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ungsik님께서 어제 조선시대 화폐경제애 대한 글을 올려 주셨는데요 <BR>이 시기 화폐의 유통이 부진하였던 이유와 함께 상업이 약화된 것에 대한 좋은글 이었습니다<BR>그 이유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조명이 필요하겠죠 저도 개인적인 생각을 한번 써보고자 합니다.</P> <P> </P> <P>흔히 동아시아에서 상업이 약화된 이유에 대해 유교적 관료주의의 개입을 꼽는 경우가 많습니다 <BR>상업을 천대하고 농업을 장려한 사회의 풍토와 상인의 자본축적을 가로막은 관료사회의 행태가 <BR>이를 저해하였다는 이론이 주류죠 하지만 이런 요건이 모두 충족했음에도 정반대의 경우도 존재합니다</P> <P> </P> <P>예를 들어 송나라가 그러합니다 <BR>송나라는 대표적인 유교 사대부들의 국가로 <BR>유교의 사인층이 본격적으로 관료에 진출한 시기의 왕조이자 <BR>나아가 유교를 더욱 발전 시켜 이른바 성리학이란 유교의 철학화역시 달성한 나라입니다 <BR>하지만 이 송대의 중국은 기존의 교역로였던 실크로드를 대체하는 남해 해상무역과 선박을 이용한 교역으로 육로 교역보다 <BR>보다 큰 단위의 무역으로 발전한 시기였으며 화폐경제도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지폐와 어음의 유통단계에 이릅니다</P> <P> </P> <P>화폐란 기본적으로 상업행위를 통해 물물교환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BR>교환의 대상이 되는 물품을 등가의 화폐에 수량화시켜 적용하여 이를 대체하여 교환하는 행위죠 <BR>화폐 자체는 물질자체가 지닌 효용은 없으나 두가지를 통해 물질적 가치를 부여합니다 <BR></P> <P>1. 금,은 실제 귀중한 금속자원을 통해 화폐 자체의 귀위와 가치를 높이는 것<BR>2. 교환행위의 빈번함을 통해 보증하는 하는 타물품과 등가교환이 가능하다는 신용. <BR>즉 화폐는 활발한 교역을 전제로 하여 발전하는 매개체죠.</P> <P> </P> <P>개인적인 생각인데 동아시아의 상업이 퇴보한 이유는 <BR>이념, 사상적인 이유보다 보다 현실적인 교역이란 부분에 그 문제점이 있는게 아닐까요 </P> <P> </P> <P>한 발자국 나와 보다 큰 그림을 한번 그려 보는것은 어떤가합니다</P> <P>저는 동아시아 경제가 전환점을 맞은 것이 바로 명나라의 등장이 아닌가 합니다 </P> <P> </P> <P>기본적으로 조선의 건국화 함께한 당시의 중원국가 <BR>명나라는 정치적으로 보면 기존의 통일왕조와 좀 다른 성격의 국가였습니다.<BR>당제국의 등장이 이후 중국을 지배한 통일 왕조의 경우 스스로를 중화라 칭하고 <BR>주변국은 이런 문화적 우월성을 인정하며 자연스런 조공질서가 수립되었는데 </P> <P>당제국이 멸망한 이후 송나라를 거치며 약화된 중화질서는 <BR>급기야 원나라의 등장과 함께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이 오랑케에 의해 통일되는<BR>단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P> <P>즉 기존에 정치적,군사적,문화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중화라 칭하고 <BR>주변국의 조공질서를 요구한 이른바 조공외교 정치체가 소멸한 시기가 바로 원나라입니다.</P> <P> </P> <P>몽골제국의 경우 외교적으로 조공외교를 통해 패권을 확립한 것이 아니라 <BR>직접적으로 해당 국가를 멸하고 제국에 물리적으로 편입하였던 유목국가였으니 말이죠 <BR>이는 중국의 조공질서를 수용하고 이를 계승한 5호16국의 북조와도 구별되는 정치체였습니다</P> <P>몽골에 편입된 국가는 멸망하여 소멸하였고 그렇지 않고 저항에 성골한 나라는 이탈하였습니다 <BR></P> <P>대표적으로 일본, 베트남이 그러하고 고려를 생각해 봐도 그러합니다. <BR>원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한 조공질서 편입한 국가이자 부마국인 고려는 </P> <P>뒤늦게 원나라에 