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몇년이나 흘렀을까?
 
애써 계산해보면 정확한 시기를 알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이 큰 의미가 있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날.
 
 
 
오늘도 너는 바쁘다.
 
조그만한 가게를 운영하면서
 
카운터에 앉아 컴퓨터를 만지작 거리는 너.
 
 
손님이 없을 이 시간엔 보나마나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뭐해?" 라고 물으면서 자연스럽게 니가 앉아있는 의자 뒤로 간다.
 
그리고 게임속 너의 케릭터를 보는 척,
 
사실 너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다른 손님들이 보기에 우리가 남매인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우린 많이 친한 사이였지만, 너는 나와 조금 달랐다.
 
 
너에겐 나이보다 10살은 더 어려보이는 명랑함과 쾌활함이 있었지만
 
한가지 게임을 오래한다거나 하는 그런 끈기는 없었다.
 
(아, 그리고 눈치도 없었지)
 
 
나에겐 그런 명랑함도, 쾌활함도 없었지만
 
한가지에 몰두하면 몇년이고 붙잡는 끈기.. 라기보단 오기와 집념이 있었고,
 
그리고 하나 더..
 
너에 대한 남다른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날씨가 조금씩 으슬으슬해지고
 
내가 너의 가게로 사가는 음식이
 
치킨이나 아이스크림에서 -> 치킨이나(..) 호빵같은 것으로 바뀔 때 쯤..
 
 
나는 여러 게임에 흥미를 잃은채 할만한 게임을 찾고 있었고
 
그때 니가 나에게 권유한 것이 곧 출시를 앞두고 있었던 [WoW]였다.
 
 
"너 스타크래프트 좋아하잖아! WoW라고 들어봤지? 이거 하자 우리!!
 
다른 애들도 다 같이 시작할꺼야~ 응? 할꺼지?"
 
 
RPG게임..?
 
그때 당시 나는 RPG게임은 폐인들만 하는거라는 편견이 있었고
 
'세계가 열광하는 게임'이라는 그 타이틀이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어서
 
WoW따위는 하지 않을 생각..
 
 
. . .
 
 
이었는데.
 
 
그런 생각들이 다 무슨 소용이야.
 
너를 만나고 나는 많이 바뀌었다.
 
저런 편견들도 기꺼이 버릴 수 있어.
 
 
난 스타크래프트같은 전략시뮬레이션을 좋아한 반면
 
너는 나와 전혀 안맞는 아기자기한 게임만 하는 통에
 
한번도 같은 게임을 해본적이 없었는데..
 
너와 같은 세계에서 뛰어놀 수 있다니, 아아.
 
 
당장 회원가입을 하고 게임을 설치했다.
 
그리고 어떤 케릭터를 키울지 홈페이지를 보며 꽤 오래 기다렸던 것 같다.
  
 
잠시 후, 드디어 내 눈앞에 블리자드 특유의 타이틀과 동영상이 펼치지고...
 
벼락을 맞은 듯한 강렬한 충격까진 아니었지만
 
마치 빗물에 옷이 서서히 젖어들듯, 난 WoW에 젖어들게 되었다.
 
 
 
 
 
평소 취향대로라면 넌 인간법사를 했을텐데,
 
주변 사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호드진영으로 가게 되었다며
 
'나중되면 짱이다'라는 결론만 듣고 언데드 도적을 시작했다.
 
 
눈에 콩깍지가 씌인 나도 예정대로라면
 
늘씬한 외모가 너를 닮은 것 같다며(?) 나이트엘프를 했을텐데
 
진영 문제로 인해 타우렌 전사를 골랐다.
 
 
"이거 종족마다 시작마을이 달라서 처음엔 못만나~
 
우리 열심히 해서 꼭 만나자 ㅋㅋ"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날아갈 수 있는데..
 
그때 우리에게 서로의 시작마을은 너무 멀기만 했다.
 
왜 그 사실이... 그렇게 마음이 아팠을까.
 
 
WoW를 시작하고 시간이 조금 흘렀지만,
 
워낙 요령이 없던 우리는 15레벨 근처도 찍지 못하고
 
게임안에서 만나지도 못했다.
 
 
그리고 우리의 오프라인 사이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메신저로 나눌 대화가 게임내에 귓속말로 바뀌었을 뿐이고
 
나는 하루 한번씩 너의 가게에 들려 일을 거들어 주거나
 
게임과 관련된 수다를 떨거나 저녁을 함께 먹었다.
 
비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컵라면에 김밥 두줄을 사들고 너를 찾아갔고
 
한달에 두번쯤은 서로 번갈아가며 치킨(..)을 사준다거나.
 
마감시간엔 같이 가게 정리를 해주고
 
니가 약속이 생기면 서로 부담없고 미안하지 않을 정도의 일당을 받고 너의 가게를 봐주곤 했다.
 
 
그렇게... 조금은 변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변함없는 일상이 좋았다.
 
 
 
 
또 시간이 흘렀다.
 
이젠 너의 가게 수도관이 동파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날씨다.
 
