살인교사의 증거는 실제로 살인을 한 두 사람의 증언 밖에는 없습니다. 그 두 사람은 회장부인이 살인을 지시했다고 하면서 물귀신처럼 이 사건에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물고 늘어지면 재력이 있는 회장부인이 죽은 여대생의 가족과 합의를 해 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형이 감경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회장부인이 그 여대생의 미행을 부탁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살인범인 두 사람은 문제를 쉽게 해결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납치를 결정했습니다. 납치 후 가혹행위가 있었을 것입니다. 동강난 팔뼈가 그 정황을 입증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다 두 사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여대생을 죽이고 해외로 도피한 것입니다. 그리고 체포가 되자 회장부인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회장부인의 얼굴은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02 
    구치소에서 만난 사십대 초반의 김용국씨는 도무지 살인범 같지가 않았다.이웃에서 볼 수 있는 마음 좋은 아저씨 타입이었다. 그가 바로 뉴스화면에서 점퍼를 푹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리던 여대생 살인사건의 범인이었다. 그는 회장부인의 살인청부 대리인이고 나중에는 직접 범행에도 가담했다. 그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불쑥 내게 한마디 던졌다. 

    “앞으로 그 많은 세월을 어떻게 감옥에서 삽니까?”
    그는 막막할 것이다. 일심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말려야 할 입장이 어떻게 살인청부를 하고 또 직접 가담까지 했죠?”
    내가 오히려 따지듯 물었다. 인간은 사랑해도 죄는 먼저 미워해야 했다. 

    그는 판사사위가 불륜관계가 없다는 걸 미행과정에서 알았었다. 회장부인의 병적인 오해도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여대생의 죽음을 막아야 했다. 

    “나쁜 짓거리인건 알았지만 계약을 했으니까 이행해야 하는 거지요.”
    그가 또 불쑥 내뱉었다. 난 깜짝 놀랐다. 그에게 청부살인도 계약이었다. 

    이런 악령들이 이 사회를 떠돌고 있었다. 범죄계약을 해도 돈만 벌면 된다는 의식이었다. 거액만 준다면 변호사들도 사실을 왜곡시키고 위증을 시켰다. 정의보다는 의뢰인이 건네는 돈값을 먼저 해야 한다는 사고다. 거짓증언을 하는 인간들도 받은 돈에 대한 대가는 분명했다. 선악과 진실보다는 결과와 돈이 절대다. 그래도 그는 잡히니까 원망스러운 것 같았다. 

    “난 괜히 중간에서 껴 버렸어요. 사모님 대리인으로 우선 5천만원을 살인청부업자에게 줬는데 일이 잘 안됐어요. 사람 죽이는 게 어디 그렇게 영화같이 쉽나요?그런데 사모님은 계약일까지 안 죽였다고 절 잡아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중간에서 돈 떼먹은 줄 알아요. 너 같은 놈은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살인청부로 받은 돈을 도로 내놓으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살인청부업자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그 킬러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그 동안 살인 준비하는 비용으로 다 써버렸대요. 독극물도 사야죠. 총도 사야 되죠. 그 여대생을 파악하는 데 썼다는 거예요. 그리고 착수금은 돌려주지 않는 거래요. 돈이 하나님인 사모님은 그런 거 들을 여자가 아니죠. 그러면 대신 내가 돈을 갚으라고 하면서 만약 안 주면 우리 아이들 학교까지 찾아가서 해코지 하겠다고 악을 썼어요. 돈 있는 사람들은 더 무서워요. 돈이면 무슨 짓이라도 하니까요. 그러니 저로서는 어떻게 하겠어요. 빨리 여대생을 죽여야 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수사기록과 그의 말을 통해 파악한 사건의 발단은 대충 이랬다. 

    회장 집은 호텔과 나이트클럽 외에 여러 회사를 인수해서 성장한 신흥부자였다. 결혼할 딸이 있는 회장부인은 거물급 마담뚜의 수첩에 빼곡하게 적힌 예비판사 명단 중 27세의 사법연수생 김태환을 찍었다. 마담뚜의 명단에 오른 인물들은 고급 명품 같은 거래대상이었다. 남자 측은 결혼비용 명목으로 7억원을 요구했다. 실질은 몸값이다. 마담뚜는 건너가는 돈의 십 퍼센트를 받는 게 관례였다. 그 외 양가에서 각 3천만원씩의 중개료를 내야했다. 

    김태환이 임관이 되자 결혼식이 거행됐고 신랑 측에 대금이 지급됐다. 회장부인은 뚜 마담에게 약속대로 3천만원을 지급했다. 그러나 사위가 된 김 판사는 자기부모에게 소개료를 주지 말라고 했다. 소송으로 청구할 수 없는 돈이니까 안줘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마담뚜들도 판례실력은 작지만 판 깨는 실력은 대단했다. 어느 날부터 회장부인에게 괴전화가 걸려왔다. 삼십대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 여자는 김 판사의 과거를 자세히도 설명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회장부인은 눈이 뒤집혔다. 사위의 불륜현장을 잡기 위해 대대적인 미행 작전에 돌입했다. 딸 내외의 방에 도청기를 장치했다. 밤이면 딸 내외가 자는 방 입구에 머리카락을 붙여 놓고 사위가 어디 가는지를 체크했다. 나중에는 딸이 사는 아파트 앞 현관에서 직접 밤을 새다가 눈이 퉁퉁 붓기도 했다. 회장부인은 현직 경찰관, 심부름 센터 직원 등 이십 여명을 동원해 사위 꼬리잡기 작전에 돌입했다. 불륜현장사진을 가져오면 큰 돈을 주겠다고 현상금을 걸었다. 형사나 심부름센터 직원들이 목욕탕이나 전자오락실에서 시간만 때우다 돈을 받는지 감시하기 위해 승복차림으로 현장을 급습하기도 했다. 

    미행자들은 회장부인이 독 품은 얼굴로 “개뿔도 없는 집안 걸 사위 삼았더니 이 배은망덕한 새끼”라고 욕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회장부인은 사위에게 하자가 있다면서 사돈집에 찾아가 준 돈의 반을 도로 찾아갔다고 수사기록에 적혀있었다. 남을 믿지 못하는 회장부인은 미행자들과는 별개로 감시망을 구축하기 위해 지하 단칸방에 살던 조카를 끌어들였다. 끝내는 조카에게 살인까지 시켰다. 

    “사모님이 처음에는 판사사위 미행만 해달라고 했어요. 결혼 전에 만나던 애가 있는 것 같다고요. 얼마가 지나자 사모님은 심부름 센터를 믿지 못하겠다고 저보고 직접 현장에 나가 판사사위를 감시하라고 했어요.”
    “그래 미행에서 뭔가 꼬리가 잡혔어요?”
    내가 물었다. 아무래도 마담뚜들의 공작 같았다. 

    “나오긴 개뿔이 나와요? 다섯 달 동안 그 판사 뒤를 따라 저도 법원에 출근했는데 아무것도 없었어요. 점심도 부장 판사 따라서 구내식당에서 먹고 퇴근하면 집으로 바로 갔어요. 그런데 사모님은 도대체 믿질 않아요. 분명 뭔가 있는데 네 놈이 제대로 일을 못하고 와서 거짓말 한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사위를 의심했죠?”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거의 병적인 의심이었다. 

    “남편인 회장님이 원래 바람을 피워서 따로 자식이 있거든요. 사모님은 그 피해의식이 컸어요. 한번은 사모님이 젊었을 때 남편이 어떤 여자하고 차 안에 있는 현장을 잡았어요. 사모님은 자기가 운전하는 차를 몰아 가미가제 특공대 같이 여자와 남편이 있는 그 차에 가서 충돌한 적도 있어요. 정말 독해요. 딸만은 자기 같은 불행을 안겨주지 말자는 집념이죠.” 비로소 일부분은 이해가 갔다. 난 얘기의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만약 체포될 경우 어떻게 하자는 계획이 있었어요?”
    사건의 증거 중에는 특이한 녹음이 하나 있었다. 그가 회장부인과 통화를 하면서 모든 것을 덮어 쓴 내용이었다. 거래 끝에 조작된 증거 같았다. 지능범들은 철저했다. 예상 질문과 답변을 만들어 철저한 연습을 했다. 알리바이나 거짓증거도 완벽했다. 그가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모님이 살인청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얘기하라고 해서 그대로 말해준 게 녹음됐고요, 잡혔을 때 진술 계획을 공책에 써서 외웠어요. 검거된 첫날 경찰에서 연습한 대로 진술했죠. 내용이 뭐냐면살인만 제3의 인물인 정사장에게 재하청해서 실행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형사들이 계속 세부적인 여러 가지 사항을 추궁하면서 이리저리 치는데 다 꾸며대지를 못하겠더라고요.” 미숙한 공범이 있는 한 완전범죄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말이죠, 두 번째 조서를 받을 때부터는 아예 사실대로 진술했어요. 형사가 그러는데 모두 사형에 처해 질 건데 진실을 말하면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다고 그랬어요. 사실 저는 중간에서 돈 전달하고 푸대 자루 속에 넣은 여대생 운반한 죄 밖에 없어요.” 그의 어리석음 때문에 공범들이 속깨나 썩었을 것 같았다. 그가 덧붙였다. 