한지파가 등장하고 중국식의 조공질서를 인식하며 <BR>이른바 책봉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이 조차도 기존의 외교적 조공질서와 전혀 다른<BR>정말 혈연적 관계를 맺은 부마국으로 관계를 이어간것이 사례죠 </P> <P> </P> <P>바로 명나라는 이런 원나라의 뒤를 이어 <BR>이른바 한족에 의한 중화질서의 회복을 기치로 등장한 나라입니다</P> <P> </P> <P>동아시아에서 중화를 칭한 국가가 소멸하였던 시기를 지나 <BR>주변국 역시 이를 인정하지 않는 때에 새롭게 등장한 중원을 통일 왕조이죠<BR>명나라가 건국했을 때 고려가 요동정벌을 계획하며 명나라와 전쟁을 시도했으며<BR>심지어 조선이 건국했을 때도 조선의 재상 정도전도 요동정벌을 논하며 명나라와 전쟁을 시도했습니다. </P> <P> </P> <P>이런 외교적 위기에서 새롭게 등장한 중원의 제국 명나라가 <BR>당제국의 영광을 따라 주변국을 이런 조공질서를 제편하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P> <P> </P> <P>2가지 밖에 없죠. </P> <P>1. 당나라의 전례를 따라 군사적 원정을 통해 굴복을 받아내거나 <BR>2. 송나라의 전례를 따라 자신들이 가진 자원 문화,경제적를 통해 이를 받아내는 방법입니다.</P> <P>요동, 북원, 베트남으로의 군사적 원정이 그 첫번째 행동이었고 <BR>두번째가 바로 명나라의 쇄국 정책입니다.</P> <P> </P> <P>이런 것입니다. </P> <P>당나라와 송나라 모두 외국과의 무역을 통해 교류를 활발히 진행하였습니다.<BR>당나라를 육로인 실크로드를 따라 장안을 국제도시로 만들었으며 <BR>송나라는 해로인 남해를 중심으로 한 선박 무역을 통해 당나라 보다 더 확장된 국제교역을 이뤘죠</P> <P>이는 동아시아 지리의 80% 이상의 생산지대를 장악한 중국의 물산을교역을 통해 얻고자하는 <BR>주변국이 찾아가는 형국입니다 동아시아에서 5천년간 중국이 중화라는 경외를 받은것도 이런 경제적 힘을 배경으로 것이죠 </P> <P> </P> <P>명나라 쇄국정책의 <BR>본질은 바로 이런 이런 중국과의 교역이라는 주변국에 대한 경제적 수혜를 통제하는 정책입니다<BR> <BR>즉 조공질서를 재건하고자 하는 신생국가 명나라는 <BR>이런 중국과의 교역이라는 경제적 이익을 매개체로 </P> <P>명나라에 입조하여 새로운 조공질서에 편입하는 국가만에게 허락하여 <BR>강제적으로 명나라에 주변국을 편입시켜 나가는 일종의 외교수단이었던 것입니다.</P> <P>동아시아의 국제무역이라는 경제적 흐름이 과거 상인들간에 자유로운 무역과 이들을 통해 달성한 상업의 발전을 의미했다면 <BR>명대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무역이라는 개념은 강력한 정치적 압력으로 인하여 소멸하게 되고 <BR>대신 조공무역이라는 정치적 수단으로 퇴보하는 시기가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P> <P> </P> <P>명나라, 조선의 경우 농업생산력과 상업자본의 경우 <BR>기존의 당,송,원의 시대, 신라,고려 보다 더욱 발전하였고 </P> <P>특히 명나라 강회지역의 수공업의 경우 그 규모와 생산력면에서 </P> <P>당시 유럽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한 시기였기에 <BR>중국의 학자들 중에는 중국의 자본주의 맹아를 이곳에서 찾는 경우도있습니다.</P> <P>영국이 스페인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이후 자국의 천연자원과 신대륙의 자본을 바탕으로 <BR>세계사에서 최초로 산업혁명을 달성할 수 있었던 점을 생각해 보면<BR>그에 수십배의 여력을 가지고도 산업혁명을 이루지 못한 중국이 어찌보면 특이한 케이스죠</P> <P> </P> <P>이는 명나라 이후 발전한 생산력, 상업자본이 존재함에도 <BR>그것의 대상이 국내유통에 한정하고 국내자급자족에 한정한 산업이었다는 점에 <BR>그 한계가 있습니다. <BR></P> <P>유럽이 이 시기를 기점으로 공격적으로 그 대상을 신대륙과 전세계로 시장을 확장하며 교역을 