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게시판 |
베스트 |
|
유머 |
|
이야기 |
|
이슈 |
|
생활 |
|
취미 |
|
학술 |
|
방송연예 |
|
방송프로그램 |
|
디지털 |
|
스포츠 |
|
야구팀 |
|
게임1 |
|
게임2 |
|
기타 |
|
운영 |
|
임시게시판 |
|
5공화국 말기인 1986년 11월에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위를 취재하던 도중 사복경찰에게 집단구타를 당해 목뼈와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https://www.abendblatt.de/kultur-live/article106820668/Brisantes-aus-der-Keksdose.html
이 중상으로 인해 한국에서 그의 다큐를 볼 수 있을 즈음,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독일에서 1년간 병원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1995년 은퇴하고 독일에서 거주했다. 그는 광주에서의 기억을 평생 잊지 못했고, 자신이 한 취재 중 80년 5월의 광주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늘 말했다고 한다. 후술하겠지만 광주에 묻히고 싶다고까지 했으니 말 다했다.
2004년 지병인 심장 질환으로 일시적으로 생명이 위독했던 그가 사후 국립 5.18 묘역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밝혀 광주민주화운동 유족회 및 광주광역시 등 관련 단체들이 힌츠페터의 명예 시민증 부여와 5.18 묘역 안장을 추진했다. 당시 그는 심장 질환으로 병상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병세가 위중한 상태일 때도 꼭 자신을 광주에 안장해 달라고 수없이 되뇌일 정도였으며 그 자신은 물론 관련 단체들도 한결같이 그의 광주 망월동 안장을 원했다. 하지만 광주광역시청에서 외국인이 광주 시내의 국립/시립묘지에 안장되는 경우는 광주에서 사망한 이에 한한다는 시립묘지 관리 조례를 들며 "현재 조례상으로는 위르겐 힌츠페터를 시립 공설묘지에 매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네티즌들 사이에 공설묘지에 매장했으면 좋겠다는 여론이 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5.18 관련 단체와 수시로 연락을 취하면서 혼수상태에 빠진 위르겐 힌츠페터의 건강상태를 체크하고 있다"고 전하고 "오는 28일 시의회 임시회에서 시조례 개정을 전제로 사고가 생기면 바로 대처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결국 네티즌들은 명예시민증을 수여해서라도 그의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며 그의 망월동 안장을 허가해달라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45548
결국 시청 측에서도 법 개정을 통해 힌츠페터 사후 5.18 묘역에 안장이 가능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힌츠페터는 극적으로 건강을 회복한 이후 광주민주화운동 2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이때 그는 '광주에 묻히고 싶지만 가족들이 반대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며 모발과 손톱 등 신체의 일부를 5.18기념재단에 전달해 수장고에 보관했었다. 이후 회고록을 집필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펼쳤다. 한국방송기자협의회는 그에게 특별상을 수여하였다. 또한 광주의 참상을 전세계에 알린 공로로 송건호 언론상의 2회 수상자가 되었다. 현재까지 유일한 외국인 수상자이다.
2016년 1월 25일 독일에서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향년 78세. '광주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생전의 유언을 따라서 유해의 일부를 항아리에 담아서 그를 기리는 비석과 함께 5.18 구묘역 입구에 안치했다. 유족측에서 그의 시신을 한국으로 보내는 것은 힘들어서 그대신에 그의 모발과 손톱, 그리고 생전의 유품을 보내는걸로 대신하였다고 한다. 정식 안치 행사는 2016년 5.18 기념식 때 행해졌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제목은 '택시운전사'로 광주까지 힌츠페터를 택시로 태워 준 기사를 의미한다.
힌츠페터 씨는 당시 광주에 들어갈 때 함께한 택시운전사 김사복 씨(실명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를 다시 만나 그의 택시를 타고 새로워진 한국의 모습을 둘러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본인은 김사복 씨를 수소문했음에도 찾지 못하고 결국 영면에 들었다고한다.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