    “검찰에서 제가 조사를 받을 때 사모님이 왔었는데 나를 보고 손바닥을 뒤집는 제스츄어를 하시더라구요. 나와 킬러가 총대를 메라는 거죠. 저만 말을 맞춰주면 완벽하다고 그랬어요. 사모님은 제 변호사까지 사줬는데 그 변호사도 저를 찾아와서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그렇게 해주면 합의를 해서 형도 깎아 준다고 그랬어요.”
    “정말 회장부인이 살인청부의 심부름을 시켰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물귀신작전으로 물고 늘어지는 겁니까?”
    내가 거꾸로 쳐 봤다. 그 어떤 것도 끝까지 속단할 수 없었다. 

    “정말 사모님 심부름한 거 밖에 없습니다. 내가 모르는 여대생을 죽일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그것만 봐도 아실 수 있잖아요?” 그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지금 회장 부인 쪽 태도는 어떻습니까?” 내가 물었다. 

    “대형 로펌 변호사들을 동원해서 자기는 미행만 시켰지 절대로 살인은 교사하지 않았다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그쪽 변호사님이 오셔서 나한테 그렇게 말하라고 했어요. 작전을 잘 짜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뒤집어쓰고 사모님을 빨리 빼내야 나도 살 수 있다는 거죠.”
    “그러면 그렇게 하지 왜 나를 불러 사실을 털어놓죠?” 내가 비꼬아 봤다. 

    “회장부인이나 그쪽에서 사 준 변호사를 안 믿기 때문에 이렇게 인권변호사님에게 따로 물어보는 거죠. 돈 문제는 사모님을 절대 안 믿죠.”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인데요?”
    “그냥 진실을 다 말할 거예요. 진짜 다 털어놓으면 그래도 좀 봐 주겠죠. 그 역할을 맡아주세요.”
    그는 회장이나 부인은 그 어떤 사람도 매수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회장부인은 살고 자신만 사형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난 그와회장부인 그리고 킬러 사이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건 법정소설감이었다. 



    #03 
    깡마른 몸매에 코가 길쭉한 검사가 회장부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회장부인역시 만만치 않은 파란 눈길로 검사를 응시했다. 회장부인은 목에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었다. 권력가나 부자들은 법정에서 흔히 휠체어를 타기도 했다.회장부인의 변호인단이 긴장한 표정으로 대기했고 방청석에는 회장 측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나는 뒤쪽에서 총지휘를 하는 회장을 얼핏 보았다. 검은 얼굴에 대머리였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서운 사람이라는 소문이다. 기록에 나타난 그 부인의 혐의 역시 몇 건의 살인청부였다. 경영권을 노리는 회사간부의 살인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도 죽이려고 했다. 결국 사위와의 관계를 의심한 그 딸을 죽이는데 성공했다. 


    “피고인 김귀숙씨는 그동안 수사기관에서 진술한 게 맞습니까?”
    검사가 냉랭한 어조로 확인했다. 

    “아니요, 틀려요. 법원에서 진술한 게 사실입니다.”
    회장부인이 도전적으로 당당한 태도였다. 


    “왜? 왜 그랬죠?”
    검사의 눈초리가 파고드는 듯 했다. 

    “지금 뒤 방청석에 앉아 있는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가 어떻게나 언론몰이를 하는지 방송에서는 벌써 내가 살인을 사주한 걸로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어요. 또 경찰은 그 내용대로만 나를 몰아쳤고요.”
    그녀는 사주라는 법률용어가 어느새 입에 밴 것 같았다. 왜 그럴까.

    “그럼 법원에서는 사실을 얘기한 이유는 뭐죠?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시지.”
    검사의 어조에는 빈정거림이 묻어 있었다. 

    “재판부에서는 이제 진실을 알아주실 것 같아 말하는 겁니다.”
    회장부인은 ‘판사는 너희들과는 달라’ 하는 표정이었다. 

    “여대생이 죽은 걸 확인하고 나서 살인청부의 잔대금을 주셨던데?”
    검사가 이윽고 본론을 꺼냈다. 

    “그건 검사님의 억측이시죠.”
    회장부인이 맞받아쳤다. 살인죄로 재판을 받으면서 보통 강심장이 아니다. 

    “하여튼 사건 후 돈이 살인범 김용국에게 건네 갔던데, 그건 맞죠?”
    검사가 한발 물러서면서 사실을 확인했다. 

    “정확한 기억은 못하겠는데 3천만원 정도 준 건 사실입니다. 제가 미행심부름을 시킨 조카 김용국이가 저에게 협박을 하는 거예요. 다른 아이들을 시켜 미행을 했는데 중간에서 사고를 냈다는 거예요. 제가 막 화를 냈죠. 미행만 시켰는데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욕을 해 줬어요. 그랬더니 나보고 자꾸 그런 식으로 하시면 살인을 교사 한 것으로 말아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하라는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까 겁도 나고 경황이 없는 중에 3천만원을 빼앗긴 겁니다.”

    회장부인은 당시를 떠올리듯 겁먹은 표정으로 유연하게 진술했다. 
    김용국이 옆에서 고개를 떨군 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옆에 있는 김용국 말은 회장부인께서 살인을 직접 지시하셨다는데?”
    검사가 김용국을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제가 지시 할 수 있는 일일까요? 이건 김용국이 다 꾸민 일입니다”
    회장부인은 얼굴을 돌려 옆의 김용국을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김용국은 감히 시선을 받지 못한 채 눈을 꾹 감고 있었다. 검사가 질문을 계속했다. 

    “김귀숙 피고인은 김용국이 베트남에 도망을 갔을 때 그곳으로 전화를 한 적이 있죠? 왜 그랬죠? 통화내용 기억합니까?”
    “제가 전화로 용국이를 꾸짖으면서 진상을 물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어떻게 된 건지 내용을 몰랐으니까요. 제가 죽인 상황을 비로소 알고 용국이를 꾸짖었습니다.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집안을 엉망으로 만드느냐고 말이죠. 미행을 시킨 저도 도의적 책임은 있죠.” 도덕성은 인정하면서 살인의 법적책임은 빠져나갔다. 

    “김귀숙 피고인은 여대생이 피살된 직후 김용국을 몰래 만나 9천만원을 현찰로 준 적이 있던데 어때요? 김용국의 말은 살인 잔대금이라고 하던데.”
    “집을 사는데 도와달라고 해서 돈을 준 사실이 있어요. 그래도 용국이는 제 친정 조카예요. 친척이 어려우면 평소 도와준 적들이 있어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소리였다. 

    “검찰에서는 그런 돈을 준 적이 없다고 부인했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줬다고 그럽니까?”
    “그때는 온통 매스컴에서 내가 돈을 주고 살인을 교사했다고 해서 사실대로 말하면 뒤집어 쓸 것 같아서 그랬어요.”
    그녀가 뭔가 생각하는지 잠시 쉬었다가 이렇게 말했다. 

    “일심에서도 그런 선입견으로 판단해서 제가 유죄판결을 받은 거예요.”
    “그러면 사건 후 9천만원 준 사실은 이제야 인정하는 거네?”
    그녀는 순간 자기 변호사들을 쳐다보았다. 인정해도 되느냐는 물음이었다. 

    “피고인 김귀숙은 여대생을 살해한 청부업자인 마기룡을 알고 있었죠?”
    “언론에서 떠들어서 알았어요. 그전에는 몰랐죠.”
    “김용국에게 공항에서 준 돈이 현찰이던데 그렇게 현찰로 준 이유가 뭐죠?”
    “사업을 하는 사람의 아내로서 항상 현찰을 많이 준비해 둡니다. 남들도 다 그래요. 검사님도 그 정도는 아시잖아요? 특히 친정에 주는 돈은 그렇죠.”
    “남편이 바람을 피는 바람에 집안에 불화가 많았죠? 그래서 딸만은 자신과 같은 운명을 만들지 말아야 하겠다는 집착이 강했다는데 어떻습니까?”
    “대한민국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가집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사업가의 아내로서 남편의 외도에 눈을 감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남편은 그런 것들을 다른 걸로 보상해 주곤 했어요. 그런 것들이 살인의 동기라는 건 말도 안돼요. 꾸며낸 얘기라고요. 전 남편이 돈도 많이 법니다. 사위가 판사고 딸도 명문대를 나왔어요. 아들은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요. 내가 뭐가 모자라서 살인을 교사하겠어요? 검사님 한번 생각해 보시라고요.” 검사가 오히려 논리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럼 그렇게 오래 미행을 계속시킨 이유가 뭐죠?”
    검사가 다른 방향으로 질문했다. 

    “미행이라는 걸 막상 시켜보니까 정말 어렵습디다. 한 팀에게 맡기고 현장을 가보면 없어요. 근처 목욕탕에서 시간이나 때우고 돈을 달라는 짓거리들을 해요. 다른 팀으로 바꾸고 가보면 당구장에서들 살고 있어요. 열심히 미행하면 두세 번 만에 뭔가 나올 텐데 전부 그 짓들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미행자들은 항상 여운을 남기는 거예요. 뭔가 있긴 있는데 놓쳤다는 거죠. 그러니까 나도 그만둘 수 없죠. 그런 말들에 현혹되어서 계속했어요.”

    회장부인과 조카인 김용국 중 누가 교활한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회장부인의 변호인단은 막강했다. 김용국을 묵사발을 만들면서 무죄를 주장해 갔다. 