통해 <BR>진취적인 발견을 이뤄냈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전을 이룬것과 대조적으로 <BR>동아시아의 경제발전이 갈려지는 지점이 이때가 아닌가 합니다. </P> <P> </P> <P>비단 명나라 뿐만이 아닙니다. </P> <P>1500년대 이후 국제간 교역이 조공질서를 통한 제한적인 무역 말고는 단절된 <BR>동아시아 국가들은 이런 파장의 여파로 과거 국제무역을 통한 물품의 공급이 아닌 <BR>주변국 자급자족 경제체제로 전환하게 된 것이죠. </P> <P> </P> <P>바로 조선이 그러합니다. <BR> </P> <P>반면 이런 자급자족이 불가능하였던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처한<BR>일본의 경우 왜구라는 해적의 형식으로 강제공급 시도가 나타났고 <BR>베트남의 경우 대중국이 아닌 또 다른 문명권인 동남아지역으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됩니다.</P> <P> </P> <P>오히려 일본의 경우 이런 변화된 국제환경에서 능동적으로 잘 대처한 케이스가 아닌가 합니다<BR>일본의 규슈지역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이 안되는 지역입니다</P> <P>동아시아 무역이 종말을 고한 고려말 원말 혼란기에 <BR>식량 수급이라는 생존의 목적을 위해 <BR>봉건영주들이 조직적으로 한반도를 왜구노략질을 한 사례나 </P> <P>이어 등장한 명의 건국과 함께 쇄국이 이어지며 <BR>일본 역시 외교적 입공을 청원하였으나<BR>통일된 정치체가 없음으로 예법이 아니난 이유로 입조를 거부당하자 <BR>중국남해를 노략칠한 남왜의 사건도 있었죠.</P> <P> </P> <P>동아시아의 두 중심 국가가 자급자족 경제를 통해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BR>조공무역이라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상호 제한적인 교역을한 것과 달리 </P> <P>오히려 여기에서 배제 당해 위기를 맞이했지만 일본은 <BR>나아가 유구를 기점으로 동아남아지역에 이르는 <BR>무역을 시도하였고 <BR></P> <P>마카오에 이르며 동아시아로 북상한 포르투칼인들 <BR>이어 네덜란드인들 영국인들과도 <BR>일본은 무역을 하며 교류의 길을 열었습니다. <BR>임진왜란 때 포르투칼제 조총을 이용한 것도 바로 일본이죠 </P> <P> </P> <P>18세기 영국상인이 와서 중국에 통상을 요구하자 <BR>중국은 이에 오만한 그들의 세계관을 유감없이 비추며 </P> <P>"천조국은 물산이 풍부하여 교역행위가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BR>가난한 영국오랑케가 가엾어서 천조국의 은혜를 받도록 약간의 무역을 허락한다" </P> <P>라며 조지3세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P> <P> </P> <P>동시대 일본은 영국인과 교역을 진행하며 이미 영어사전을 편찬하였고 <BR>일본 규슈의 나카사키항과 일본의 은무역 애덤스미스의 저서에도 언급되는 단계였습니다. </P> <P>과거 생존을 위해 왜구활동하고 동남아까지 나아갔던 규슈지역은</P> <P>이후 규슈최남단의 사스마번을 보듯 <BR>오히려 악조건에서 일궈낸 국제적 감각을 바탕으로 <BR>다양한 지식인을 배출하며<BR>규슈 사스마번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P> <P>일본에서 유명한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게 됩니다.</P> <P> </P> <P>다시 화폐경제로 돌아와 보면 이렇습니다. </P> <P> </P> <P>화폐의 유통이란 그 목적이 </P> <P> </P> <P>1. 물품화폐가 지닌 부피와 무게의 간소화 <BR>2. 