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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humordata_1453903
    작성자 : 릴케
    추천 : 3
    조회수 : 1201
    IP : 27.119.***.157
    댓글 : 1개
    등록시간 : 2013/10/04 21:26:04
    http://todayhumor.com/?humordata_1453903 모바일
    망한 소개팅의 반전
    “안녕하세요, 양호경이라고 합니다.” 소개팅녀와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찾아간 일본식 덮밥집의 문은 닫혀 있었다. 몇 달 전에 갔을 때 맛과 분위기가 좋아서 기억해두고 있었는데 그사이 폐업이 되어버린 것이다. “너무 인기가 좋아서 확장이전 했나 봅니다” 하며 웃어넘겼지만 머리로는 다음 갈 곳을 탐색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예전에 가 본 근처의 요리주점을 생각해서 소개팅녀와 함께 갔지만 거기도 폐업, 문을 닫았다.

    80번 넘는 소개팅 동안에 미리 점찍어둔 식당이 망했던 것은 처음이었다. 두 번 연속으로 찾아간 곳이 망한 것도 물론 처음이었다. 어색하게 “요즘 경기가 안 좋나 봅니다. 또 망했네요” 하며 웃어넘기려 했지만 속으로는 ‘아, 소개팅 망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소개팅하는데 식당도 하나 제대로 못 찾았으니 상대가 나쁜 인상을 가졌을 것은 분명해 보였다. 더 이상 맛집 탐색 능력을 상실하고 그냥 바로 옆에 보였던 스파게티 집에 들어갔다.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나서도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식당이 왜 망했지? 소개팅도 망했다’를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했던 소개팅의 상이 흔들렸다. 처음부터 이렇게 꼬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개팅 성공의 자신감을 상실하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찾아간 식당이 망한 것은 금세 잊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뭐를 좋아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었다.

    10년 넘게 소개팅 입문과 전략에 대해 생각했던 개념들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녀와 자연스레 묻고 답했다. 지난 소개팅 경험들은 아무런 도움도 의미도 없었다. 그 순간에는 앞에서 조근조근 말하고 있는 상대가 참으로 예뻐 보였고, 또 나에 대해서 말해주고 싶었다. 처음 만난 자리였음에도 그게 참으로 자연스러웠다. 작년 겨울, 80여번의 소개팅 끝에 처음으로 소개팅으로 만난 상대와 연애를 시작했다. 소개팅의 원칙과 룰에 대해서 많은 고민과 경험을 했지만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과의 첫 연애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연애를 하거나 소개팅을 할 때 사람들은 항상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인지를 묻곤 한다. 소개팅을 잘하려면 무슨 말을 해야 하고, 문자는 얼마나 자주 보내야 하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 80여번의 소개팅 동안 그런 방법론들을 무의식중에 정리했고 소개팅이나 연애는 ‘이래야 한다’는 틀이 생겼다. 그런데 결국 연애는 관념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나의 ‘관계’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정해진 이론이 아니라 어떻게 튈지 몰라 때로는 불안함을 느끼는 생명체인 것이다. 30년을 넘게 다른 세상에서 살아왔던 사람 간의 관계는 종종 드라마틱한 일체감을 주지만 가끔은 차가운 이질감을 준다. 연애는 그 불안한 생명체를 키워가는 과정이고 서로의 사랑과 인내로 커져간다. 그리고 난 지금 그때의 소개팅녀와 내 생애 가장 긴 연애를 하고 있다. <끝>


    릴케의 꼬릿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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