    이제 김용국은 살인죄 외에 착한 고모인 회장부인을 모략한 범인이 됐다. 

    이차공판이 그렇게 끝났다. 법정 앞 복도는 회장 측 사람들로 웅성거렸다.그런데 그중 외롭게 겉도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김용국의 처였다. 파출부인 그녀는 회장 측에서 총대만 메주면 평생 먹고 살 돈을 주겠다고 제의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믿지 않았다. 돈 거짓말에 속아 남편만 사형당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창문 앞에 반백의 부수수한 머리의 남자가 지친 표정으로 혼자 서 있었다. 김용국의 처는 그 남자가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저 실례합니다만 피해자인 여대생의 아버님이시죠?”
    내가 허리를 굽히면서 인사를 했다. 그가 뜨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전 김용국의 새 변호사입니다. 직업이 직업이라 살인범이라도 변호를 하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먼저 김용국을 대신해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비슷한 또래의 딸을 가진 아버지입니다. 아픔이 어떠실지 알고 있습니다.”

    그의 한 맺힌 얼굴에서 금세 눈물이라도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저도 나름대로 명문을 나오고 삼성그룹에서 18년을 일해 왔던 사람입니다. 저는 고시에 합격해서 큰 로펌 변호사가 되면 정의를 위해 일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회장부인 변호사들을 보면 정말 저래도 되나 한스럽습니다. 사실자체를 왜곡시키지 않습니까? 전 끝까지 싸울 겁니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살인교사를 부인하는 회장측은 그에게 사죄할 수 없었다. 죄가 없는데 아무것도 미안할 수 없다. 회장부인은 법정에서 오히려 그를 언론플레이 한다고 몰아쳤다. 그가 계속했다.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딸의 죽음을 보고 세상에는 귀신이 있구나 생각했어요. 딸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부부가 달려갔어요. 제가 보는 순간 죽은 딸아이가 한쪽 눈을 뜨는 거예요. 한이 맺혀서 아빠엄마가 갈 때까지 영혼이 거기 있었나 봐요. 제가 손으로 그 눈을 감겨줬어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다른 쪽 눈꺼풀이 올라가는 거예요. 엄마가 그 눈마저 감겨줬더니 입이 씰룩거렸습니다. 저는 딸아이의 원한을 느꼈어요. 그렇게 바쁘게 살던 아이였습니다. 짧은 인생을 살고 가려고 그렇게 새벽시간까지 아꼈던 것 같아요. 산속에서 죽는 그 순간 마음이 어땠겠어요?”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의 뺨이 씰룩거렸다. 그 역시 살인범 김용국이나 마기룡이 여러 차례 죽이려고 했었다. 살인범들이 자백했다. 위험했던 그로부터도 진실을 듣고 싶었다. 장소를 옮긴 나는 그의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04  
    살해된 여대생의 아버지 정의택씨는 내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삼성그룹의 간부이던 그는 퇴직 후 강남구청 근처에 사무실을 두고 사업을 하고 있었다. 아내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 모든 일을 언니인 아내와 의논할 정도로 의가 좋았다. 동서도 고교후배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아이들도 사이가 좋았다. 처제의 아들 둘은 모두 우수했다. 그중 막내인 태환이는 한동안 이모부인 그의 집에서 묵으면서 고시를 준비했다. 이모인 그의 처는 곰국을 끓여 공부하는 조카의 건강을 살폈다. 이모부인 그 역시 더러 용돈을 태환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태환이는 대신 고3이던 딸 혜경에게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었다. 태환이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판사 임관 무렵 결혼얘기가 오갔다. 옆에서 혼사를 지켜보던 정의택씨는 못마땅했다. 태환이 아버지가 신부 집에 5억을 요구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신부 집에서는 태환이의 사법연수원 성적이 좋지 않아 3억원밖에 주지 못하겠다는 얘기도 나왔다. 밀고 당기다 의외로 7억원에 낙착이 됐다고 했다. 그건 결혼이 아니라 판사 아들의 매매였다. 

    후배인 동서는 태환이 뿐만 아니라 의사인 첫아들도 그랬다. 사귀던 여자를 떼어놓고 다른 곳에 아들을 결혼시키려 했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인 태환이는 부모 말에 절대 복종하는 타입이었다. 공부는 잘하는데 어려서부터 보면 자기 주관이 없는 아이 같았다. 여자문제도 그랬다. 태환이는 대학 때부터 사귀던 여자가 있었다. 얼마의 돈을 주어 그 여자를 떼어 버리기로 부모와 아들은 결정했다. 사랑이 실종된 껍데기 명품 거래였다. 

    태환이의 사법연수원 수료식 때 양가에서 식사를 같이 했었다. 그때 시어머니가 될 태환이 엄마가 분위기를 풀려고 몇 마디 우스개 덕담을 했는데 회장부인은 외면하면서 마치 교양 있는 여자가 푼수를 참아준다는 얼굴이었다. 정의택씨는 결혼식도 화려한 외형과는 살풍경한 느낌을 받았다. 사돈인 회장 집 형제들 사이에 냉기가 감돌았다. 

    나중에 검찰수사결과에서 안 사실이지만 회장부인은 경영권 문제로 시동생도 청부살해를 시도했다. 대기업 임원으로 있던 정의택씨는 지인을 통해 사돈이 될 집의 정보를 들었다. 사채와 유흥업으로 시작해서 악랄한 방법으로 회사들을 인수한 업계의 기피인물이었다. 양가의 피로연에서 정의택씨가 잠시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었다. 그때 사돈이 된 회장이 들어왔다. 어려운 사이라 그는 조심하고 있었다. 회장은 바로 옆 변기로 오더니갑자기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면서 한마디 내뱉었다. 

    “정사장! 오늘 보니까 얘기가 통할 사람 같아. 더러 만나서 골프 칩시다. 나도 배운 거 없이 고생해서 성공한 사람이요. 그런데 말이지 성공해 보니까 돈으로 안되는 게 없는 세상입디다.”
    정의택씨는 당황했다. 격의 없는 소탈한 품성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돈 번 막 장사꾼의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봐야할지 혼란스러웠다. 어차피 조심하고 자주 보지 말아야 할 사돈관계였다. 적당히 비위를 맞추고 자리를 피했다. 돈이면 다 된다는 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는 그의 인생관을 보며 씁쓸했다. 

    판사 조카 태환이의 결혼생활이 이따금씩 그 엄마를 통해 귀에 들어왔다. 

    회장부인은 판사 사위에게 끔찍한 것 같았다. 퇴근할 무렵 이면 벌써 남산터널부근부터 사위의 위치를 확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건 회장부인의 애정이 아니라 감시라는 걸 알았다. 결혼 전부터 알던 여자친구들이 더러 태환이에게 전화를 한 것 같았다. 딸인 혜경이도 이종사촌 오빠인 태환이에게 고시공부에 대해 물으려고 전화를 했었다. 회장부인은 사위에게 온 여자전화를 일일이 캐묻고 따진다는 것이다. 

    한번은 태환이가 장모인 회장부인과 함께 가는데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귀를 곤두세우고 여자의 목소리를 듣던 회장부인이 누구냐고 다구 쳤다. 당황한 조카 태환이는 그의 딸인 혜경이라고 둘러댔다는 것이다. 이종사촌이니까 친척동생이니까 회장부인이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게 혜경의 죽음까지 몰아넣는 불행의 원인이 됐다. 

    2000년 가을 무렵부터였다. 정의택씨 집에는 자주 이상한 전화가 왔다. 오십대 말 쯤 되는 여자의 목소리인데도 정의택씨가 누구냐고 물으면 혜경이 친구라고 둘러대고는 전화를 끊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예민한 편인 정의택씨는 희미한 기억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누구인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전화국에 발신자확인을 신청했지만 나오지를 않았다. 혜경이에게도 이상한 남자들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도대체 딸이 남에게 미행당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딸 역시 동네 독서실에 다니면서 한 시간이라도 아끼면서 고시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다 추석 무렵이 됐다. 회장부인이 정의택씨 집으로 국수상자를 보냈다. 판사 엄마가 된 처제가 마침 와 있었다. 정의택씨는 회장사모님에게 감사전화를 하려고 하자 김판사의 엄마는 그러지 말라고 펄쩍뛰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부잣집에 팔려가면 함부로 연락도 해서는 안되는 것 같았다. 처제는 혜경이도 김판사한테 전화를 하지 말게 해달라고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순간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딸에게 판사오빠에게 몇 번이나 연락했느냐고 물었다. 딸은 결혼하고 단 두 번이었다고 대답했다. 한번은 공부 때문에, 다른 한번은 안부전화였다고 했다. 잦은 연락도 아닌데 아무튼 이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조카인 김판사가 이모인 그의 처에게 전화했다. 

    “이모하고 혜경이가 일본여행을 갔다 왔어요? 또 혜경이를 미국유학 보내려고 그런다면서요?”
    정의택씨 부부는 깜짝 놀랐다. 조카인 김판사가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장모가 얘기해 줬어요.”
    그 때 정의택씨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전구가 반짝 들어왔다. 괴전화의 오십대 여자의 목소리는 바로 회장부인이었다. 결혼 후 피로연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분명했다. 비로소 딸을 미행과 회장 집에는 전화조차 하지 말라는 의미들이 하나의 결론으로 연관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네 장모는 왜 남의 딸 뒤를 캐고 미행하는지 모르겠다. 따져야겠어.”
    정의택씨의 처가 소리쳤다. 온 가족이 옆에 있었다. 