우리는 서로 적성에 맞지 않는 케릭터 선택 때문에
 
각각 두개, 세개의 케릭터를 키워봤고
 
나는 트롤 마법사를 거쳐 마지막으로 선택했던 오크 사냥꾼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이 케릭으로는 크로스로드 이상 진출할 수 있기를..
 
이 케릭으로는 너를 만날 수 있기를..
 
 
 
"야야, 어제 A양 케릭터를 봤거든? 응, 타우렌 전사!
 
타우렌이 역시 귀엽긴 하더라!
 
그래서 그런데 나 그냥 타우렌 할까봐!"
 
 
또.. 바꾸는거야?
 
이 상태면 서로 함께 사냥하는 일은 그냥 꿈이나 다름없겠어.
 
그래, 다시 타우렌 케릭터를 만들어서 처음부터 같이 해야지!
 
 
"나도 타우렌 새로 키워보고 싶어! 직업은 뭘로 할까?"
 
"맞아, 우리 A양도, B군도 다 전사랑 사냥꾼이라 힐러가 없어~ 힐되는건 어때?!"
 
"그럼 주술사?"
 
"ㅇㅇ"
 
"ㅇㅋ"
 
 
 
그리고
 
드디어... 너와 만났다.
 
 
나는 타우렌 선배라 자칭하며 가이드를 자청했다.
 
'○벤'이나 '와○메○'같은데 안봐도 내가 초반 퀘스트 위치는 더 정확하다며
 
퀘스트를 알려주고, 레벨별 사냥터를 안내하고,
 
그럼에도 가끔 모르는 것 때문에 너와 함께 방황하던 그 시기가 참 좋았다.
 
 
내가 썬더블러프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져 낙사하자 서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로 채팅창을 도배하기도 했고
 
니가 크로스로드 여관 옆에서 예체야키를 데리고 있는 냥꾼을 보더니
 
냥꾼으로 갈아탄다는걸 뜯어말린 적도 있었다.
 
 
여러번의 컴퓨터 교체가 있었던 만큼 그래픽도 지금이 훨씬 좋은데다
 
온라인이던 오프라인이던 지금이 훨씬 풍족한게 사실인데..
 
왜.. 그 옛날이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느껴지는 걸까..
 
(왜긴.. 각막에 콩깍지를 마법부여를 했으니까 그렇겠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또 흘렀고
 
서로의 케릭터 레벨은 높아졌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니가 조금씩 멀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가게를 봐달라고 부탁하는 일이나,
 
함께 식사를 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내가 있으면 말 수가 적어지고...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뭐지...
 
주변 사람들에게 무슨 얘길 들은걸까...
 
왜 나에게 이렇게 냉정하게 대하는거지.
 
 
"이제... 마감시간에 안와줘도 돼. 혼자 정리할 수 있어."
 
 
 
그때 알았다.
 
그래.
 
내 마음이 들켰기 때문이다.
 
아니, 들키지 않은게 오히려 이상하려나.
 
 
너의 가게에 놀러가는 일도 줄었고
 
너에게 귓말하는 일도 줄어 들었다.
 
서로 게임시간을 맞추는 일도 없어졌고...
 
이젠 니가 계정을 넣긴 했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습게도 내 케릭터 레벨은 차곡 차곡 올라가고 있었다.
 
 
"기다리면서... 할 것이 없었거든."
 
  
 
 
사랑을 고백할 용기도 없이
 
혼자 끙끙 앓는 사람들의 결말들은 거의 다 그러하듯이
 
피니쉬를 못해 내 사랑은 흐지부지한 짝사랑으로 남았고,
 
다른 사람을 통해 니가 신규 서버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니가 없는 이 세상... 내가 있을 필요없어."
 
 
나는 몰래 너를 따라 신규 서버를 옮겨다녔고
 
나의 존재를 모르던 너는 어느덧 아예 게임을 접어버렸다.
 
 
그리고 오프라인에서의 우리들의 이야기도 참으로 싱겁게 끝이 났다.
 
 
 
 
 
 
그 후의 몇번의 확장팩과 서버통합이 있었다.
 
나도 몇번의 접음과 다시 시작.. 아니, 쉬었다 하기를 반복했는데,
 
정신을 차리고보니 나는 다시 우리의 첫서버로 돌아와 있었다.
 
너와 처음 만났던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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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내가 왜 맨날 비슷한 이름으로만 케릭터를 만드냐고 물었지?
 
기억 못하는거야? 뒤에 두글자는 니가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잖아.
 
 
너 계정 끝나서 심심하다고 내 계정 좀 빌려달라 했을 때, 내가 왜 싫다고 했는지 알아?
 
그때 내 비밀번호는... 니 이니셜과 생일이었어.
 
 
너는 지금 내가 무슨 케릭터 키우는지도 모를꺼야.
 
하지만 어떤 케릭터를 하더라도 난 너를 떠올릴 수 있어.
 
 
 
 
 
니가 권유한 게임.
 
니가 날 부르던 명칭.
 
너를 떠올리게 되는 비밀번호.
 
그리고 너와 함께 했던 세상과,
 
너의 흔적이 남은 케릭터..
 
 
 
"나는 아직,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