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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 핑거
쇠구슬이 공중으로 솟아 오르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풍원은 기를 집중시키는 듯한 연기를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땀까지 흘렸다. 손바닥 위의 쇠구슬을 공중으로 띄우는 마술, 이걸 해내기 위해 그는 팔 속에 자석까지 심었다. 그 탓에 그의 팔은 외관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다시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힘든 결정이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술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수준이 계속해서 높아져가므로, 어지간한 걸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사실 쇠구슬을 띄운다는 것도 이것도 얼마나 허접한 마술인지 모른다. 관객들이 탄성을 내지르는 것도 순전히 조명과 음향이 분위기를 고조시켜준 덕분이다. (소극장이지만 조명과 음향이 제법 역할을 해주고 있다.) 하긴, 요새 관객들을 감동시키려면 쇠구슬이 아니라 관객 자체를 띄우는 것 정도는 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음은 카드마술이었다. 이풍원은 관객으로 하여금 한 가지 카드를 떠올리게 한 다음 카드를 마구 뒤섞었다. 잠시 후, 자신의 핸드백에서 다이아몬드 잭을 발견한 관객이 앗! 하고 소리를 지른다. 이런. 고작 앗! 이라니…이풍원은 애써 실망감을 감췄다. 꺄아악도 아니고 크아아아악도 아니고 앗! 이라니, 무려 세 달을 연습했단 말이다… 이풍원은 체념하고 과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관객들에게 박수를 유도했다.
그 다음은 불을 이용한 마술이었다. 스태프가 미리 준비해둔 얼음덩이를 무대 한 가운데로 가지고 나왔다. 얼음덩어리 안에는 캔맥주가 하나 들어 있었다. 이 시원한 맥주 드시고 싶으신 분! 이풍원이 관객석을 향해 외치자, 몇 몇 관객이 손을 흔들었다. 손만 들지 말고 저요! 라든가 무슨 말을 좀 하란 말이다… 지난 주 공연 때는 어떤 관객이 “제 가방에 오징어 땅콩이 있어요! 맥주 저한테 주세요!”라고 해서 제법 분위기가 활기차졌다. 오늘 공연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이풍진은 얼음덩어리를 망치로 깨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얼음은 당연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라이터를 꺼냈다. 하지만 축구공만한 얼음이 고작 라이터 불에 반응을 보일 리 없었다. 그는 훨씬 더 강력한 열기가 필요하다는 제스처를 취한 뒤, 소매를 걷고 기를 집중시키는 연기를 했다. 잠시 후, 그의 검지손가락에서 화르르 소리를 내며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무대 전반을 비추던 카메라가 줌인하여 그의 손을 비추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손에는 아무런 장치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강력한 불길에 얼음은 빠른 속도로 녹았고, 이풍원은 캔맥주를 꺼내 의기양양하게 관객에게 전해주었다. 별다른 트릭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손을 점검해보게 만드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이풍원이 초능력을 얻은 것은 열세 살 때의 일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난 뒤, 그는 그날도 집 앞 놀이터에 앉아 있었다. 집에 가봤자 딱히 할 일이 없어서였지만, 놀이터라고 뭐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공상에 잠겼다. 얼마전에 본 히어로 영화가 생각났다. 나도 영화 속 히어로들처럼 하늘을 날 수 있다면,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불을 내뿜을 수 있다면…!
이풍원의 부모는 시장에서 일을 했다. 나물도매상은 이풍원의 외할머니가 하던 일이었다. 전자회사에 다니던 아버지가 IMF이후 갈 곳을 잃어, 결국 장모가 소일거리로 하던 장사일을 물려 받은 것이었다. 장사는 시원치 않았다. 입에 풀칠은 했지만, 살림은 넉넉해질 기미가 없었다. 또, 시장은 매년 눈에 띄게 활기를 잃어갔다. 이풍원의 부모도 같은 속도로 활기를 잃어갔지만 가게를 그만 둘 수 는 없었다. 그만두고 무엇을 한단 말이냐. 게다가 도매업은 밤손님이 대부분이었다. 이풍원은 집에 가서 컵라면을 끓여 먹고, 티브이를 보다가 마지못해 한다는 듯이 숙제를 대강 해놓고 잤고, 아침이면 피곤한 얼굴로 티브이를 보는 아버지와 조금이라도 더 자기 위해 안대를 하고 누워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뒤로하고 학교에 갔다.