    “이모, 만약 항의할 경우 저한테 먼저 말해주세요.”
    김 판사가 뭔가 사연을 숨긴 듯 초조한 어조로 부탁했다. 정의택씨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딸도 회장부인의 오해를 알자 펄쩍뛰면서 가서 따지자고 했다. 정의택씨 가족은 회장 부인 집으로 항의하러 쳐들어갔다. 

    “딸 단속이나 잘해요. 이놈저놈하고 붙어먹고 어디 시집가서 잘 사나 봅시다. 내 말이 사실이 아니면 내 새끼 차에 갈려죽어도 괜찮아.”
    설득은 씨도 먹히지 않고 오히려 회장부인이 퍼붓는 저주들만 섬칫했다. 해결은 사위인 김 판사의 몫이었다. 

    “네가 장모 앞에서 사실이면 사실이다, 아니면 아니다 라고 분명히 해라”
    정의택씨가 조카인 김 판사를 다그쳤다. 김 판사는 얼굴이 백짓장같이 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장부인은 그가 보는 앞에서도 사위인 김판사의 배를 찌르고 멱살을 잡는 등 표독을 떨었다. 김 판사는 이미 영혼이 없는 밀납 인형 같다고 정의택씨는 느꼈다. 소득 없이 싸움만 벌인 채 회장집을 나오면서 정의택씨는 조카인 김판사가 차라리 측은했다. 달래서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말했다. 

    “김판사, 네가 장모의 오해를 잘풀어서 이 일을 매듭지어야지.”
    “이모부, 장모는 아무리 말을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에요.”
    김 판사가 절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주일 후 회장부인의 조카라는 사람이 연락을 했다. 호텔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정의택씨는 회장부인의 화해의도로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다. 그러나 막상 호텔 커피숍에서 본 남자는 의외였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험악한 인상의 건달이었다. 

    “왜 그날 허락도 없이 회장님 댁에 침입했죠? 주거침입죄 아닌가요?”
    위압적인 어조였다. 정의택씨가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말문이 막힌 건달 같은 그는 납득이 됐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회장부인은 이긴 사람이 없어요. 한번 이거다 하면 끝까지 우기죠. 그리고삐지면 침대까지 밥을 가져다 바쳐야 하는 사람이에요. 회장부인은 사돈의 과거까지 다 꼬챙이에 꿰듯 파악하고 있죠.”
    정의택씨는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단정했다. 딸 혜경에 대한 괴청년 들의 미행은 더욱 집요해 졌다.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따라 붙었다. 

    “아빠 도저히 참지 못하겠어요. 법으로 해요.”
    딸 혜경이가 선언했다. 정의택씨는 형사고소와 함께 접근금지가처분신청을 했다. 회장부인은 도도했다. 판사사위와 회장이 개입하면 안되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회장부인이 졌다. 심하게 자존심을 다친 회장부인은 헌법소원까지 시도했다. 회장부인의 분노는 이제 제어력을 잃은 적개심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그 무렵 회장부인의 조카인 김용국은 목동아파트 2단지 앞에서 고교동창인 마기룡을 만나고 있었다. 전주의 돈을 받아 사채업을 하던 마기룡은 생활에 쫓기는 형편이었다. 전주가 그로부터 돈을 회수해서 다른 건달로 하여금 사채를 놓게 했기 때문이다. 돈에 쫓기는 마기룡은 무슨 일도 할 입장이었다. 

    “어르신한테 부탁받았는데 사람을 없애야 하는 일이 생겼어. 그런 사람을 소개해 줘. 완벽하게 그런 일을 할 방법이 없을까?” 김용국이 심각하게 말했다. 

    “그런 일은 아무나 시키면 안되지. 성공해도 나중에 약점을 잡으니까. 어때? 내가 직접 작업을 해 줄까? 우리사이면 뒤탈이 생길 염려는 없잖아?”
    “나야 좋지.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일할 건데?”
    “특수독약이 있는데 그걸 먹으면 일주일 안에 간이 상해서 죽어. 내가 그걸 구할 수 있어. 약을 먹여도 며칠 지나서 죽으니까 완전범죄지.” 김용국과 마기룡 사이에 살인청부의 흥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05 
    “자 이제 재판장이 몇 가지 물어 봅시다”
    콧잔등에 돋보기를 걸친 재판장이 회장부인을 내려다보았다. 

    “판사사위에게 여자가 있다는 이상한 제보가 온 게 언제죠?”

    “그러니까 결혼식날을 받아놓고 사위가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기 직전이죠.”

    “그러면 결혼 전부터 다른 여자의 존재를 알았네?”

    “그런 셈이죠.”
    재판장은 뭔가 한참을 생각했다. 사위의 바람을 의심하는 것과 여자를 청부살해하는 과정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재판장은 이렇게 살인의 동기를 회장부인에게 추정해서 말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의심을 하고 미행정도를 하다가 오히려 고소를 당하고 접근금지가처분까지 당하고 나니까 그 여대생 가족하고 대판 원수가 된 거 아니요? 재판장인 내 생각에는 그때부터 일이 본 궤도를 벗어난 거지. 여대생부녀를 누군가 지옥으로 데려가지 않나 할 정도로 증오했겠지. 그 태도가 조카 김용국에게도 전해졌겠지. 은연중에 회장부인인 고모를 신주단지 같이 모시는 김용국이었으니까 말이야. 그렇지 않아요?”

    “재판장님 그런 말씀 마세요. 고모를 신주단지 같이 모셨으면 의리를 지키지 않고 내가 살인청부를 지시했다고 이렇게 물고 들어갈 리가 있어요?”

    “그거야 김용국의 인생관이 처음과는 다르게 바뀌었을 수도 있지”
    재판장은 핵심을 보고 있었다. 기록에 나타난 구체적인 살인청부과정은 이랬다. 져 본적이 없는 회장부인의 자존심이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소송이 그녀에게 불리하게 진행됐기 때문이다. 무슨 일도 해내는 회장남편과 판사사위가 있는데도 말이다. 어느 날 회장부인은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차라리 그것들을 없애버릴 사람을 찾을 수 없겠니?”라고 조카 김용국에게 넋두리했다. 

    그러면서 “일이 잘되면 조카인 너 하나 도움을 주지 못하겠느냐”고 암시했다. 눈물과 돈 약속으로 마음을 흔드는 회장부인의 능력은 원래 탁월했다. 조카 김용국은 사채업을 하는 친구 마기룡을 떠올렸다. 살인까지 해준다는 말을 들었었다. 마기룡으로부터 몇 방울 차나 술에 타 먹이면일주일 후부터 점차 내장이 썩어 들어가 죽는 특수독극물 얘기를 듣고 회장부인에게 전했다. 그들은 완전범죄를 확신했다. 

    마기룡은 살인대금 2억을 요구했고 회장부인은 1억5천만원을 불렀다. 중간선인 1억7천5백만원에 흥정이 됐다. 2001년10월11일 오후5시. 청담고등학교 담 옆에 김용국의 그레이스가바짝 붙어 있었다. 잠시 후 주위를 살피면서 쇼핑백을 손에 든 회장부인이 차 문을 열고 얼른 올라탔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이건 착수금이고 나머지는 일 끝나면 주겠다고 그래라. 그리고 내 얘기는 절대로 그 사람한테 하면 안 된다. 알았지?.” 회장부인은 자금추적을 피하기 위해 만든 현찰뭉치가 든 쇼핑백을 건넸다. 

    며칠 후 마기룡과 김용국은 정혜경이 있는 대학기숙사를 맴돌기 시작했다. 

    국수배달을 가장하고 정혜경의 아파트에도 갔었다. 문제가 있었다. 도대체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정혜경은 그동안의 미행에 시달려 동선을 최소한으로 줄인 상태였다. 젊은 여자를 고용해서 친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건 비밀이 새 나갈 우려가 많았다. 도대체 공격할 틈이 없었다. 정혜경은 대학구내의 강의실과 기숙사 그리고 집 사이만 시계추 같이 반복했다. 석 달이란 시간이 소득 없이 흘렀다. 김용국은 문득 마기룡이 프로가 아니라는 의심이 들었다. 

    “네가 가진 특수독극물을 한번 내 앞에서 테스트 해 봐.”
    회장부인인 고모는 수시로 마기룡이 사기가 아닌지 확인하라고 했다. 다음날 마기룡은 쥐 몇 마리가 든 상자를 가지고 왔다. 그는 주머니에서 노란액체가 든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준비해온 과자에 몇 방울 묻혔다. 약병에는 아무런 표지도 글씨도 없었다. 마기룡은 그 과자를 쥐들 사이에 놓았다. 이십분이 흘렀다. 쥐들의 움직임에 변화가 나타났다. 움직임이 서서히 둔해지더니 한 시간 후 잠자듯 조용히 죽은 것이다. 인간의 체력에 맞추어 독극물의 양을 늘리면 얼마 후 기력이 떨어지다가 원인불명으로 죽을 것 같았다. 마기룡의 말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을 해도 절대 잔류성분이 검출되지 않는다고 했다. 차차 고양이나 개한테도 시험을 해 보기로 했다. 

