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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history_27365
    작성자 : 역사광황
    추천 : 2
    조회수 : 2666
    IP : 218.235.***.167
    댓글 : 1개
    등록시간 : 2017/01/07 21:36:44
    http://todayhumor.com/?history_27365 모바일
    백강 전투 (백촌강전투, 백강구전투) - 663년

    백강 전투(白江戰鬪)는 663년 백제 부흥군이 왜(倭)의 지원군과 함께 나당(羅唐) 연합군과 백강(白江)지금의 금강(錦江) 하구(동진강 설도 상당하다)에서 벌인 전투로서, 일본에서는 백촌강 전투(白村江戰鬪, 白村江の戦い), 중국에서는 백강구 전투(白江口戰鬪)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백강 전투가 있었던 백제 부흥 운동 부분을 서술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중의 하나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 멸망(660) 이후, 각지에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복신, 도침, 흑치상지 등은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나 · 당 연합군이 진압에 나서자 왜의 수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백강 입구까지 왔으나 패하여 쫓겨 갔다(백강 전투). 백제 부흥 군은 4년간 저항했지만, 결국 나 · 당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좌절되었다.


    663년 백제 부흥운동을 도와주려던 왜국의 참전과 '백강 전투'에 대한 국사 교과서의 기록은 단 한 줄로 처리되어 있다. 박노자 교수는 "약 4만 2000명의 왜인이 참전하고 1만여 명이 전사한, 고대사를 통틀어 왜국이 외부에서 당한 가장 큰 규모의 패배였는데 우리 국사 교과서는 이에 대해 침묵한다. '숙적' 왜국이 '침략'이 아닌 동맹국 백제에 대한 원조를 단행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통상적 일본관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삼국사기』의 기록도 매우 간략하다. 김부식을 비롯한 당대 역사가들은 백강 전투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교과서에 반영된 것인지 모른다. 백제부흥운동과 관련한 이때의 상황은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상세히 나와 있으며 일본이 적극적으로 백제부흥운동에 나서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다.(사실 백강 전투가 일본사 전개에 한 단락을 짓는 계기가 된다.)


    고대 한반도의 역사는 이처럼 일본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특히 가야, 백제에 대한 역사기록은 『삼국사기』,『삼국유사』같은 국내 역사책보다 『일본서기』등 일본 역사책에 더 많이 남아있다. 또 일본이 한반도 역사에 개입한 주요 사건은 백강 전투만이 아니다. 저 유명한 광개토왕비에도 '왜倭'가 중요한 전쟁 상대로 선명히 적혀있고,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왜倭'가 수없이 등장한다.


    노태돈은 백강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강구 전투의 의의를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판가름하는 결정적 회전이었다고 보는 시각은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다. 즉 이 전투의 주력이 당군과 왜군이었음을 강하게 의식하여, 마치 임진왜란이나 청일전쟁과 대비하여 고대 중국세력과 일본 세력이 한반도에서 자웅을 겨룬 전투인 것처럼 인식하려는 것은 전투의 실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물론 이 전투는 백제 부흥전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를 고비로 왜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완전 물러나게 되니 고대 한일관계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백강 전투는 당에게 별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투는 아니었으며 신라에도 주된 전장은 아니었다. 전투 규모도 양측 모두 실제 동원한 병력이 만 수천 명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정도였다. 무엇보다 백강구 전투에 관한 과도한 강조는 그 해에 벌어진 백제 부흥전쟁의 주전장이 주류성 공략전이었음과 신라군의 존재를 홀시하게 하고, 신라는 피동적 존재로 파악하는 역사인식을 낳게 하는 면이 있다. 이는 백강구 전투의 실상이나 그 뒤의 역사 전개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김현구는 ‘백강 전투는 당시 가장 많은 국가와 군사가 참전해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동북아 최초의 대전이었다’고 평했다.


