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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마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먼 과거의 일이다.
대뜸 일본어 공부를 하겠다며 호들갑을 떨고 다니던 어린 손녀의 얘기를
할아버지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셨나 보다.
해남에서 서울로, 젊은 사람도 힘에 부쳐 하는 그 먼 길을
할아버지는 당신이 젊은 시절 손 때 묻혀 공부하셨던 일본어 책을 두 손 가득 들고 오셨다.
뿌듯해 하시며 그 책을 나에게 보여 주시던 표정은 아직까지도 눈에 선하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분명 흰 색 이었을 종이는 다 헤져 누렇게 변해 있었고,
맞춤법 개정 이전에 출판된 책이라 ‘습니다’도 ‘읍니다’로 표기되어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사춘기 소녀가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공부할만한 책과는 거리가 참 멀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할아버지의 때가 탄 그 책들이 퍽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나를 위해 그 무거운 책들을 이고 먼 길을 오신 할아버지의 사랑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할아버지도 나처럼 일본어 공부를 했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젊은 날의 할아버지를 공유한 것 같아 설레고 즐거웠던 것 일까.
그때 일을 떠올릴 때 면, 손녀가 신나서 책을 받아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방금 전의 일 인양 아직도 선명하다.
지금은 곁에 없는 당신이기에
딱, 그 선명함의 크기만큼 마음이 아려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할아버지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결과만 놓고 보자면 할아버지가 가져다 준 그 책은 내가 일본어를 공부하는 데에 전혀,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맞춤법 개정 이전의 문장들은 도저히 내용에 집중 할 수 없게 하였고,
습기와 곰팡이 냄새에 찌들대로 찌들어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을 주었다.
그 책은 한참을 책장 한 칸에 자리 잡고 있다가 어느새 책장 가장 아래 칸으로 밀려났고,
결국은 재활용 폐지 신세가 되었다.
그때 책들을 정리하면서 뭔가 아쉬운 마음에 전부 다 버리지는 않고 딱 한권을 남겨 놓았었는데,
얼마 전 방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그 책을 발견하였다.
준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십년이 훌쩍 지나버린 나의 옛 추억을 갑자기 마주한다는 것이
반갑기보다는 참으로 속상하고 먹먹한 일이구나 알게 되었다.
당신은 젊은 시절 공부하던 그 책을 무슨 이유로 고이 간직하고 계셨을까.
손녀가 일본어 공부를 하겠다고 하는 얘기를 들으셨을 때 바로 그 책을 떠올리셨을까.
서울까지 오는 그 먼 길을, 본인 몸 하나 오기도 힘든 그 길을 오면서
두 손 가득 무거운 책들을 어떤 마음으로 들고 오셨던 걸까.
누렇게 변한 책을 받아들고 신나하는 손녀를 보며 할아버지는 무슨 기분이셨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먼지로 거뭇해진 손을 보면서도 책을 계속 쓰다듬는다.
마치 그것이 지금은 만질 수 없는 할아버지의 손등인양.
그 당시보다 더 쾌쾌해진 곰팡이냄새가 추억의 짠 냄새로 내 안에 들어온다.
출처 | 할아버지 보고싶어요. 왜 요즘에는 내 꿈에 밥먹으러 안 놀러오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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