    문제는 독극물을 먹이는 거였다. 정혜경이 커피숍에라도 가면 화장실 간 사이 기회를 노려 독극물 몇 방울 찻잔에 떨어뜨리고 지나칠 수 있었다. 그런데 정혜경은 다른 여대생처럼 혼자 도넛집이나 커피숍에서 책을 읽거나 하는 습관이 없었다. 마침내 법원의 정식 접근금지가처분 명령이 떨어졌다. 정혜경 부녀의 승리였다. 회장부인은 더 길길이 뛰었다. 

    “딸보다 애비 놈이 더 악질이야. 그 애비 놈부터 먼저 처치해 봐. 술을 좋아하니까 돈 벌 사업이 있다고 접근해서 처리하면 될 거야”

    증오는 회장부인의 이성을 마비시킨 것 같았다. 죽일 대상이 정의택으로 바뀌었다. 정의택은 대기업 무역파트와 광고기획파트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컨설팅업을 하고 있었다. 마기룡은 오퍼상으로 가장해서 접근하기로 했다. 참치사업을 한다고 부산으로 데려가든가 우동체인을 할 계획이라고 하면서 일본 같은 데 유인해 가서 처치하면 될 것 같았다. 특정한 품목을 정하지 않고 그때 그때 물품의 수요가 있다고 둘러대기로 했다. 

    마기룡은 가짜명함을 찍었다. 죽은 정의택의 품에서 나온 명함을 가지고 형사들은 한참을 헛고생 할지도 몰랐다. 강남 구청 역 근처의 마천빌딩 411호에 있는 정의택의 사무실의 주변을 골목까지 철저히 답사했다. 정의택과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에 술 먹고 골목에서 나오다 인적이 없을 때 칼을 몇 방 먹이고 강도로 위장해도 경찰은 그를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계산이었다. 

    바로 그 무렵 정의택은 오랜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법원의 가처분결정을 위반하면 회장부인을 구속할 수도 있었다. 이제 딸은 완전히 그들로부터 해방이었다. 사실 그동안 딸 혜경은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미행자들이 아예 드러내놓고 딸에게 따라 붙었기 때문이다. 딸은 다시 새벽에 수영장회원권도 끊고 남자친구도 만나기 시작했다. 정의택씨도 다시 일을 시작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 그의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업계에서 정 사장님을 추천받았는데 전반적인 무역 컨설팅은 물론이고 홍보나 광고마케팅까지 자문을 받고 싶습니다.”
    바닥에 깔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였다. 그는 정의택씨의 경력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일단 만나시죠.”
    옛날의 동료가 보내주는 좋은 일거리 같았다. 그 남자가 말을 계속했다. 

    “딱딱한 사무실보다는 정사장님께 술이라도 먼저 한잔 대접하면서 귀한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장소를 정해주시면 제가 그리로 가 뵙겠습니다.” 예의바르고 겸손한 말투였다. 좋은 고객 같았다. 다음날 저녁 강남 구청역 근처 음식점에서 그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삼십대 말의 남자와 만났다. 만만치 않은 눈빛의 그 남자는 공손히 명함을 건넸다. 위장한 킬러 마기룡이었다. 마기룡은 정의택씨에게 술을 계속 권하면서 말했다. 

    “농사짓던 아버지의 땅값이 크게 올라 50억 정도 유산을 받았습니다. 역삼동에서 선후배들과 사업을 했는데 2억 정도 손해보고 지금은 다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유럽에서 향수나 의류를 수입해서 판매하려고 하는데 자문을 구하고 싶어서 이렇게 뵙자고 했습니다.” 정의택씨는 그 말을 들으면서 ‘부잣집 아들이 자칫하면 사기 당하겠구나’ 하고 생각 했다. 마기룡이 담담하게 얘기를 계속했다. 

    “저는 대학 동아리 선후배들과 제 자금을 밑천으로 공생공존하면 만족합니다. 큰 욕심 없습니다. 앞으로 형님같이 지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의택씨는 그 남자의 낭만적인 순진한 면이 마음에 들었다. 

    “실례지만 저를 추천한 사람이 누굽니까?”
    정의택 씨는 일단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제 회사의 이사가 다른 사람한테서 정사장님 얘기를 들었습니다. 물어가지고 다음번 만나 뵐 때 알려드리겠습니다.”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며칠 후 순진한 오퍼상으로 위장한 마기룡이 다시 정의택씨를 갈비집으로 유인했다. 한결 친해진 분위기였다. 

    “어제 8억원어치 영국의류가 든 컨테이너가 부산에 도착했어요. 함께 가셔서 그 옷들을 직접 보시고 광고나 홍보기획까지 세워주셨으면 해서요.” 정의택씨는 그 청년이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요자의 취향도 생각하지 않고 홍보도 시기적으로 맞지 않았다. 유통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광고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수업료라고 생각하시고 지금이라도 도매상이나 전문유통업자에게 빨리 물건을 넘겨 처리하는 게 그래도 손해를 줄이는 좋은 방법입니다. 제가 부산으로 갈 필요도 없어요.”  욕심내고 따라가는 것 보다 정직하게 컨설팅을 해 주는 게 먼저 신용을 얻는 길이라고 정의택씨는 생각했다. 킬러 마기룡의 얼굴에 순간 낭패의 빛이 스쳤다. 

    #06 
    살인청부를 받은 마기룡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사채꾼 겸 건달일 뿐 살인 경험이 없었다. 오피스텔 월세도 밀릴 정도로 궁한 바람에 덥석 살인해 주겠다고 내뱉었다. 여대생을 없애달라고 심부름 온 용국이는 학교 때부터 좀 어리석었었다. 라벨을 뗀 쥐약 병을 특수 독극물이라고 하면서 쥐를 죽이니까 진짜로 속았다. 그러나 회장부인은 달랐다. 그가 사채심부름을 전주들을 보면 정말 의심 많은 냉혈한들이었다. 

    여대생 죽이는 일이 지체되자 회장부인은 돈을 도로 찾아오라고 조카인 김용국을 닦달 했다. 하지만 마기룡은 이미 받은 돈을 다 써 버렸다. 회장부인은 그냥 돈을 뜯길 여자가 아니었다. 어쨌든 정의택을 죽여야 일이 끝날 것이다. 성공하면 추가로 일 억원의 돈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상하게 정의택은 미끼를 던지는데도 덥썩 물지를 않았다. 그가 본 인간들이란 몇 푼의 돈에도 눈이 확 돌았다. 그렇다고 의심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청년실업가 김기준으로 위장한 마기룡은 다시 며칠 후 강남구청 부근의 한 호프집에서 정의택을 만났다. 

    “전번에 제가 영국에서 수입한 의류는 말씀대로 2억 손해보고 동대문시장 나까마에게 처분했습니다. 앞으로는 강남 중심가에 대형매장을 인수해서 수입물품을 판매하고 싶습니다.” 마기룡은 예민하게 눈치를 살폈다. 정의택은 묵묵히 말을 듣고 있었다. 약간은 끌리는 눈치 같기도 했다. 오늘밤이라도 기회만 오면 끝내고 싶었다. 

    “사업 얘기는 그만두고 오늘 밤은 화끈하게 형님을 한 번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은 기분 좋게 맥주를 들이켰다. 

    “형님 기분도 그런데 제 단골 룸살롱이 있습니다. 물도 좋구요. 오늘저녁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그리로 가시죠.”
    마기룡은 정의택을 자극했다. 회장부인은 그가 술을 좋아한다고 했다. 정의택이 따라만 나서면 그날 밤 둘만 있는 골목에서 골로 보낼 자신이 있었다. 

    “아니 그건 다음에 합시다. 오늘 몸이 좋지 않아서.”
    정의택이 사양했다. 이어서 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참 지난번에 나를 소개한 사람이 누구라고 했죠?”

    “정 사장님을 소개한 저희회사 담당 이사가 영국으로 출장을 갔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면 물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마기룡이 적당히 어물거렸다. 

    마기룡은 살해 장소를 바꾸기로 했다. 부산이나 일본 같은 곳으로 일단 유인해 보고 그걸 거절하면 호텔방에서 실행하기로 했다. 정의택에게는 약간의 의심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김용국을 그의 비서로 위장해 연기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마기룡은 정의택에게 다시 연락했다. 

    “상의드릴 일이 있으니까 아미로 호텔에서 잠시 만났으면 합니다.”

    “알았어요”
    정의택이 승락했다. 이십분 후 호텔 커피숍에서 기다리던 마기룡이 정의택을 보자 이렇게 말했다. 

    “형님 호텔방을 임시사무실로 빌렸습니다. 거기서 얘기하시죠.”

    “그럽시다.”
    정의택은 별 생각 없이 마기룡을 따랐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서 내려 구석 끝의 방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동굴 같은 어둠침침한 분위기였다. 두터운 카펫은 발걸음소리를 흡수했다. 619호로 들어서자 마기룡이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때 정의택씨가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잠깐! 답답하니까 방문은 그냥 열어놓고 얘기합시다.”
    그의 본능적인 경계행동이었다. 종합상사 직원으로 해외 곳곳을 다닌 정의택씨의 습관이었다. 개인 호텔 방은 위험이 따르는 곳이기도 했다. 정의택씨는 복도 쪽으로 시선을 두고 의자에 앉았다. 