    수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김용운 전 한양대 교수는 『풍수화(風水火)-원형사관(原型史觀)으로 본 한중일 갈등의 돌파구』라는 책에서 663년 백강(白江·지금의 금강 하구)에서 신라-당(唐) 연합군과 백제-왜(倭) 연합군이 맞붙은 ‘백강 전투’가 오늘날 한중일 관계의 틀을 만든 핵심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풍수화’는 주변국을 흡수하는 중국은 물(水)로, 섬에서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 일본은 불(火)로, 그 원형을 파악하고 바람의 원형을 지닌 한국을 풍(風)에 빗댄 표현이다.


    일본 고고학회 회장을 지낸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규슈대 명예교수는 “백제 멸망과 유민의 대규모 이주는 일본 역사를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됐다”며 “백강 전투를 치른 7년 뒤인 670년에 왜는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새롭게 태어난다”고 전했다.


    일본 방위대防衛大 총장을 지낸 이오키베 마코토 전 고베대 교수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을 2차대전에서의 패배와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 그리고 왜군이 나 · 당 연합군에 참패한 663년의 백강 전투에 비겼다. 역사상 일본의 큰 위기 중 하나로 '백강 전투'를 꼽은 것이다.

    660년 당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듬해 평양을 포위하자 왜국은 극도의 위기의식에 휩싸인다.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면 다음은 왜국이라 생각했다. 당시 당 수군 전력에 혁명이 있었다. 수로가 닿는 곳이라면 적국의 수도가 어디라도 기습 포위할 수 있을 정도였다.


    7세기 중반, 고구려(642년, 연개소문) · 백제(641년, 의자왕) · 일본(645년, 덴지 천황) · 신라(647년, 김춘추·김유신)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쿠데타가 있었는데, 이 총결산이 663년의 백강 전투라고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백강 전투는 당나라, 고구려, 백제, 신라, 일본, 당시 알려져 있는 동아시아의 모든 세력이 참여한 싸움이다.


    일본의 참전 배경으로 한국에서는 백제가 일본의 조국이므로 조국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나타나고, 일본에서는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었으므로 속국을 구원하기 위해서 출병했다는 식으로 분석하고 있다. 사실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에서 일본이 바라보는 시각은 백제를 일본의 속국 내지 조공국으로 보는 것이 대세라 한다. 이러한 시각은 『일본서기』가 논리를 제공했으며 칠지도, 광개토대왕 비문, 『송서』<왜국전> 등의 사료가 이를 바쳐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동사강목』의 예처럼 일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의자왕의 뒤를 이은 풍왕을 백제 마지막 왕(32대)으로 보았고, 백강 전투가 있던 663년 9월까지 백제사에 포함시킨 바 있다. 일본의 역사가들 일부도 백제의 멸망 연대를 백강 전투로 보고 있다.


    '백강구 전투' 또는 '백촌강 전투'라고도 하는 '백강 전투'의 역사적 비중이나 의의에 대한 학자의 태도는 다양하다. 일본에게 더욱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이 전투의 성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과 일본의 군대가 충돌하여 전쟁을 벌인 전투

    ◎ 백제 부흥운동이 사실상 끝나, 신라의 삼국통일 계기를 마련하였다.

    ◎ 많은 백제 유민들이 일본으로 망명

    ◎ 고대 일본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된다.

    ◎ 이후 일본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인 이른바 율령체제를 형성하였다.

    ◎ 일본이라는 국호의 성립

    ◎ 일본의 대외 관계는 폐쇄적이면서 자위적인 방향으로 전환된다.

    ◎ 일본은 대륙으로의 출병이 백해무익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 일본 입장에서는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이 왜국을 크게 위협할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다.


    당시의 세계사 연표는 :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663

    * 삼국통일전쟁 : http://yellow.kr/mhistory1.jsp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보았다.

    http://yellow.kr/blog/?p=1641



    자료 중의 하나로 아래에 소개한 『일본서기』는 720년에 완성되었으며 <동북아 역사재단>의 번역본을 참조하였다.




