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삼삼이를 어린이집에 모셔다드린 뒤 항상 그러하듯 자연스럽게 소파와 혼연일체의 자세로 누워 채널 CGB와 OCM 등 영화 채널을 돌려 봐도 </div> <div>딱히 볼만한 게 없었다. 선풍기 바람이나 세게 할 생각으로 잠시 일어섰을 때 소파의 내 궁둥이가 항상 닿는 부분이 유독 푹 꺼져 있는 것을 봤다.</div> <div>분명 내가 백수가 되기 전에는 탱탱함을 유지하던 소파였는데 백수가 되면서 나와 소파의 체형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div> <div> </div> <div>"이제 백수 생활을 청산할 때가 왔다!" </div> <div> </div> <div>와이프에게는 추석까지 나의 시간을 가진다고 했지만, 이제는 다시 가장으로 귀환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느꼈다.</div> <div> </div> <div>여기 놀고 있는 전문 인력이 있어요! 라고 선배들에게 전화를 넣어야 하나 아니면 제갈량의 출사표와 같은 이력서를 작성해야 하나 고민했다.</div> <div> </div> <div>"그래.. 일단 설거지부터 하자.." </div> <div> </div> <div>설거지를 하고 돌아와 다시 소파에 누워 어떤 구직활동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우아한 자태로 잠들었다.....</div> <div> </div> <div>몇 시간이 흘렀을까 삼삼이를 다시 어린이집에서 데려올 시간을 알리는 알림이 울렸다. 여전히 나를 보고 반기는 아들을 데리고 오며 물어봤다.</div> <div> </div> <div>"삼삼아 아빠 일을 해야 할 거 같은데 뭐부터 할까?"</div> <div> </div> <div>"아이스크림 먹자!!"</div> <div> </div> <div>그래.. 일단 아이스크림 먹자.. 금강산도 식후경 고민에는 역시 달콤한 비비빅이지..</div> <div> </div> <div>시간이 흘러 저녁, 와이프가 퇴근하고 일상적인 생활(저녁 식사, 아이와 놀고 재우기)을 마친 뒤 진지하게 물어봤다.</div> <div> </div> <div>"아무래도 내가 이제 다시 일해야 할 시기가 온 거 같아."</div> <div> </div> <div>"와! 오빠 백수 되고 나서 가장 기특한 말을 하네! 내가 얼마나 이 말을 기다렸는지 알아?"</div> <div> </div> <div>이 여자.. 나한테는 푹 쉬어라.. 쉬는 동안 하고 싶은 거 다 해봐라! (단 바람 피면 전신에 구멍을 뚫어 바람이 솔솔 나오게 해주겠다고 협박을..)</div> <div>라는 말은 역시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div> <div> </div> <div>"그럼 오빠 이력서, 자기소개서도 업데이트하고 머리도 좀 다듬어야지.."</div> <div> </div> <div>"이력서? 그런 거 제대로 써 본 적이 없는데.."</div> <div> </div> <div>생각해보니 그동안 학연으로 취직하고 인맥으로 이직했던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였다. 학연 지연 혈연이 없어져야 한다 강조했던 내가 </div> <div>이런 사회의 암적인 존재였다니.. </div> <div> </div> <div>와이프는 내게 선배들에게 연락하기 전에 먼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부터 작성하라고 했다. </div> <div>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인생의 첫 제대로 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쓰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내려받은 양식의 이력서를 작성하는 것은</div> <div>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자격증 항목의 한 줄을 채워준 운전면허증에 처음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그리고 조용히 토익 항목은 삭제했다.</div> <div> </div> <div>문제는 자기 소개서 였다. 내 "자기" 인 와이프 소개서는 멋지게 쓸 자신이 있는데, 막상 나 자신에 대한 글을 쓰려니 시작부터 막혔다.</div> <div>결국 인터넷에서 자기소개서를 검색해 봤다. 구체적으로 작성해라, 간결한 문장을 사용해라, 팩트에 기반을 둔 글을 써라.... 등의 </div> <div>조언과 샘플 몇 개를 읽으면서 내가 대학 다닐 때 기억나는 자기소개서 첫 문장은 "인자하신 아버지와 현명하신 어머니 슬하에서.." 였는데 </div> <div>격세지감을 느꼈다. 그래도 다행히 내가 신입은 아니어서 경력자는 경력 중심으로 기술하라는 말에 자신을 얻어 글을 써 나가기 시작했다.</div> <div> </div> <div>드디어 저녁 와이프가 도착해 회초리만 들고 있지 않지 마치 아이의 숙제 검사하는 어머니처럼 내게 "어디 온종일 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div> <div>가져와 봐.." 라고 지시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노트북 전원을 켜고 와이프에게 보여줬다. </div> <div> </div> <div>먼저 이력서를 살펴본 와이프는 내게 대뜸</div> <div> </div> <div>"오빠 이 사진 몇 살 때야?"</div> <div> </div> <div>"이때가 아마 29살인가 30살일걸.."</div> <div> </div> <div>"이때는 그래도 좀 많았네.."</div> <div> </div> <div>"뭐가?"</div> <div> </div> <div>"뭐긴 머리숱이지.. 그런데 10년도 더 된 사진을 써도 되나 모르겠다. 면접관들이 보고 성성씨는 어디 가고 아버지가 오셨어요? </div> <div>이럴 수도 있잖아?"</div> <div> </div> <div>내가 와이프보다 힘만 세다면.. 이 여자 간절하게 한 대만 때리고 싶었다. </div> <div> </div> <div>"뭐.. 남들은 이력서 사진 포토샵도 한다는데 이 정도는 봐주겠지. 그리고 저 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잖아..."</div> <div> </div> <div>와이프는 "별 차이? 심각한 차이가 있다! 이 대머리야.." 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div> <div> </div> <div>그래도 나름 글로 먹고사는 직업이었으니 자기소개서는 잘 썼겠지 하며 보는 순간....</div> <div>글을 읽는 와이프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내게 말했다.</div> <div> </div> <div>"오빠 이게 자기소개서라고 쓴 거야? 아니면 10년 치 업무일지를 한 번에 쓴 거야?"</div> <div> </div> <div>"아.. 내가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구체적이고, 간결하게 그리고 팩트만 쓰라고 했어. 우리 때는 문장으로 서술하는 거였는데 요즘 트렌드는</div> <div>바뀌었나 봐! 왜? 구체적이잖아.."</div> <div> </div> <div>"그래서 택배 포장 한 것도 썼냐? 이 인간아!! 당장 다시 써!!"</div> <div> </div> <div>그날.. 난 받아쓰기 10점 받아온 뒤 엄마 옆에서 무릎 꿇고 받아쓰기 연습하던 9살 시절로 돌아가 와이프 옆에서 무릎 꿇고 자기 소개서를 </div> <div>작성했다. 뭐.. 별 차이 없는데.. 왜 뭐라고 하는건지..</div> <div>모르겠다 취직이나 되길..</div> <div>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