    “참치 도매업자가 부산에서 함께 투자해서 사업을 하자고 제의하더라고요. 부산에 가봤더니 규모도 크고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한번 바람도 쐬실 겸 부산에 가서 타당성 검토를 해 주시는 건 어떨까요?” 위장한 마기룡이 말했다. 

    “참치는 세계적인 보호자원이기 때문에 공급에 한계가 있어요. 지금 유행하는 참치집이 확대된다면 역시 공급에 문제점이 생기겠지요. 아니면 가격이 올라 대중성을 상실하구요. 하여튼 바람직한 아이템이 아니네요.”

    정의택씨가 진단을 해 주었다. 그는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오퍼상이라는 그 청년의 제안은 전부 타당성이 없는 바람 잡는 얘기들이었다. 정의택씨는 혹시 그 청년이 사기를 치기 위해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누구소개인지 아직도 말하지 않았다. 받은 명함이외에는 그 청년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의 차량 번호판조차도 본 적이 없었다. 지난번 호프집에서 나와 그와 헤어진 후 우연히 그가 인근의 공중전화박스에 있는 걸 봤다. 휴대폰을 가진 사람이 공중전화를 사용하는 게 이상했다. 사기꾼일 가능성이 많았다. 그렇다면 대상을 잘못 잡았다. 그 자신은 재산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냥 속아주는 체 하고 끝내자는 마음이었다. 그때 사십대 초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곱슬머리에 검은 뿔테안경을 쓴 김용국이었다. 그가 비서처럼 마기룡에게 보고했다. 

    “오늘 약속한 김 사장님이 시간이 맞지 않아 다음날 만나자고 하시는데요.”
    비서로 위장한 김용국은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고 슬쩍 정의택을 살폈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 나가 봐.”
    마기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정의택에게 말을 계속했다. 

    “참, 일본의 우동아이템을 가지고 국내에서 체인사업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일주일 정도 여정으로 같이 일본에 가셔서 검토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비용은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론제가 아이템을 결정할 게 아니라 형님이 투자를 결정하시면 저는 거기에도 참여하겠습니다. 그리고 형님에게 필요한 자금이 있으면 제가 지원하겠습니다.”

    “감사한 말씀이죠.”
    정의택씨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기룡이 그를 끌어들이려는 노력은 집요했다. 순간 까닭 없이 정의택의 뇌리에 회장부인의 영상이 뇌리를 스쳐갔다. 

    ‘혹시 그 여자가 보낸 놈들이 아닐까?’  앞에 앉은 그 청년의 만만치 않은 눈빛과 그의 순진한 어조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제안 하는걸 보면 순진한 청년인데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아니야. 소송에서 졌는데 더 이상 회장부인이 나를 괴롭힐 이유가 없어.’ 그는 스스로 생각을 지워 버리려고 애썼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봅시다. 그럼 오늘은 내가 바쁜 일이 있어서”
    정의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기룡은 이미 정의택이 낌새를 눈치챘다고 단정했다. 두 번째 살인마저 실패하자 김용국을 통해 전해오는 회장부인의 닦달에 피가 마를 것 같았다. 살인이라는 게 정말 힘든 일이었다. 보는 눈도 많고 기회도 없었다. 짐승도 도살장에 갈 때 본능적으로 느끼는데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마기룡은 돈에 코가 꿰어 주먹노예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누구를 뒤따르라고 하면 뒤따르고 폭행하라고 하면 폭행하고 죽이라면 죽여야 하는 신세였다. 회장부인은 세 번째로 그룹의 김 감사를 죽이라고 했다. 한번은 미행하는 차 안에서 김용국이 이렇게 내뱉었다. 

    “지금 미행하는 김 감사가 회장이 없을 때 간부들과 짜고 회사를 통째로 들어먹으려고 한다는 거야. 어르신이 그걸 알고 펄펄 뛰는 거지.”

    그 무렵 회장은 주가조작 혐의로 구속이 됐었다. 이번에는 살인의 방법을 교통사고와 독극물로 바꾸기로 계획했다. 뒤에서 차로 따라가다가 김 감사가 혼자 걸어가는 기회가 오면 그대로 밀어버리기로 했다. 목격자가 없으면 그대로 차에 싣고 가져가 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접촉사고를 내고 합의하는 과정에서 독극물이 든 음료수를 먹이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마기룡은 가명으로 SM5 렌트카를 빌렸다. 이번에는 건달 후배를 동원했다. 김 감사는 의외로 운전버릇이 거칠었다. 과속은 보통이고 미꾸라지 같이 차량들 사이를 빠져 다녔다. 따라가다가 오히려 마기룡이 교통사고로 죽을 것 같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신호등에서 대기하고 있는 김 감사의 차를 건달후배가 들이받는데 성공했다. 후배는 김 감사와 다음날 지정된 자동차 수리 센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마기룡은 포도주스를 구입해서 주사기로 그 안에 독극물을 주입했다. 수리공장에서 그를 만나 합의하는 체 하고 안심시키며 그걸 먹게만 하면 성공하는 것이다. 다음날 오후 2시경 마기룡은 수리공장에 가서 김 감사에게 공손하게 사과했다. 충분한 보상을 약속했다. 김 감사도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마기룡은 차로 가서 미리 준비한 포도주스를 가지고 왔다. 수리 센터 직원들은 둘이 안면이 있는 사이로 알 것이다. 주스를 먹인 후 휘청거리면 병원 가는 척 하면서 자기 차로 끌고 가면 되는 것이다. 

    “어르신 목이라도 축이시죠.” 마기룡이 포도주스를 권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내가 장이 좋지 않아 한약을 먹고 있기 때문에 차가운 포도주스는 먹지 않아요.” 

    또 실패였다. 마기룡은 독이 오르기 시작했다. 중간에서 심부름을 하던 김용국이 돈을 돌려달라고 못살게 굴었다. 회장부인은 오히려 칠성파를 시켜 마기룡을 그냥 두지 않겠다는 얘기도 전해왔다. 마기룡은 사면초가였다. 



    #07
    세 번의 살인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다시 여대생 정혜경이 죽음의 대상이 됐다. 회장부인은 이제 단순한 살인지시로 끝나지 않았다. 직접 정보를 파악하고 킬러들을 더욱 압박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칠성파를 고용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했다. 킬러 마기룡은 이번에는 총을 사용하기로 했다. 접근이 불가능하면 차안에 있다가 뒤통수에 납탄을 박아 넣는 것이다. 엽총과 공기총을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었다. 엽총은 소리도 나고 파출소에 보관해야 하지만 공기총은 자유로웠다. 

    신형공기총은 위력이 대단했다. 판자 세 겹을 관통할 정도의 힘이었다. 특히 납탄을 두개 겹쳐서 쏘면 즉사할 위력이었다. 마기룡은 망원조준경이 달린 공기총과 리볼버, 탄창, 그리고 실탄을 샀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제 미행감시도 더 집요해 졌다. 2002년 2월 말 오후 8시경. 어둠이 내린 정의택씨 아파트 정문 앞 도로에 몇 시간 째 그랜저 한대가 서 있었다. 차 안에는 김용국과 마기룡이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때 김용국의 핸드폰의 진동음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어디냐?”
    회장부인이 위치를 확인하는 냉랭한 목소리였다. 자꾸 의심하고 있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감시하고 있습니다.”
    김용국이 긴장한 표정으로 힐끗 차 주변에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알았다”
    회장부인은 어둠 저쪽에서 그들을 보면서 핸드폰을 하는 것 같았다.잠시 후 다시 핸드폰이 떨렸다. 회장부인이었다. 

    “마기룡이를 잠깐 다른 데로 보내라”
    회장부인은 미행을 시킬 때에는 항상 신분을 노출했다. 그러나 살인을 청부한 이후는 철저히 몸을 사렸다. 나중에 물고 늘어질 걸 철저히 막기 위한 대비책이었다. 

    “지금 고모님이 근처에 온 모양인데 잠시 자리를 비켜줘”
    김용국이 운전대에 앉은 마기룡에게 말했다. 회장부인의 신분을 감추다가도 이따금씩 말이 잘못 튀어 나갔다. 킬러지만 마기룡도 친구였기 때문이다. 마기룡이 차에서 내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회장부인이 소리 없이 차 뒷문을 열고 들어와 앉았다.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왜 아직도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냐?”
    회장부인이 김용국을 쥐어짰다. 부리는 사람을 그냥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부러 일을 안 하는 게 아니잖아요” 김용국도 짜증스런 어조로 되받았다. 

    “처음에 큰 돈 가져갈 땐 여러 명을 동원하기 때문에 그렇다더니 왜 너희들 외에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지?”
    회장부인이 따지는 말에 김용국은 할 말이 없었다. 마기룡이 처음에 그랬었다. 그는 문득 차 뒷좌석에 있던 총이 떠올랐다. 

    “총도 있어요. 좌석 옆을 보세요.”
    김용국은 조준경이 달린 총을 회장부인에게 가리켰다. 

    “아니야, 네놈들이 그동안 나를 가지고 장난을 친 거야. 여러 사람 동원한다더니 항상 보면 한명 아니면 두 명뿐이야. 이제 너희들 안 시키겠어. 너 다른 소리 말고 마기룡한테서 돈 다 도로 찾아와.” 회장부인은 그들이 돈만 받고 사기 치는 걸로 의심하고 있었다. 