    ※ 일본서기 권 제27 - 천지천황 2년(663년)

    2년 봄 2월 을유삭 병술(2일)에 백제가 달솔 김수(金受)들을 보내 조(調)를 올렸다. 신라인이 백제 남부의 사주(四州)를 불태우고1, 아울러 안덕(安德) 등의 요지를 빼앗았다. 피성(避城)은 적에게 너무 가까워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으므로, 도로 주유로 돌아갔다. 전래진이 생각한 바와 같다.


    이 달에 좌평 복신이 당의 포로 속수언(續守言) 등을 바쳤다.


    3월에 전장군 상모야군치자(上毛野君稚子 ; 카미츠케노노키미와카코)와 간인련대개(間人連大蓋 ; 하시히토노무라지오호후타), 중장군(中將軍) 거세신전신역어(巨勢神前臣驛語 ; 코세노카무사키노오미오사)와 삼륜군근마려(三輪君根麻呂 ; 미와노키미네마로), 후군 장군 아배인전신비라부(阿倍引田臣比邏夫)와 대택신겸병(大宅臣鎌柄 ; 오호야케노오미카마츠카)을 보내 2만 7천 인을 거느리고 신라를 치게 하였다2.


    여름 5월 계축삭(1일)에 견상군(犬上君 ; 이누카미노키미)[이름이 빠졌다.]이 달려가, 출병한 사실을 고구려에 고하고 돌아왔다3. 그리고 규해(糺解)4를 석성(石城)에서 만났다. 규해는 복신(福信)의 죄를 말하였다.


    6월에 전군(前軍) 장군 상모야군치자(上毛野君稚子) 등이 신라의 사비(沙鼻), 기노강(岐奴江)5 두 성을 빼앗았다. 백제왕(百濟王) 풍장은 복신이 모반할 생각이 있다고 의심하고, 손바닥을 뚫어 가죽으로 묶었다. 그러나 혼자서 결정하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복신의 죄는 이와 같은데, 참수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때 달솔 덕집득(德執得)이 "이 극악한 사람을 방면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복신은 집득에게 침을 뱉고, "썩은 개, 미치ㄴ 놈"이라고 말하였다. 왕은 힘센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참수하여 그 머리로 젓을 담갔다6.


    가을 8월 임오삭 갑오(13일)에 백제왕이 자기의 훌륭한 장수를 죽였으므로, 신라는 곧바로 백제로 쳐들어가 먼저 주유를 빼앗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백제왕이 적의 계략을 알고 장군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들으니 대일본국(大日本國)의 구원군 장수 노원군신(盧原君臣 ; 이호하라노기미오미)이 건아(健兒)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오고 있다. 장군들은 미리 준비하도록 하라. 나는 백촌(白村)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접대하리라."라고 말하였다.


    무술(17일)에 적장(賊將)이 주유에 이르러 그 왕성을 에워쌌다. 대당(大唐)의 장군이 전선(戰船)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白村江)에 진을 쳤다.


    무신(27일)에 일본의 수군 중 처음에 온 사람들이 대당(大唐)의 수군과 싸웠다. 그러나 일본이 져서 물러났다. 대당은 진열을 굳게하여 지켰다.


    기유(28일)에 일본의 장군들과 백제왕이 기상을 살피지 않고, "우리가 선수를 친다면 저쪽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대오가 흔들린 일본 중군(中軍)의 병졸을 이끌고 다시 나아가 진열을 굳건히 하고 있는 대당의 군사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대당이 곧 좌우에서 배를 둘러싸고 싸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관군(官軍)이 패배하였다. 이때 물속으로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또한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가 없었다. 박시전래진은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고 이를 갈며 분노하면서 수십 인을 죽이고 마침내 전사하였다. 이때 백제왕 풍장은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도망갔다7.


