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내려가는 도중 심한 말이 나올 수도 있고, 내용이 조금 산만하고 두서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 인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생각이 좀 흐트러지고 거칠어지는 경향이 있어서...
야자시간마다 놀던 고3시기를 보내다가 새내기가 되었던 해
4월.
6살차이나는 고학번 선배랑 사귀게 되었습니다.
사귄지 1달도 안 되었을 때부터 양가 부모님이 그렇게도 반대했더랬죠.
아니 우리 엄마 반대는 이해하겠는데 그 쪽은 왜 반대해...
헌데 이 사람 술이 장난이 아냐. 한 번 마시면 아주 죽도록 마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인사불성되서 그냥 길바닥 아무데나, 혹은 쓰레기 쌓아둔 곳에 엎어져서 잠듭니다
그게 잘못된 일인지도 모르더군요. 그 담날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말하듯 웃으면서 저한테
어제 술먹다가 아침에 일어나니까 학교 정문 앞에서 자고 있더라. 학교 오던 애들이 다 자기 보고 있더라고.
그런 말을 술술 하곤 했습니다.
민망한 것도 모르고 잘못된 것도 모르고 자기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자기 아빠랑 똑같은지도 모르고.
그러면서도 안 헤어지는 이 바보같고 어리석었던 과거의 나 자신아.
근데 웃긴 게 공부 진짜 하나도 안 하고 맨날 술만 퍼고 이러고도 성적은 또 늘 잘 나왔습니다.
고학번이라서 교수들이 점수 퍼주는건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니었습니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머리 하나는 그냥 난 놈이었음.
덕분에 발표수업이나 조별수업같은 건 그 인간 버스 타서 저도 점수가 잘 나왔다고 하더라.
하여튼 1학기 초반에는 학과행사 같은 걸로 술판 자주 벌어지잖습니까. 요새도 그런가요?
저희 때는 아직 그런 경향이 남아서 좀 그랬습니다.
바보같았던 저는 그 인간이 인사불성되든 말든 그냥 제 갈 길 가면 될 걸
또 택시불러서 그 인간 집에 들여다보내고 뒷수습은 제가 다 했습니다.
20살의 빛나는 그 시기를 6살이나 나이 많은 놈 술 먹는 거 뒤치닥거리나 하면서 보내다니.
그러다보니 싸움이 잦아지고 둘 다 성격이 불같아서 그 싸움은 늘 너무 커지고...
어느 하루는 그 인간이 절 때릴려고 하는 거처럼 손을 들더군요.
제가 용납을 절대 못 하는 단 하나가 여자패는 거였는데 하필이면 딱 그 짓을 하려고....
지금 돌이켜보면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고맙죠. 그 날로 바로 깨졌으니.
그 때부터 시작된 스토킹.
새벽 1~2시쯤 술취한 그 사람한테서 매일매일 전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개근상이 목적인 사람처럼.하루도 빼놓지 않고.
-너 오늘 커피자판기 앞에서 누구랑 얘기하더라.걔랑 사귀냐?
......같은 과 언니입니다.
-너 오늘 누구랑 같이 식사하더라 걔랑 사귀냐?
.......후배들 떼거지로 밥사줬습니다.
-너 오늘 교수 누구누구랑 얘기중이더라. 그러고보니 그 수업 성적 잘 나왔지? 사귀냐?
.......내 성적을 니가 어케 알아 임마.
게다가 사실 저 말들도 굉장히 순화된 말이지 실제 사용한 단어는
지금도 차마 민망해서 머리에 담기조차 싫은 그런 수준의 언사들.
그런 말들을 술 취한 사람한테서, 더구나 헤어진 인간한테서 듣고 있으니 진짜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술 너무 취했다. 술 깨고 얘기하든지 어지간하면 연락하지 마라 전화끊겠다고 했더니
나지막하게 전화끊으면 당장 찾아가서 죽여버린다 그러더군요.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러죠? 그걸 그 때 처음 겪었어요.
