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극단주의자가 있다. <div><br></div> <div>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절하고</div> <div>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거절하고</div> <div>재차 부탁해도 거절하고</div> <div>온갖 아부와 재롱에도 끝까지 거절하고 보는 <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strike>그래 다 거절해라 썅</strike> 부류와</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br></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당장 자기 일이 급해도 남의 부탁을 덥썩 받아들이고</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자기가 손해볼 것 같아도 고민고민하다가 받아들이고</span></div> <div>난처한 부탁에 동공지진을 일으키면서도 어찌어찌 또 받아들이고</div> <div>좀 여유롭다 싶으면 무턱대고 받아들이고 보는 <strike>전형적인 호구</strike> 부류, 이렇게 둘이다.</div> <div><br></div> <div>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대개 소심한 경우가 많다.</div> <div>자기 의견도 제대로 말 못하고 쭈뼛거리고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고</div> <div>어쩌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기라도 하면 당황하고 긴장해서 삑사리에 덤벙거리기에 홍조까지...</div> <div><br></div> <div>그렇다, 내 얘기다. <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물론 난 극단적까지는 아니다.</span></div> <div>어찌 됐든 거절은 하니까.. 말뿐이지만...</div> <div>그러니까 대충 이런 식이다.</div> <div><br></div> <div><br></div> <div>1.</div> <div>이제 막 대학에 들어왔을 때의 일이다.</div> <div>새로 사귄 동기들이랑 밥을 먹으러 학생 식당을 갔다. 번잡스러운 게 귀찮았던 나는 덮밥류를 시켰다.</div> <div>모두의 음식이 나오고 먹으려고 할 때 한 친구가 고기 좀 먹어도 되냐고 물어봤다.</div> <div>순간 나는 얼마나 고기가 먹고 싶었으면 하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러라고 답했고</div> <div>그 친구는 밥을 먹는 내내 한 점 씩, 결국 모든 고기를 가져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div> <div>사실 나는 안 먹어도 그만인 고기인지라 딱히 상관이 없었는데</div> <div>오히려 옆에서 보고 있던 동기 누나 한 명이 대신 역정을 내며</div> <div><br></div> <div>"넌 꼬망이 거 좀 그만 뺏어먹어! 어쩜 애 고기를 다 뺏어먹을 수가 있어? 애가 너 무서워서 암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건 안 보이니?"</div> <div><br></div> <div>....누나??</div> <div><br></div> <div>"이것 좀 봐봐. 못 먹어서 키도 작고 비리비리하잖아!!"</div> <div><br></div> <div>아니, 그건.......</div> <div><br></div> <div><br></div> <div>2.</div> <div>행사 같은 걸 할 때에도 비슷한 경우가 많다. 가령</div> <div><br></div> <div>여름방학 때 동아리에서 신입생들과 같이 국토대장정을 가는데, <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신입생들과 함께 곁에서 도와줄 선배들도 몇 명 같이 가는 게 보통이었다.</span></div> <div>그런데 하루는 후배 한 명이 전화로 국토대장정에 신입생들을 케어할 선배가 없다고 찡찡거렸다.</div> <div>단칼에 거절했지만, 후배 역시 물러설 줄 몰랐다.</div> <div>나는 잠시 한숨을 쉬고</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br></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너 지금 내 신분이 뭔지 알고 있냐?"</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휴학생이요."</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그럼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냐?"</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고향이죠."</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지금 뭐하고 있는지는?"</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아르바이트요."</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만약 네가 나라면 어쩔 거 같냐?</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일단 전화도 안 받았을 것 같아요."</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더 할 말 있냐?"</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편히 쉬세요."</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br></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그리고 다음날 그 애한테 전화를 걸었다.</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br></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신청서는 일단 너한테 주면 되냐?"</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br></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물론 알바는 그만뒀다.</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br></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br></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3.