    9월 신해삭 정사(7일)에 백제의 주유성(州柔城)이 마침내 당에 항복하였다8. 이때 국인(國人)들이 "주유가 항복하였다. 사태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이제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테례성(弖禮城 ; 테레사시)9에 가서 일본 장군들과 만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하자."고 말하였다. 그리고 먼저 침복기성(枕服岐城)10에 가 있던 처와 아이들에게 나라를 떠나가려 한다는 마음을 알렸다. 신유(11일)에 모테(牟弖)를 출발하였다. 계해(13일)에 테례(弖禮)에 이르렀다. 갑술(24일)에 일본의 수군 및 좌평 여자신(余自信), 달솔 목소귀자(木素貴子), 곡나진수(谷那晋首), 억례복류(憶禮福留)와 국민(國民)들이 테례성(弖禮城)에 이르렀다. 이튿날에 비로소 배가 출항하여 일본으로 향하였다.


    - 1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3년(663) 2월조에 흠순과 천존이 병사를 이끌고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7백여 명을 참수하였으며, 거물성,사평성,덕안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고 했는데, 백제 남부의 4주는 바로 이 네 성을 가리킨다고 보는 설이 있다. 거열성은 경상남도 거창, 거물성은 전남 남원 부근이다. 안덕은 덕안의 오기로 보고, 덕안은 백제의 5방 중의 하나인 東方의 치소가 있었던, 충남 恩津으로 추정한다. 한편 '百濟南畔四州'를 '百濟南 畔四州'의 오기로 보고, 이를 웅진도독부 관할하의 7주 중의 하나로 보아 영광과 함평, 고창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2 : 백제부흥운동을 도운 왜국군은 지방 호족들이 동원한 國造軍의 집합체였다. 국조군은 국조의 일족과 그 지배하의 민중과 노비로 구성되었다.

    - 3 : 백제 부흥군은 석 달 뒤 백촌강 전투로 이어지는 왜군의 참전과 관련된 군사적 협의를 고구려와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 4 : 풍장(豊璋)을 가리킨다.

    - 5 : 사비는 경남 양산, 기노강은 경남 의령으로 추정된다.

    - 6 : 『구당서』 백제전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즉 복신이 병권을 독점하여 부여풍과 점차 시기하고 갈라지게 되었다. 복신은 병을 칭하고 동굴의 방에 누워서 장차 부여풍이 병문안을 오면 공격하여 죽이려고 꾸몄는데, 부여풍이 이를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가서 복신을 공격하여 죽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이 기록이 가장 자세하다.

    - 7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왕 부여풍이 탈주하였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혹은 고구려로 도망갔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구당서』 유인궤전에서는 "여풍은 북에 있고 여용은 남에 있다."고 적고 있다. 여용은 禪廣을 가리키며, 남에 있다는 것은 왜국에 있다는 뜻이다. 『자치통감』 고종 총장원년 12월 정미조에 의하면 부여풍은 668년 10월 이적(李勣) 고구려를 공격할 때에 포로로 잡혀 당으로 끌려가서 12월 嶺南에 유배되었다.

    - 8 : 『자치통감』 唐紀에서는 주유성(周留城)이 항복한 날을 9월 무오(8일)라고 하였다. 『일본서기』에서 백제부흥운동 기사는 이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신당서』, 『자치통감』에 의하면 이후 신라군과 당군은 지수신이 지휘하고 있던 임존성의 백제부흥운동군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당에 투항한 사택상여와 흑치상지를 이용하여 이 해 11월경 임존성을 함락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64년 3월에 사비산성의 백제부흥운동군이 당군과 신라군에 의해 진압되었다고 하는데, 이로써 백제부흥운동은 끝나게 되었다.

    - 9 : 이를 冬老縣(전남 보성군 烏城)이라는 설과 경남 남해로 보는 설이 있다.

    - 10 : 현재 전남 강진지역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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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1/14 15:59:48  211.117.***.94  눈거울  725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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