이건 진심이구나. 전화끊으면 정말 죽겠구나.
그래서 못 끊었어요.죽는 거보다는 폭언이 나으니까.
그렇게 두 세시간을 매일 전화기 붙들고 있어줬어요.
그 짓을 몇 달 하다가 이젠 집으로 찾아오더군요.
술에 취해서는 새벽 4시에(시간도 늘 일정함) 집대문을 발로 차면서
저 나오라고. 안 나오면 죽인다고 막 소리를 지르고.
읽으시는 분들은 경찰에 신고를 하지.왜 병신같이 당하고 있나 싶으시죠?
근데 그 때의 저는 뱀 앞의 쥐새끼같았어요.
그 사람은 집 밖에 있고 전 집안에 있는데도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집 밖에 저 사람은 나에 대해 뭐든지 다 아는 거 같았고 움직이면 그냥 죽을 거 같았어요.
생각하는 거조차도 조심하던 시기였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저도 상태가 그닥 좋지는 않았던 것 같군요.
이렇게 살다간 정말로 누구 하나 죽겠구나 싶어서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끌어모아서 경찰서를 찾아갔습니다.
그 사람이 보냈던 문자, 전화통화 목록, 새벽에 난리부리던 녹음 등을 가지고요.
그런데 그 증거들을 다 본 경찰이 제게 한 말은 이거였습니다.
"아가씨가 그렇게 좋다는데 다시 사겨줘요. 그럼 되겠구만"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실실 웃더라고요. 저 때가 좋다는 둥. 한창 때라는 둥.
저 그 일 이후로 아직까지도 경찰 못 믿겠어요.
경찰서를 다녀온 뒤 이젠 정말 답이 없구나 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구나 싶어
휴학계를 내러 학교에 갔습니다. 방학이라 그런지 학교에 사람이 별로 없었죠.
사실 말이 휴학계지 자퇴나 편입도 진지하게 고려하던 때라 과방에 제 물건을 정리하러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재수없게 그 사람과 딱 마주치게 됩니다. 따라다니고 있었을 수도 있겠죠.
둘이 한참을 그냥 마주보고 가만히 앉아있었어요.
중간에 제 윗 학번 언니가 과방에 들어왔다가 저희 둘만 있는 걸 보고 인사도 없이 황급히 바로 나갔어요.
과방 안에서 몇 시간에 걸쳐서 무슨 얘기를 했는데 거기에 대한 기억은 나지 않아요.
기억나는 거라고는 제가 그 사람 몰래 탁자 밑에서 통화버튼을 눌러서
그 사람과 제가 학교 과방에 단 둘이 있다는 걸 친구가 알게 했던 것.
그 후로 몇 시간의 대화 끝에 그 사람이 화를 내며 과방에 있던 기름난로를 차버렸던 것.
거기서 소파로 불이 옮겨붙었고 그 사람은 그걸 보고 과방 문을 밖에서 잠그고 가 버린 것.
그 와중에 저는 그냥 멍 때리고 있었던 거.
왜 저는 저 사람이랑 관련해서는 저렇게도 멍청했을까요. 이해가 안 되네.
성서에서 우리 학교까지 그 먼 거리를 말없는 제 전화 한 통에 와준 친구 덕분에 저는 과방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며칠 뒤 잊고 안 가지고 나온 물건을 찾으러 그 친구와 다시 간 과방에서 대자보를 봤죠.
과방 기물을 파손해서 미안하고 사죄한다는 그 사람의 대자보요.
방화에 대한 것도 없고 저에 대한 것도 없고 마치 아 저 인간 또 술에 취해서 물건 부쉈나보네 라고 생각할 만한 대자보.
거기에 정학 얼마. 웃기지 않아요?
친구가 그 대자보를 보고 어이없어하며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신고하러 갔다가 또 허튼 소릴 들으면 제가 진짜 무슨 일을 낼 거 같았거든요.
정말 웃긴 게요. 겨우 정학 며칠에 대자보 붙인 처벌을 받았는데 저한테 그 뒤로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어요.