    “알았어요”
    김용국은 돈만 있으면 확 던져주고 돌아가고 싶었다. 회장집은 수백만원 관리비를 내는 강남의 빌라에 살면서도 지하 단칸방에서 사는 그들에게 항상 돈 없다고 죽는 소리를 하곤 했다. 더러 그 집 가정부일을 한 아내는 야박한 회장집 근처에는 가지도 말라고 했었다. 회장부인이 슬쩍 덧붙였다. 

    “여기 경비원한테 들었는데 정혜경이가 새벽에 수영장을 간다고 하더라.”
    마지막 기회를 주는 정보였다. 새벽시간은 완전범죄를 할 수 있는 기막힌 기회였다. 그날 밤 자정부터 그들은 계속 대기했다. 다음날 새벽 5시20분. 아파트는 아직 짙은 어둠에 젖어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아파트 3층 정혜경의 방에 불이 들어왔다. 김용국과 마기룡은 바짝 긴장했다. 잠시 후 정혜경이 아파트 입구로 나와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소리 없이 미행했다. 회장부인의 정보대로 정혜경은 부근의 헬스클럽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이후 그들은 며칠간 정혜경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체크했다. 수영장에 가서 알아보니까 회원권을 끊어 새벽시간 수영반이었다. 그들은 정혜경이 한방병원을 규칙적으로 다닌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아파트 정문 앞이나 병원 근처에서 그레이스로 납치해 살해하기로 했다. 새벽시간에 혼자 아파트에서 나오는 기회가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파트 앞은 대로변이고 24시 편의점이 있었다. 목격될 위험이 다분했다. 편의점 직원이 한눈을 파는 일이초 사이에 정혜경을 납치해야 했다. 그들 두 명이 그렇게 하기는 무리였다. 

    마기룡은 후배건달을 동원하기로 했다. 일당을 주고 길거리에 숨었다가 정혜경을 잡아 차에 싣는 일 까지만 시키는 것이다. 정혜경이 새벽시간에 규칙적으로 혼자 나서자 일이 급속도로 진전됐다. 김용국과 마기룡은 철물점에 가서 납치에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시체를 덮을 포대자루, 청테이프, 노란색 질긴 테이프, 나일론 줄등이었다. 마기룡은 살해 후 매장할 장소들도 물색했다. 청담동 정혜경의 아파트에서 나와잠실부근에서 88도로를 타고 빠지면 십 여분 내에 팔당대교주변이었다. 그 부근은 산이 깊고 한적한 곳이 많았다. 

    미사리 도로 끝부분에 공사장이 있었다. 공사차량이 드나들었지만 다른 차량의 진입을 막는 바리케이드는 쳐 있지 않았다. 새벽이면 공사장에 사람이 없었다. 그 한쪽에 작은 계곡을 끼고 비스듬히 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오솔길이 있었다. 차의 왕래도 없고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장소였다. 이제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가고 있었다. 마기룡은 틈틈이 야산에 올라가 사격연습을 했다. 나무에 과녁을 만들어 쏘고 까치를 조준해 떨어뜨리기도 했다. 총알에 두꺼운 나무껍질들이 튀겨 나갔다. 

    그 무렵 정의택씨는 까닭 없이 불안했다. 접근금지가처분결정을 받아 이제는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뭔가 마음속은 계속 동요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신경과민 같았다. 법원에서 승소하기까지 회장부인에게 가족이 모두 너무 고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불안이 아주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얼마 전 딸 혜경에게 정체불명의 여자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공포에 질린 혜경이 그 사실을 알렸다. 그는 딸의 피해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민,형사에서 다 이긴 셈인데 회장부인이 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회장부인이 막가는 행동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혜경이는 뭐가 씌웠는지 경찰서에 가서 그 괴 전화를 조사해 달라고 하면서 신변보호요청까지 했었다. 식구들 모두 신경과민 같았다. 정의택씨도 자꾸만 주변에서 수상한 것만 보였다. 

    한번은 퇴근 무렵 우연히 아파트 앞 도로에 서 있는 그레이스가 신경을 자극했다. 온통 검게 한 썬팅에서 물씬 범죄냄새가 났다. 그 앞은 다단계판매 사무실이었다. 정의택은 그 사무실의 차로 생각하자고 마음을 돌렸다. 사실 경호업체를 알아 봤었다. 일주일에 3백만원을 달라고 했다. 한달이면 천만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경찰은 사고가 터져야 개입하고 개인은 돈 없으면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 

    혜경이는 다시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혜경이는 새벽시간에 가는 수영장 회원권을 끊었다. 웅크리던 생활에서 벗어나 이제 정상으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것이다. 정의택씨는 그래도 마음에 걸렸다. 어느날 저녁 그는 딸 혜경이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새벽이 밤중보다도 더 위험할 수 있으니까 웬만하면 다니지 말거라”
    옆에서 듣던 엄마도 끼어들었다. 걱정하는 감정은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래, 혜경아. 아침 8시로 시간을 바꾸면 엄마도 같이 수영장에 가자.”
    “엄마 아빠 그렇게 하면 오전 공부시간을 그대로 낭비하게 돼요.”
    혜경의 대답이었다. 순간도 아끼는 악착스런 딸이었다. 그런 성격 때문에 남자친구가 지어준 핸드폰의 ID는 ‘하동댁’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혜경은 ID를 갑자기 ‘초생달’로 바꾸었다. 쓸쓸하고 서글픈 이름이었다. 정의택은 오전 공부 시간을 망치지 않겠다는 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효녀인 딸은 이틀 동안 수영장에 가는 걸 참았다. 

    살해되기 하루 전인 3월 5일 밤. 정의택씨는 집에서 신용카드를 초과해서 쓴 큰 아들을 나무라고 있었다. 그때 혜경이 들어왔다. 혜경은 요새 대학생들 다 그렇다고 오빠를 두둔했다. 혜경은 식구들을 화합시키는 꽃이자 온기였다. 정의택씨의 마음이 풀렸다. 혜경은 방으로 가서 엄마의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그날 일을 얘기했다. 모녀지간은 조금의 비밀도 없었다. 혜경은 매일 밤 냉장고에서 마실 것들을 식구들에게 나누어 주는 버릇이 있었다. 혜경은 아빠 방에 야구르트를 가지고 왔다. 

    정의택씨는 “그래, 알았다. 놔두고 가라”고 말했다. 그게 딸과의 사실상 마지막 대화였다. 3월 6일 새벽4시. 마기룡과 김용국 그리고 동원된 건달들을 태운 그레이스가 아파트 앞 대로변에 웅크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틀 동안 정혜경의 방은 새벽에 불이 켜지지 않았다.마기룡은 초조했다. 수영장에 가서 분명 강습일자를 확인했는데도 정혜경은 새벽에 나오지 않았다. 이제 오늘도 나오지 않으면 건달들을 돌려보내고 철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순간 정혜경의 방에 불이 켜졌다. 

    “야, 불켜졌다. 모두 정신 차려.”
    마기룡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웅크리고 졸던 건달들이 부스스 눈을 떴다. 
    그 시각 정의택씨도 잠결에 “찰그락”하고 아파트 문 닫기는 소리를 들었다. 

    ‘왜 내 말을 안 듣고 녀석이 새벽에 또 나가지?’ 
    정의택씨는 속으로 은근히 짜증이 났다. 잠시 후 다시 “찰칵”하고 아파트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내려갔던 혜경이 다시 올라와 우산을 가지고 나가는 것 같았다. 

    “새벽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죽으러 가는지도 모르고 잠에서 깬 엄마가 중얼거렸다. 


    #08
    2002년 3월6일 새벽 5시. 어둠 속에서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살인청부 대상인 여대생 정혜경의 아파트 방에 사흘 만에 불이 깜박하고 켜졌다. 오늘은 정혜경이 새벽수영을 갈 모양이었다. 그들은 벌써 3일째 밤을 꼬박 새가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김용국만 빼놓고 마기룡이 동원한 세 명의 건달을 데리고 차에서 튀어 나갔다. 두 명이 아파트 문기둥 그늘 뒤에 재빨리 몸을 숨겼다. 도로변에 바짝 댄 그레이스 뒤에 마기룡과 건달 한명이 긴장한 시선을 정문쪽으로 던졌다. 

    정혜경이 아파트 문에서 나와 몇 발자국 딛는 순간 일제히 덤벼들어 괴물의 입같이 벌어지는 차 속에 집어 던지기로 했다. 그레이스 안에서 김용국은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그때 야구르트 배달 아줌마가 아파트 문 쪽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김용국은 급하게 핸드폰으로 마기룡을 불렀다. 

    “조심해 정문으로 누가 들어간다. 여의치 않으면 하지말자.”

    “나도 봤다. 알았다.”
    물러날 기색이 없는 마기룡의 어조였다. 어둠 속에서 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렸다. 그때였다. 우산을 쓰고 아파트 문을 나와 걸어가는 여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어깨에는 가방을 걸치고 있었다. 정혜경이었다. 기둥 뒤에 숨어있던 건달들이 나와 뒤에서 접근했다. 마기룡이 반대방향에서 정혜경 쪽으로 다가갔다. 

    정혜경이 그레이스 옆을 스치는 순간 네 명의 남자가 달려들었다. 차안에 있던 김용국이 번개같이 차문을 활짝 열면서 정혜경을 잡아끌었다. 정혜경이 “흑”하고 놀라면서도 소리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비명을 자제하는 눈치였다. 김용국은 재빨리 운전석으로 넘어가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정혜경이 머리채를 잡은 마기룡에게 다급하게 사정했다. 

