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ng>▲ 아버지 박 전 대통령 죽음 뒤<br>인간에 대한 ‘불신’ 각인<br>개인적인 트라우마를<br>공적 영역인 정치에 투영<br>국가·국민에 ‘왜곡된 결과’<br><br></strong>박근혜 대통령은 1974년부터 1993년까지 쓴 일기를 발췌해 1998년 <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삼아>라는 책을 냈다. 1979년 10월26일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흉탄에 보내고 그 한을 가슴 한편에 한 땀 한 땀 새겨놓은 기록들이다. 박정희 정권의 ‘공주’에서 ‘은둔자’로 보낸 폭풍 같은 20년의 시간과 생각들이 그 속에 담겨 있다.<br><br>박 대통령은 열두 살 때 청와대에 들어가 18년간 ‘대통령의 영애(令愛)’로 살았다. 5년간 퍼스트레이디 역할까지 했다. 박 대통령은 “아버지는 훌륭한 선생님이고, 나는 착실한 학생이었다”(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고 했다. ‘대통령의 딸’은 박 대통령 개인의 삶은 물론, 인격과 정치관·세계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조건이다. ‘박근혜식 통치 스타일’을 읽는 코드도 여기서부터 시작된다.<br><br><div class="article_photo_center" style="width:608px;"><div class="article_photo"><img hspace="1" vspace="1" src="http://img.khan.co.kr/news/2015/07/03/l_2015070401000627500048741.jpg" width="600" alt=""></div> <div><iframe height="50" src="http://p.lumieyes.com/frm2_dv.asp?domain=news.khan.co.kr&q=&refer=http%3A//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3Fartid%3D201507032259475%26code%3D910203&cate=null&pidx=7&aeidx=30" frameborder="0" width="600" scrolling="no"></iframe></div></div><br><b>#장면 1. “드물게 사심(私心)이 없는 분” </b><br><br>박 대통령은 지난 1월12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경질 여론이 높던 김기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을 이 한마디로 옹호했다. 아버지 때부터 따라붙어온 ‘배신 트라우마’가 상징적으로 표출된 장면이다.<br><br>박 대통령이 사람을 쓸 때 신뢰를 가장 중시하는 게 배신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이후 자신을 배신한 주변 사람들로 인해 인간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는 내용은 자서전에도 등장한다.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을 통해 사람의 욕망과 권력에 대한 집착을 똑똑히 보았다”고 한다. <br><br><div class="article_photo_center" style="width:608px;"><div class="article_photo"><img hspace="1" vspace="1" src="http://img.khan.co.kr/news/2015/07/03/l_2015070401000627500048744.jpg" width="600" alt=""></div></div><br><b>#장면 2. “자기 정치적 논리에 이용”</b><br><br>박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를 ‘찍어내기’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유는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정치’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인식에선 ‘사심’에 대한 거부감이 짙게 배어나온다. ‘자기 정치=사심=배신의 정치’로 이어지는 인식 회로다. <br><br>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 대통령 측 한 인사는 “박 후보를 해석하는 코드는 ‘역린’이다. 역린을 건드리면 그날로 아웃”이라고 말했다.<br><br>박 대통령이 2인자를 두지 않는 것도 아버지로부터 배운 용인술과 배신 트라우마가 작용한 것이란 분석이 많다. <br><br>박 전 대통령은 1971년 공화당 ‘실세 4인방’이 주도한 ‘10·2 항명 파동’을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철저히 진압했다. 권력에 도전하는 2인자는 싹을 잘라낸 것이다. ‘유승민 찍어내기’도 이와 닿아 있다는 것이다. <br><br>박 대통령이 당이나 청와대 쇄신 요구에 대해 늑장·모르쇠 대응으로 일관한 것도 이런 요구들을 사심이 담긴 권력투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풀이도 있다.<br><br><div class="article_photo_center" style="width:608px;"><div class="article_photo"><img hspace="1" vspace="1" src="http://img.khan.co.kr/news/2015/07/03/l_2015070401000627500048743.jpg" width="600" alt=""></div></div><br><b>#장면 3. “당사자에겐 감옥이 될 수도”</b><br><br>박 대통령은 18년간 청와대에서 생활했다. 청와대를 떠나선 1998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 당선까지 18년 동안 정치적 은둔기를 보냈다. “‘대통령의 딸’이란 남들 눈에 공주처럼 보이겠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감옥이 될 수도 있는 일”(자서전)이라고도 했다.<br><br>18년간의 ‘감옥’ 생활, 그리고 청와대를 쫓겨나듯 떠난 뒤 “세상의 외면 속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 같았던 또 다른 18년. 인간의 반생(半生)에 해당하는 이 기간이 박 대통령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해 보인다. <br><br>박 대통령이 일반 정서와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일 때가 왕왕 있는 원인을 여기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br><br>박 대통령에겐 의원 시절부터 공감 능력과 소통 부재에 대한 지적이 잇따랐다. 대선 후보 시절 ‘발신번호표시 제한’으로 전화를 하곤 했다는 증언은 세상과 자신 사이에 벽을 두는 ‘신비주의’의 상징처럼 회자되곤 한다. <br><br>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한 새누리당 의원은 “뜻을 같이한다는 게 서로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하고 때론 싸우고, 때론 동의하고 그런 거 아니냐. 그런데 박 후보는 그런 게 없다”고 했다.<br><br><div class="article_photo_center" style="width:608px;"><div class="article_photo"><img hspace="1" vspace="1" src="http://img.khan.co.kr/news/2015/07/03/l_2015070401000627500048742.jpg" width="600" alt=""></div></div> <div> </div> <div><strong>#장면 4. 다시, 아버지 집권기의 추억</strong><br></div> <div>박 대통령은 1998년 초선 국회의원에 당선되자마자 비서실장을 두기도 했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이다.<br><br>지난 대선 캠프 인사들은 당시 박 대통령이 인혁당 사건과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해 일반 여론과는 어긋나는 대응을 했던 일을 입에 올린다. 박 대통령이 아버지 집권기 때의 인식 수준에 좌우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여옥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은 “박근혜에게 대한민국은 우리 아버지가 만든 ‘나의 나라’, 이 나라 국민은 아버지가 긍휼히 여긴 ‘나의 국민’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바로 ‘가업’이었다”(<i 전여옥>)고 주장했다.<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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