어느날, 케이블 티브에서 히어로 영화를 방영했다. 음속의 속도로 거리를 달리는 사람,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는 사람,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나는 사람… 다양한 초능력자들이 악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였다. 이풍원은 그 영화에 푹 빠져버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내게 초능력만 주어진다면, 돈도 벌고 세상에 좋은 일도 할 수 있을텐데…
그 뒤로 며칠, 이풍원은 놀이터에서 기를 운용하는 연습을 했다. 몸 속에 흐르는 기를 콘트롤하는 것에 대해서는 만화책에서 자주 보았던 것이었다. 그는 일단 손끝에 정신과 힘을 모으고, 거기서 무엇이든 발사되기를 기다렸다. 정말 초능력이란 게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풍원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그래, 나는 옛날부터 남들과는 좀 달랐어. 삼학년 때는 귀신을 본 적도 있었지. 게다가 일주일치 날씨를 미리 맞혀 엄마를 놀라게 한 적도 있었고 말이야. 그러니까 초능력이 발현될 수도 있어… 그는 기마자세를 하고 왼손을 허리춤에 붙인 채, 오른팔을 뻗어 중지 끝에 힘을 잔뜩 집중 시켰다. 혹시 레이저라도 나갈지 모르니, 빈 깡통을 열 발자국 거리에 세워둔 참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풍원은 손 끝에 뜨거운 기운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손끝에서 작은 불꽃이 일기 시작한 것은 해가 완전히 지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
다음날부터 이풍원은 공부에 소원해졌다. 공부 같은 것보다 훨씬 신나고 두근대는 일이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손에서 불이 나가다니, 이게 무슨 일이람! 나는 대체 어떻게 되려나, 혹시 특수요원 같은 게 되는 될까? 아니면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게 될까? 그는 혼자 있을 때면 반드시 불을 컨트롤 하는 연습을 했고,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공상에 잠겼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어디서든 사람들이 와서 나를 데려갈거야. 나 같은 초능력자를 국가에서 그냥 내버려둘 리 없으니까.
몇 번은 영웅행세를 하기도 했다. 동네 골목에서 코 묻은 돈을 갈취 중인 불량배들을 혼내준다든가 하는 일이었다. 불량배들은 체구가 작은 이풍원을 발길질로 쫓아내려고 했으나, 그가 손에서 불을 뿜자 줄행랑을 쳤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그는 거의 울뻔했다. 정말 길고도 지루한 시간이었다. 이제 이 교문을 나서면 검은색 승용차들이 서 있겠지. 선글라스를 낀 사람이 내려서 내게 “같이 가자”고 말하겠지. 나를 찾아온 남자는 어쩌면 왜꾸일지도 몰라. 그는 과거에 봤던 또 다른 히어로 영화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하지만 놀라는 기색을 보여서는 안되겠지… 암, 안되고 말고. 그러나 그의 굳은 다짐에도 불구하고 왜꾸눈을 한 조직사람은 오지 않았다. 왜꾸눈뿐만 아니라, 교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봄이 지나도록 아무도 찾아오지 않자 이풍원은 군대에 갔다. 그는 군대 같은 곳이라면 이미 정보력을 통해 자신의 초능력을 간파해뒀을 것이라고 여겼다. 5주간의 훈련이 끝날 무렵, 그는 이번에야말로 높은 사람이 와서 자신을 데려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후방의 예비군 교육대대로 전입되었고, 거기서 예비군 교육을 담당했다. 예비군들은 전투모를 거꾸로 쓰고 칼빈 소총을 끌고 다녔다. 선배님, 이동해주십시오. 라고 말하면 예비군은 “어이 이 일병, 너 섹스는 해봤냐?”고 물었다. 이풍원 일병은 그들을 숯검댕이로 만들어버릴까 했으나, 그랬다가는 초능력 부대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참았다.
왜 오늘따라 옛 생각이 이렇게 나는 것일까. 이풍원은 비를 맞으며 생각했다. 그는 마술도구들을 더플백에 쑤셔 넣고 극장을 나온 참이었다. 더플백은 극장에 그대로 두었다. 어차피 다음주말 공연까지 극장을 쓰는 사람도 없다. 이곳 소극장도 곧 문을 닫을 계획이었다. 따라서 이풍원의 마술쇼도 다음주가 끝이었다. 시장에 계실 부모님 생각이 났지만, 이풍원은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냈다. 오늘은 앨리샤를 만나기로 했다. 앨리샤는 지난번 관객으로 왔던 여대생으로, 이풍원의 공연이 끝나고 무대 위로 인사를 와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대화를 나눠보니 그녀는 이풍원의 마술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 대학로에서 공연을 하는 사람들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한번은 연극을 보고 난 뒤 주연배우에게 반해 그를 쫓아다니기도 했다고 한 바 있었다. 앨리샤는 오늘 이풍원에게 칵테일을 마시러 가자고 청한 참이었고, 딱히 다른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으므로 이풍원은 그러마고 했다.
앨리샤는 말이 많았다. 이풍원에게 호감이 있어서라기보다, 스트레스를 푸는 것처럼만 보였다. 그녀는 더군다나 친구까지 불렀다. 그들은 이풍원에게 딱히 관심을 보이지도 않으면서, 칵테일 더 시켜도 돼요? 라는 말만 자꾸 물어왔다. 너네가 마실 건데 내게 허락을 구하는 건 뭐냐. 돈은 처음부터 내가 내도록 되어 있었던 건가. 이풍원은 딱히 흥이 나지도, 그렇다고 짜증이 나지도 않았으나 몹시 무료하여 독주를 시켰다. 목이 화끈해지는 데낄라를 네 잔이나 연거푸 마시자 취기가 밀려왔다. 그때 바텐더가 서비스로 술을 내왔다. 자그만 위스키 잔에 불을 붙인 독주였다. 앨리샤와 그녀의 친구는 사진을 찍겠다며 요란을 떨었다. 잠시 후 불이 꺼지자 바텐더는 이제 술을 마시라고 했으나 앨리샤는 사진을 제대로 못 찍었다며 울상을 지었다. 이에 이풍원은 곧바로 손에서 불을 뿜어 칵테일에 다시 불을 붙여 주었다. 그러자 앨리샤는 박수를 치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풍원은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밤이라고 생각하면서, 남은 독주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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