</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학교도 좀 <strike>오래</strike> 다녔고 이제 전공 공부에만 매진하고 있는 와중에 또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span></div> <div>한 달 후에 있을 동아리 창립 행사에 신입생들이 재롱을 아니, 콩트를 하는데 <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조장을 좀 맡아서 지도해달라는 거였다.</span></div> <div>처음엔 중간에 시험도 있고 해서 거절하려 했는데,</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그냥 중간에 애들 먹을 거나 사주면서 북돋아주기만 해도 된다고 하도 사정해서 결국엔 또 조장을 맡게 되었다.</span></div> <div>그래서 정말 가끔 밥이나 간식 같은 거나 사주면서 <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연기가 어색한 거나 소품이 엉성한 거 같은 것만 봐주고 있었는데</span></div> <div>동아리 임원 한 명이 슬쩍 다가와 말했다.</div> <div><br></div> <div>"꼬망 오빠, 사실 말 안 한 게 있는데요. 역할 하나가 부족해요."</div> <div>"응? 인원 다 맞는데? 다른 조랑 헷갈린 거 아냐?"</div> <div>"헷갈린 건 아닌데, 다른 조는 맞아요."</div> <div>"근데 왜 나한테 얘기하냐?"</div> <div>"오빠라면 해주실 것 같아서요."</div> <div><br></div> <div>그렇다. 난 이미 동아리 내에서 말만 하면 쉽게 내주는 몸이었던 것이다.</div> <div><br></div> <div>"별로 할 건 없어요."</div> <div>"조장 맡아달라고 할 때도 들었던 말 같..."</div> <div>"등장 씬도 한 번 뿐이고."</div> <div>"아니, 저기 내 말..."</div> <div>"대사도 몇 줄 안 돼요. 봐요, 여기 대본."</div> <div><br></div> <div>후배가 보여준 대본엔 확실히 몇 줄 안 되는 대사가 있었다. 외우기도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div> <div>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div> <div><br></div> <div>"근데 왜 여자 역할이야?"</div> <div>"그래서 오빠한테 부탁하는 거예요."</div> <div>"접속사가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div> <div>"여장은 전에도 해보셨죠?"</div> <div>"아니, 내 말 좀. 다른 애들 많잖아. 별로 안 어려워 보이는데 다른 조 새내기한테 부탁해도 되고. 우리 조 애한테도 한 번 물어볼까?"</div> <div>"걘 이미 여장하잖아요."</div> <div>".......나 같은 늙다리보다는 풋풋하고 상큼한 새내기가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div> <div>"걔네 얼굴 보셨잖아요."</div> <div>".......그래, 다들 세월을 좀 맞긴 했지.. 그래도 걔네가 하는 게 좀 더 신선하고 귀엽지 않을까?"</div> <div>"오빠가 더 귀여워요."</div> <div>"입술에 침이라도 바르고 얘기하자?"</div> <div>"쳇."</div> <div><br></div> <div><strike>그래서</strike> 결국 여자 역할을 받아들이고 말았다.</div> <div><br></div> <div>시간이 흘러 행사 당일이 왔다.</div> <div>치마를 준비할 거라는 애들의 말에 맨 다리를 보이는 게 민망해서 스타킹도 사갔다.</div> <div>한창 리허설 중이던 애들이 나를, 정확히는 내 손의 스타킹을 보더니 다들 연습을 멈췄다.</div> <div><br></div> <div>"스스로 스타킹을 사오다니. 오빠, 실은 제일 기대하고 있던 거 아니에요?"</div> <div>"입술로는 거짓을 말해도 몸은 정직하네. 숨길 줄도 모르고."</div> <div>"어머, 검스네? 누굴 꼬시려고요, 꼬망 오빠?"</div> <div>"오빠, 오빠, 그거 혼자 신을 수 있어요? 신겨줄까요?"</div> <div><br></div> <div>그냥 나가고 싶었지만, 들어갈 땐 마음대로 였어도 나갈 땐 아니었다. <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난 애들이 건네준 치마를 들고 화장실로 갔다.</span></div> <div>치마를 입는데 좀 짧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래가 휑하니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div> <div>옷을 다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는데, 웬 남자 하나가 흠칫 놀라며 뒤돌아 화장실을 나갔다. <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난 눈물을 머금고 리허설 중인 강의실로 갔다.</span></div> <div>애들은 한창 수다를 떨고 있었다.</div> <div><br></div> <div>"거봐, 내가 뭐랬어. 치마를 입었으니 멀리 못 갈 거랬지?"</div> <div>"오빠... 그게 제일 작은 사이즈였는데, 그게 맞네요. 하아....."</div> <div>"치마가 어울리는 남자다리라... 복 받았네요, 꼬망 오빠."</div> <div><br></div> <div>여자애들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훑어봤다.</div> <div>괜히 부끄러워져서 들고 나온 옷으로 가리니 애들이 또 한 마디 씩 했다.</div> <div><br></div> <div>"방금 그 포즈, 진짜 위험한 거 알죠? 옷 내려놓고 빨리 일로 와요."</div> <div>"옷도 갈아 입었으니, 이제 화장하죠."</div> <div><br></div> <div>처음 듣는 이야기였다.</div> <div><br></div> <div>"화장이라니? 그런건 계약에 없었..."</div> <div><br></div> <div>애들은 강제로 날 의자에 앉혔다.</div> <div><br></div> <div>"치마에서 끝날 줄 알았어요? 순진하네."</div> <div>"우리 동아리에서 순진한 건 불법이거든요. 벌 받는 거라고 생각하세요."</div> <div><br></div> <div>치마에 화장에 가발까지, 애들은 치밀했다.</div> <div>한 번에 말하면 단 번에 거절할 줄 알고 순차적으로 오픈해서 충격을 완화하는 것까지, 애들은 영악했다.</div> <div>그렇게 또 한 번의 여장 기록이 생기고야 말았다.</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