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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보다 더 오래 기억되는 것이 있다. 너와 함께 했던 날들, 너와 함께 나누었던 사랑과 너와 얽혔던 대화, 그리고 너의 입술. 아니.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영원할 것 같았지만 어느새 시간 속에 닳고 닳아버린다. 기억은 흐려지고 사랑은 얼어붙었다. 대화는 왜곡되고 감촉은 사라진다. 단 하나. 너의 향기 빼고는.
웃긴 일이지. 너는 아침 풀 향기를 담고 있었다. 그저 지나갔을 향기였을 건데 너로 인해 나는 아침마다 널 보게 되다니.
“오늘은 옷을 단단히 입으셔야겠습니다. 아직 비구름이-”
다행이 오늘은 너의 향기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 싱그러운 여름은 가고 메마른 가을도 다 저문 11월의 늦은 가을비가 내린다. 이른 아침의 너와 너의 향기도 계절의 흘러감과 떨어지는 빗소리에 쓸려나간다. 그리고 난 거기에 인사하진 않겠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빈 거실에 인사하고 밖으로 나온다. 후두둑 쏟아지는 비가 제법 매섭다. 늦가을의 비는 차가웠고 내 마음도 따라 식어갔다. 우습게도 허전함은 무언가로 채워져간다.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텅 빈 자리가 차오르는 느낌은 분명 좋은 것이다.
“안녕하세요.”
사무실에 도착하니 J씨가 인사한다. 나도 인사한다. 그러면서도 내 표정이 어딘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녀는 내 어색함을 모르는 듯 이런저런 가벼운 일상을 이야기한다. 어느 것은 적당히 웃어주고 어떤 것은 적당히 대꾸한다. 적당히 또 적당히.
내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한다. 매번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감과 함께 지금껏 이어온 관성으로 일한다. 어쩌면 내 삶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살아온 대로 살아가는 삶. 관성에 의해 살아가는 삶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떠올랐다. 너와 함께 한 시간도 관성이 아니었을까?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그 시간들을 내 스스로 부정하는 것 같아서 침울해진다. 그럴 필요는 없지. 아직도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너는 오늘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산을 챙겼으려나? 옷은 따뜻하게 입었을까? 아니면.......
어느덧 나는 퇴근길에 오른다. 퇴근길은 출근길보다 더 짧게 느껴진다. 내일은 토요일이기에 집까지 걸어보기로 한다. 언제나 너와 함께 했던 길이다. 너가 옆에 없어도 네 생각과 함께 한 길이다. 오늘은, 오늘도 너와 함께하는 길일 텐데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그 때와 지금 다른 건 무엇일까? 지난날의 너에 대한 생각과 지금의 너에 대한 생각이 무엇이 다르기에 날 이렇게 괴롭히는 것일까?
쓸데없는 생각이란 것은 안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 하지만 자꾸만 생각한다. 이 생각마저 놓치면 내 많은 것들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두렵다.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우습게도 네가 나를 생각할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차라리 다 잊고 싶어진다. 그저 짝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여태껏 너만을 사랑했다. 그러나 나는 널 떠나버렸다. 너가 날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널 버렸다. 넌 날 잊으려 하지도 않겠지. 너는 나에게 미소지어준 적도 없으니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난 널 안다. 잊고싶어도 잊지 못하고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가 않는다.
너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 비에 젖어 습해진 향기만이 내 코에 스친다. 너는 알려나 모르겠다. 내 기억속의 향기는 언제나 향긋하게 내 마음을 채워준다는 것을 넌 알려나 모르겠다.
모두들 저마다 가슴에 향기를 품고 산다. 잡을 수도 있고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매번 아침마다 멍하니 생각하는 그 향기와 저녁 퇴근길 당신을 붙잡는 그 그리움. 누구나 머릿속에 그리는 그 것.
나는 그것을 꿈이라 하겠다.
오늘도 나는 너의 향기를 그린다.
그리고 나는 너의 꽃내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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