    “아저씨 10억 줄 테니까 나 그냥 놔줘요.”
    마기룡은 정혜경을 바닥에 엎어뜨려 무릎으로 등을 누르고 팔을 뒤로 꺽은 채 나일론 줄로 팔목을 묶기 시작했다. 

    “돈 요구 하는 대로 줄께요. 우리 아버지 부자예요”
    정혜경이 다시 애원했다. 마기룡이 청 테이프를 찢어 입에 부였다. 조용해 졌다. 동원한 건달들은 현장에서 돌아가고 그레이스는 어느새 코엑스 사거리를 지나 잠실운동장 쪽으로 가다 정지신호에 걸렸다. 김용국이 백밀러를 통해 뒤를 봤다. 마기룡이 정혜경에게 포대자루를 뒤집어씌우는 중이었다. 어느새 온몸에는 노란 질긴 테이프가 감겨져 있었다. 

    이른 새벽 88도로는 한적했다. 미사리 까페길을 지나 검단산 입구 공사장 안쪽에 도착하는데 이십분도 안 걸렸다. 왼쪽으로 북한강줄기가 번들거리며 흘러갔다. 산을 파헤친 흙바닥 여기저기에 판넬들이 야적된 채 있었다. 마기룡이 차에서 내려 정혜경이 든 포대자루를 끌어내얼른 어깨에 들춰 멨다. 

    “야 총가지고 따라와”
    그가 김용국에게 명령했다. 그들은 잡목이 우거진 계곡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새벽등산객의 눈에 띄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사람을 들고 산길을 가기란 쉽지 않았다. 마기룡이 뒤뚱거리며 백미터쯤 가자 더 이상 못가겠는지 정혜경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좀 쉬었다 교대하자.” 
    마기룡이 헐떡이며 내뱉었다. 거뭇한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달이 떠 있었다. 달빛을 받은 마기룡의 이마가 땀으로 번질거렸다. 포대자루속의 정혜경은 움직이지 않았다. 

    “난 다리가 후들거려서 못하겠어.”
    김용국이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쉰 마기룡은 다시 정혜경을 들춰 멨다. 다시 오십미터쯤 가다가 마기룡은 땅에 주저앉았다. 완전히 지진 표정으로 말했다. 

    “차 안에서 너무 힘을 뺏는지 도저히 못 올라가겠어. 총 줘”
    마기룡은 건네받은 총의 노리쇠를 후퇴 전진시켰다. 자루 속의 정혜경의 얼굴이 하늘 쪽을 향하고 있었다. 마기룡은 총구를 정혜경의 귀 뒷부분 쪽에 갖다 댔다. “퍽”하고 총알이 나가는 둔탁음이 났다. 포대자루가 순간 펄쩍 뛰어올랐다. 마기룡은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탄창에 든 6발을 그렇게 한발 한발 정확히 머리에 대고 확인사살을 했다. 그들은 주위의 낙엽을 긁어 정혜경이 든 포대자루를 덮었다. 

    한 시간 후 그들이 탄 그레이스는 인천 쪽을 향해 외곽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마기룡은 차 안에 두었던 정혜경의 가방과 외투 그리고 우산을 검은 쓰레기 봉지에 담았다. 잠시 후 그들은 길거리에 보이는 세차장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썬팅을 벗기고 내부세차를 부탁한 후 근처의 된장찌개 집에 들어가 아침을 먹었다. 마기룡은 들고 나온 쓰레기 봉투를 음식점 근처의 골목에 버렸다. 증거인멸까지 모든 게 끝이 났다. 

    오전 9시. 공중전화에서 김용국이 회장부인에게 연락했다. 
    “물건을 팔았습니다.” 살인에 성공했다는 그들 사이의 암호였다. 
    “알았다. 다시 통화하자” 회장부인이 박아둔 정보원을 통해 직접 확인을 하려는 것 같았다. 30분후 회장부인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아파트 경비원에게 물어보니까 정혜경이를 봤다고 하던데?” 회장부인은 의심하는 어조였다. 
    “정말 죽였다니까요. 나 참” 김용국이 버럭 화를 내면서 되쏘았다. 
    “하여튼 내가 더 확인해 본 후에 믿겠다.” 회장부인은 아직도 믿지 않았다. 

    그날 낮12시. 정의택씨가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 점심 밖에서 같이 먹읍시다.”
    “알았어요. 그럼 혜경이도 같이 먹어야 겠네”
    혜경이가 고시공부하는 독서실은 아빠사무실과 집 사이에 있었다. 시간을 아낀다고 집 근처의 독서실을 잡고 점심은 집에 와서 먹었다. 잠시 후 아내가 정의택씨에게 전화했다. 

    “이상하네. 혜경이가 올 시간인데 안 오네”
    혜경이의 행동은 늘 시계바늘처럼 정확했다. 

    “오늘 데이트약속인데 바로 거기로 가나보지”
    정의택씨는 남자친구와 오후 1시30분에 만나기로 했다는 딸의 말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딸은 사생활도 아빠엄마에게 말했었다. 오후2시경. 혜경이가약속시간에 나오지를 않는다고 남자친구가 집에 연락했다. 정의택씨는 갑자기 불안했다. 그럴 딸이 아니었다. 정의택씨는 바로 딸이 아침에 갔을 수영장으로 달려갔다. 강습회원명부에 혜경의 싸인이 없었다. 새벽에 분명히 나갔는데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독서실로 달려갔다. 거기서도 혜경이가 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먼저 뺑소니사고가 떠올랐다. 동시에 그의 뇌리에는 회장부인의 잔혹한 표정이 겹쳐서 다가오는 것이다. 정의택씨는 경찰서를 찾아가 뺑소니 아니면 납치라고 하면서 빨리 수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파트 앞에서 교통사고가 났으면 운전자가 혜경이를 싣고 도주할 길은 올림픽대로를 따라 미사리부근으로 가는 길 뿐이었다. 사고가 틀림없었다. 

    “우리 아이에게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없습니다. 바로 수사를 좀 해주세요. 미사리 부근 산을 뒤지면 살 지도 몰라요”
    아버지의 절규였다. 그러나 형사들은 근거 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 날 밤 혜경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 정의택씨는 딸의 새벽길을 구역별로 담당하는 청소부도 만나고 길거리의 오뎅 장사도 찾아 딸을 물었다. 모두들 좌우로 흔들었다. 그는 고위경찰직에 있는 후배에게 부탁을 했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단순실종신고는 수사할 사항이 아니라는게 관할 경찰서의 의견이었다. 

    온 가족이 나설 수 밖에 없었다. 평소에 꺼 놓는 때가 많지만 어쩌면 경비실의 CCTV에 혜경의 모습이 잡혔을지도 몰랐다. 천만다행으로 3월6일 새벽의 녹화장면이 있었다. 치직 거리는 흑백의 모니터 구석에 우산을 쓴 혜경의 모습이 나타났다. 순간 그 뒤로 두 명의 남자가 급하게 따라붙었다. 잠시 후 헤드라이트 불빛이 하얗게 터지면서 급발진하는 차가 보였다. 분명 회장부인의 짓이었다. 정의택씨는 접근금지가처분 기록들과 CCTV필름을 경찰서에 가서 보이며 울부짖었다. 

    그 며칠 후 회장부인은 판사 사위로부터 혜경의 실종소식과 함께 경찰에서는 자기를 의심하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사위의 말에 회장부인은 비로서 정혜경의 죽음을 확신했다. 그 전까지는 김용국과 마기룡이 혹시 혜경이를 어디 숨겨놓고거짓말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었다. 잔금을 줘야 했다. 

    2002년3월10일 울산고속버스터미널 부근의 중국음식점. 허름한 차림으로 변장한 채 혼자 내려온 회장부인이 앞에 앉은 김용국에게 다짐하듯 주의를 주었다. 

    “혹시라도 아직 죽이지 않고 데리고 있다면 꼭 죽여야 한다. 그년은 요부고 영악하니까 살려뒀다가는 너와 마기룡이 다 그 잔꾀에 넘어가 당하게 된단 말이다. 팔아먹기 위해 데리고 있거나 장난치면 절대 안돼.”
    회장부인은 현찰이 든 쇼핑빽을 건네주었다. 김용국이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삼천만원정도 있었다. 

    “아니 나머지 잔금을 다 주셔야지 이거 밖에 안주십니까?” 
    김용국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스쳤다. 

    “당장 현찰을 많이 뺄 수가 없어서 그래. 기다려.”
    며칠 후 다시 회장부인은 현찰을 만들어 건네면서 물었다. 

    “정말 죽인 게 맞냐?”
    “맞다니까요”
    “그러면 시체가 빨리 발견되는 게 좋으냐 아니면 그냥 이대로 놔두는 게 좋으냐?”
    혐의를 받고 있는 회장부인의 의미 있는 질문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김용국이 퉁명스럽게 되받았다. 

    3월 16일 오전 8시 30분경. 검단산을 올라가던 등산객에 의해 정혜경의 시체가 발견됐다. 여대생살인사건이 오후부터 대대적으로 뉴스를 타기 시작했다. 

    출처  : http://blog.naver.com/eomsang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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