활발한 유통경제에서 빠른 경제의 수단화입니다 </P> <P> </P> <P>첫번째의 사례는 중국을 보면 바로 알수 있죠<BR>중국의 경우 국제교역이 단절되었다 한들 <BR>거대한 내부시장의 존재로 인해 대운하를 따라 강남에서 강북을 오가는 <BR>자국의 생산유통을 위해서라도 화폐가 필요한 규모의 경제가 구축된 국가입니다</P> <P>공업,농업의 중심지인 강남에서 생산한 물품을 <BR>수천키로 떨어진 북경에서 결제하기 위해 수십만톤의 물품을 들고다는 것 보다 <BR>은화를 통해 결제하는 것이 효율적이죠 </P> <P> </P> <P>두번째의 사례는 일본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P> <P>중국과 한국의 경우 당제국 이후 율령체제를 수용한 이후 <BR>천년동안 중앙집권 국가를 통해 단일한 정치체가 단일한 지역을 일괄적으로 <BR>통치해온 반면 일본의 경우 미나모토가문의 멸망 이후 분권화된 각지역의 정치체가 <BR>상호간 투쟁을 하며 사실상 봉건적 분국의 시기를 거쳐온 국가입니다.<BR>나뉘어진 각 봉건영지들은 자급자족의 국가 단위가 아님으로 <BR>봉건영지와 봉건영지를 이어주는 상업을 통해 물품을 교역하는 유통경제가 필수요소입니다<BR>이런것이죠. 섬서성 지방에 기근이 들거나 황해도 지방에 기근이 들면<BR>중앙집권 국가에서는 국가의 주도로 이른바 구휼정책이란 이름으로 <BR>강제적인 타지역의 물품을 중앙의 관리가 이전함으로 국가에서 해결이 가능하지만 <BR>분권화된 지방정부체제에 지역에서는 이런 물품의 공급을 담당하는 수단은<BR>상업유통이 유일합니다. 상인의 존재가 각 봉건지역을 연결하는 매개체인 것이죠.</P> <P> </P> <P>조선의 경우 매우 특이한 케이스입니다<BR></P> <P>자체적으로 자급자족 경제가 가능한 국가인 동시에 </P> <P>중국과 국경을 마주한 친밀한 국가로 <BR>조공질서에 일찍 편입함으로 인하여 제한적인 교역도 하였던 국가입니다.</P> <P> </P> <P>기본적으로 이런 것이죠 </P> <P> </P> <P>자급자족 경제체제를 기반으로 정부가 개입한 조공무역에서 <BR>소수의 상인이 제한적으로 무역품을 교류하는 경제체제입니다 </P> <P>기본적으로 자급자족 경제를 추진하는 국가에서 <BR>화폐의 효용은 크게 떨어질수 밖에 없는게 아닌가 합니다</P> <P> </P> <P>중국처럼 각 지방과의 거리가 광범위한게 아니라 <BR>물품화폐의 물리적 이동이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P> <P>명대 이후 단절된 국제무역으로 인해 <BR>경제수단으로 화폐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BR></P> <P>오히려 화폐가 활발한 유통을 전제로 이것이 보증하는 경제수단임을 생각하면</P> <P>정치가 개입한 조공질서하의 조공무역이나 <BR>단절된 형태로 불규칙하게 조성되는 국경무역에서 <BR>화폐는 오히려 더욱 불안한 결제수단이 되는 것이죠<BR> <BR>이렇게 보면 어떨가 싶습니다</P> <P>한반도는 기본적으로 좁은 지역에서의 자급자족 경제체제임으로 <BR>내부적으로 화폐유통의 효용성이 절실하지 않았습니다 </P> <P> </P> <P>한반도의 상업발전은 역사적으로 내부가 아닌 외부의 동인에 영향을 많이 받아왔습니다<BR>신라,고려의 국제무역이 그러했고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BR>이른바 거상이라는 의상,송상들 조차 모두 대중국 무역을 통해 성장한 상인들입니다. </P> <P> </P> <P>하지만 이런 중요한 요소가 <BR>명나라의 등장과 함께 변화된 국제환경 속에서 사실상 강제적으로 소멸되었던게 이유가 아닐까요<BR></P> <P>더불어 조선은 이런 질서조차도 </P> <P>정치적으로 너무도 평화롭게 조공질서에 안착하게 됨에 따라 </P> <P>내부의 자급자족경제와 조공무역의 제한적 물품교역을 원만히 달성하였고 </P> <P> </P> <P>일본처럼 생존의 절심함도 없는 안정적이고 완만한 경제유지를 <BR>장장 500년을 지속하는 체제였습니다.</P> <P> </P> <P>이런 요인들 때문에 <BR>조선이 상업이 성장하지 못하였고 <BR>화폐경제 역시 정체된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P> <P>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