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제가 어릴적만 하더라도 학급도서에 의무적으로 반공교육 자료들이 있었습니다. 8x년 생인 저희 세대는 마지막으로 고등학교서 교련을 받은 세대이며 반공교육의 거의 끝물 세대입니다. </p><p><br></p><p>반공자료이기는 하되 악의적으로 북한을 얕잡아 보는 일방적인 자료는 아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도 인정할 만한 매우 객관적인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북한의 실태를 담담하게 서술한 자료였죠.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베이비붐 마지막 세대이며 결핍을 모르게 된 첫 세대인 80년대생들에게 90년대 당시의 대한민국은 이미 북한은 체제경쟁의 대상이 아닌 옆집에 사는 굶주린 거지에 불과 했기 때문이죠.</p><p><br></p><p>특히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고난의 대행군으로 북한의 모든 경쟁력이 뒤로 대행진 하면서 중세 시대만도 못한 사회로 회귀해버리고 반공 교육의 필요성은 점차 퇴색해 나갔고 저희 세대 이후부터는 반공 교육보다 수능이 보다 더 중요해 지게 되었죠.</p><p><br></p><p>시대의 요구에 따라 반공교육이 있었기 여기에 어떤 가치를 부여한다면 딱 한가지 효용성은 있었습니다. 세대를 아우르는 목적의식의 동질감이었고 거대한 공감대의 형성이었습니다. 북한이라는 거대한 외적인 위협덕분에 오히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가지는 하찮아 보이는 장점 까지도 무의식 레벨에서 공감을 이루게 되었고 집단 무의식 상태가 점진적으로 각 개인에게 내재화 되면서 인성부분에 대한 항체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는 점이지요. </p><p><br></p><p>예를 들자면 일종의 백신이었죠. 몸 외부의 세균에 온전히 노출 되는 것 보다 아주 약간의 세균을 통해 몸 안에 항체를 형성하는 것 처럼 북한이라는 외적에 의해 대한민국 이라는 나라를 개개인 단위로써 '올바른' 방향으로 내재화가 진행 된 경우이죠.</p><p><br></p><p>물론 이렇게 내재화된 인성들이 좋은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많습니다. 북한에 의해 항시 긴장 된 사회전반의 분위기는 질서와 치안에 대한 강력한 압박을 개개인에게 행사 하더라도 분단이라는 국가적 비상상황이라는 체제하에서는 사회전반적으로 각개인에게 보다 자발적인 자숙을 요구하더라도 불만의 틈이 생길 여지가 없었습니다. 물은 끓되 끓어 넘치지는 않는 상황이 6.25 이래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것이죠. </p><p><br></p><p>하지만 대한민국이 발전하고 북한이라는 외적이 사라지면서 단단한 결합고리로 작용 하던 반공 교육의 교리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고 그 틈새를 메우려 '인성 교육' 이라는 새로운 가치가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p><p><br></p><p>근데 문제가 생겼죠. </p><p><br></p><p>각 개인에게 '좋은 인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이었습니다. </p><p><br></p><p>답이 없습니다. </p><p><br></p><p>나라에 충성하고 이웃에 헌신적인것이 좋은 인성인가 각 개인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 좋은 인성인가 기업에게 이로운 인성이 좋은 인성인가? 기준은 수만이고 답은 수십만이고 현장에서 요구 되는 기준은 하나 입니다.</p><p><br></p><p>답을 모른다는 것입니다.</p><p><br></p><p>애들에게 무얼 가르쳐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국영수 위주로 공부해서 좋은 아이가 되는가? 이 좋은 아이가 커서 훌륭한 어른이 되는가? 너무나도 형이상학적이고 두루뭉술하고 실체가 없는 '좋은' 이라는 단어를 만족할 만한 철학이 보이지를 않는 것이죠.</p><p><br></p><p>기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각 개인에 의한 각개전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산업화 세대에게 있어 부양해야 할 가족의 호구지책이 당장 눈앞에 선결 되어야 할 문제이니 개인이 분발 안 할래야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실로 한 치 모자람 없이 초인이라는 단어에 부합 되게 산업화 세대들은 쥐똥의 박테리아만큼도 없이 살던 대한민국을 '맨몸뚱이' 하나로 일으켜 버렸습니다. </p><p><br></p><p>산업화 세대 직후의 운동권 세대들은 당면한 독재정권과의 싸움만이 선결이었습니다. 아주 약간 살만해졌으니 불만이 생길 수 밖에 없었죠. 그리고 오지 않던 봄마냥 해방 이후 처음으로 민중이라는 단어가 전면에 등장하는 민주화의 봄녘이 산등성이 너머로 시나브로 찾아 왔습니다. 덤으로 북한이라는 위협은 가끔 뉴스에 나와 깽판 치는 이미지로 급전직하하게 되었습니다.</p><p><br></p><p>매순간 순간이 치열한 전장이나 다름 없던 대한민국 근대사가 '개인'에 대해 숙고할 시간이 있었다면 그게 바로 시대적인 '농담'이지요.</p><p><br></p><p>도무지 어떤 개인이 대한민국에 어울리는가 정말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회는 아주 심플한 답을 토해내고 맙니다.</p><p><br></p><p>'혼란'</p><p><br></p><p>민주주의의 올바른 전제조건은 충분히 교육 받은 '개인'의 바른 '집단 무의식'의 형성에 있습니다. 충분히 교육 받은 개인이 거대한 집단으로써 올바르게 통합하려면 아젠다와 토론이라는 기제가 필요합니다. 통합 과정에서 뜨거운 열이 발생하는 것은 사회가 그 만큼 건강하게 개인을 육성해내었고 그 에너지 함량이 거대하다는 반증과 같습니다. </p><p><br></p><p>인터넷은 항시 뜨겁습니다.</p><p><br></p><p>오프라인은 어떨까요? 수 많은 사회적인 차원의 도전이 지금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의 상태를 보자면 '냉담', '무관심', '무시'와 같은 민주주의의 근본을 저해하는 치명적인 독소가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시민 레벨에서 민주주의의 열망이 식어 버리면 다음은 민주주의의 절차적 제도가 일부 실권자에 의해 유린 됩니다. 시민 감시 없이 민주주의 근본 원칙을 실권자가 요리 조물딱 저리 조물딱 거려도 그 결과는 어차피 공평하게 시민들이 나눠 갖게 됩니다. 아주 근본적으로 우리가 방기해 버린 권리로 인해 빚어지는 참사들은 우리의 손으로 동의한 것과 똑같은 효력을 가지기 때문이죠. 그게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p><p><br></p><p>...</p><p><br></p><p>근데 어차피 혼란은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산업화가 좋은 것이라며 물질이 만능이라며 달려 온 결과에 대해 '정당'하게 그 값을 치르는 와중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있어 잰걸음이라는 것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빠른 산업화에 사회적 혼란은 적절한 지불수단이지요.</p><p><br></p><p>재수 없는 건 항시 개인이었습니다. 역사책을 뒤져 보세요. 뻑하면 몇십 몇백 몇만이 죽어 나갔다는 기록 뿐입니다. 그 기록의 몇십만에 재수 없게 '우리'가 포함되는 것이지요. </p><p><br></p><p>다만 세대에 세대를 이어 벌어 지던 혼란상마저도 아주 빠름 빠름 빠름 하죠.</p><p><br></p><p>결국에 가장 중요한 건 아마도 '하기 나름'이 아닐까요? 얼마나 과격한지는야 알 바 아니지만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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