그 좁은 학교에서 마주친 적도, 전화가 온 적도, 우리 집에 찾아온 적도 없었어요.
공권력에 의한 처벌도 아닌 저따위 학교처벌에 쫄아버리는 그 정도의 인간한테 저는 그 짓을 당하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용기를 내서 찾아간 그 때 경찰이 올바르게 처신해줬다면,
하다못해 그 사람한테 확인을 위해서라는 변명이라도 해가며 어떤 형태로든지 언질이라도 해 줬다면
저는 과방에서 그 따위 개같은 일을 당하지 않을수도 있었을텐데.
하여튼 저 일이 지금으로부터 15년도 더 전에 벌어졌던 일입니다.
그런데 몇 년전 뜬금없이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습니다. 그 인간이더군요.
공무원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네. 그 공무원 말입니다.
방화,스토킹...... 그 사람이 공무원이래요
우리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고 우리를 위해 일하는 그 공무원이요.
그런데 일을 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휴직중이라고 하더군요.
결혼을 해서 5살짜리 딸이 있다고 합니다.
어제 새벽까지 다운받은 영화를 보면서 술을 먹다가 지금 일어났다고 합니다(당시 시간 오후 1시? 2시쯤으로 기억함)
와이프는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출근했다고 합니다.
백수남편은 밤새도록 술 먹으면서 놀다가 느지막히 오후에나 일어나서 뒹굴거리고
혼자 힘들게 일하는 여자는 아침부터 애 준비까지 시켜 유치원 데려다주고 가는 그런 상황인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사람은 옛날 애인 전화번호는 또 어디서 알아내서는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겁니다.
너무나도 어이없는 상황 아닙니까? 이거? 그래서 제가...
결혼한 남자가 이딴 식으로 딴 여자한테 연락하는 거 아니다.
그리고 난 가족부양 안 하는 남자 정말 싫다.
5살짜리 딸 보기 부끄럽지도 않냐? 아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냐?
라고 하니 정말 실망한 말투로 "너는 나 힘든 거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이러면서 먼저 전화를 끊더군요.
..........먼저 끊었...이 개새가! 내가 먼저 끊었어야 하는데 지가 뭐라고 먼저 끊어!
게다가 그 말투 뭐야. 내가 완전 잘못한 듯한 그 말투! 세상천지 이해할 게 없어서 저 놈을 이해합니까?
아니 저 놈을 이해하면 자기 가족을 위해서 힘들고 더러워도 참고 견디는 이 땅의 모든 부모님들을 욕되게 만드는 거 아닌가요?
게다가 저는 서울로 이사온지 거의 10년.
원래 살던 지역 사람들과는 연락을 다 끊고 제 번호를 아는 사람은 서울에서도 많이 없습니다.
sns따위 하지도 않고 제 정보가 퍼질 가능성이 있는 행동은 전혀 안 합니다. 이벤트라던가 응모라던가 인터넷사이트라던가.
번호를 써야 할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번호를 썼습니다. 현재는 남편의 번호가 애용되고 있습죠.*'ㅅ'*
절 이렇게까지 만든 장본인이 대체 어디서 제 번호를 얻은 걸까요?
대충 감이 잡히시죠? 민원을 넣어야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이것 또한 포기했습니다.
증거도 없고 궁지에 몰린 거처럼 보이는 저 인간이 그 때보다 더 미쳐서 저한테 붙을까 봐.
그리고 결혼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둘이 사실은 뒤로 바람핀 거 아님?
이런 소리 들으면 진짜 그런 말 한 인간 목졸라버릴 거 같기도 하고.
하....그건 그렇고 저런 놈이 공무원을 하고 자빠졌네 진짜. 경찰이고 공무원이고...
그 뒤로 저는 번호를 2번 더 바꾸고 쓰던 메일은 아예 삭제해버리고 이사도 2번 더 했습니다.
뜬금없는 결론: 여러분. 사람은 조심해서 사귀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